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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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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諸葛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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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군신 관계3. 가족 관계4. 친인척 관계5. 교우 관계6. 공적 관계7. 적대 관계8. 관련 문서

1. 개요

제갈량의 인간관계를 다루는 문서.

2. 군신 관계

3. 가족 관계

파일:제갈규가계도1.jpg
파일:제갈규가계도2.jpg

4. 친인척 관계

5. 교우 관계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하면서 득을 본 것 중에 하나가 제갈량의 인적 네트워크란 시각도 있다. 그전까지 유비는 그를 보좌해 줄 인재들이 그리 많지 못했지만 제갈량을 등용함으로써 제갈량이 알고 지낸 형주의 인사들을 추천받거나 하여 상당수의 인재들을 얻을 수 있었다.[15]

6. 공적 관계

7. 적대 관계

8. 관련 문서


[1] 출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2] 유비는 유언을 남기기 전 제갈량에게 유선에게 능력이 없다면 성도의 주인이 되라고 할 정도로 신뢰를 쏟았다. [3] 양양기襄陽記 - 당시 사람들은 이를 우스워하고 즐겁게 여겼다. 마을에서는 그 때문에 '공명처럼 부인을 선택하지 말 것이니, 그리되면 아승阿承(황승언을 말함)의 추녀를 얻게 되리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4] 최종 직위는 대장군이다. 그리고 제갈근이 죽었을 때, 손권이 정말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했는데, 제갈근이 유비를 회유하기 위해 서신을 보냈을 때 제갈근이 유비와 내통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손권이 직접 나서 제갈근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해 준 덕에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적인 이야기를 안 하면서 처신을 조심했다고 볼 수 있다. [6] 덕분에 연의에서는 최후의 보루의 사신으로 가기도 한다. 다른 놈이 갔으면 분명히 당장 목이 날아갔겠지만 제갈근이라 목숨을 부지해나오는 경우가 대다수. 관우에게 투항을 권하러 갔다가 관평이 목을 치려고 하는데 관우가 말리는 장면도 있고, 유비에게 동오 침공을 멈춰달라 부탁했다가 동생 때문에 살아돌아가는 거라고 수모를 겪는 일도 당하는 편. 애초에 제갈근이 보내지는 것은 진짜 급한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7] 사실 제갈근이 걱정되어 위해서 말리는것 아니냐고 오해받기 쉬웠다. 다만 제갈량이 아니라 조운 등 여러 대신들이 손오를 공격하는것을 말렸다. 누가봐도 먼저 치고나가는 쪽이 불리했기 때문. [8] 현대로 치면 경찰청장으로 두 형이 각각 대장군과 승상(현대로 치면 각각 국방부 장관과 총리)에 올라서 낮아보이는 거지 결코 낮은 지위가 아니다. [9] 제갈량도 북벌을 계속 실패했으나 자신의 벼슬을 깍거나 공손하게 행동하였고 상국의 지위에도 교만하지 않고 책임을 다한 반면 제갈각은 합비 전투의 실패를 남 탓으로 몰고 오히려 또 다른 외정을 즉시 준비하는 등 모두의 공분을 샀다. 제갈량은 북벌을 행하면서 나라의 국력을 다시 축적하는걸 기본으로 삼은 반면 제갈각은 패전 한 번으로 나라가 엉망진창(...). [10] 다만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와 헌제춘추에서는 주호와 제갈현이 싸웠다고 기술되어 있다. [11] 채모의 아버지 [12] 유표 입장에서 제갈량이 [13] 제갈량의 입장에서 유표가 [14] 고대 중국에서 '개'는 의미와 달리 충성스러운 동물의 이미지를 띄며, 사자성어인 '견마지로(犬馬之勞)', 몽골 건국의 '사준사구(四駿四狗)'처럼 긍정적으로 활용되는 용례가 있으니 이는 비하적 의미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지만, 잘못된 주장이다. 어떤 언어에서든 용례에 따라 단어에 내포된 의미는 달라지는 법이다. 포청천에서 작두에 들어가는 세 동물이 용, 범, 그리고 개인 이유가 각각 신분의 차이를 상징함을 생각해보자. 비교급에서 다른 동물들과 개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에는 용례 중 "격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당장에 같은 시대의 동탁이 여포에게 죽으며 남긴 유언이 개새끼 같은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였다. [15] 제갈량을 얻기 전 유비군의 인적자원 구성은 관우, 장비, 간옹, 손건, 미축, 진도, 유염, 위연, 조운 등이다. 그러나 이들도 생활 기반을 모두 버리고 온데다가 사마휘의 평가처럼 한 국가를 경영하고 유지할 재목은 되지 못했다. 진등, 진군, 전예, 원환처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진 부하들도 있었다. 유비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닌 생활이 길어서인지 친족 중심으로 운영하던 조조나 손씨 가문과 달리 유씨 종친 네트워크나 스승 노식으로 구축된 학파 인맥의 덕을 거의 보지 못한 듯하며 유표 사후 유기를 따르는 형주의 잔여 세력을 포함해 제갈량과 방통으로 대표되는 형주파와 입촉 전후로 유장 휘하에 있던 익주파를 다수 얻게 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인재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16] 박릉 최씨는 남북조, 수당시기 태원 왕씨 등과 함께 산동귀족의 대표가문이다. [17] 다만 슬퍼서 베었다와 또는 유비가 죽기전 제갈량에게 마속을 중히 쓰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떠올라서 울었다가 있다. [18] 연의에서 오나라에서 동남풍을 불게 한 후 도망칠 때 유비에게 도울 사람으로 조운을 요청했으며, 유비가 오나라로 정략결혼을 갈 때도 조운에게 호위를 맡기며 계책 3개를 주는 내용이 있다. 그만큼 조운을 신뢰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9]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려 했을 때 이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반대하기도 했다. [20] 다만 1차 북벌 이후 사망함에 따라 제갈량의 군정 부담이 늘어나 결국 일찍 사망하는 원인이 된다. [21] 최소한의 대안이 될 수 있었던 이엄은 자멸하고, 강유는 군재가 충분하나 위의 항장출신인 약점이 있어, 위연이나 양의 같은 인물을 중재해가며 쓸 수 있는 인물이 사실상 제갈량밖에 없었다. [22] 이렇다 보니 설화에서는 제갈량과 관우가 대립, 대결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부분 관우가 지거나 하는 식으로 제갈량이 띄워지는 식으로 흘러가는 편. [23] 촉서 법정전. [24] 이런 점 때문인지 삼국지연의 이외의 미디어 믹스, 만화나 드라마에서는 관우와 제갈량이 대립하는 묘사처럼 정치적으로 법정과 제갈량이 둘다 유비를 따른다는 뜻은 같으나 방향성에 대해 대립하는 묘사가 나온다. [25] 또 법정이 한중공방전에서 유비의 참모로서 참군하며 위나라 상대로 책략을 썼고 유비가 물러서지 않자 몸소 나서서 화살을 피하지 않고 "명공께서 친히 화살과 돌을 당해내시는데 하물며 소인이 피하겠습니까?" 몸으로 간언을 하여 유비에게 크게 신용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꽤 신빙성 있는 언급이다. [26] 또 관우,장비,조운에 버금가는 유비의 충직한 신하였기에 살아있었다면 익주 토박이로 오해받는 이엄 대신 제갈량과 같이 탁고를 맡았을 가능성이 꽤 있었다. 제갈량과 이엄 대립에 대한 행적은 하단의 이엄 참고. [27] 연의에서는 한술 더 떠서 위와 오가 손을 잡는다는 거짓정보를 흘렸다.(맹달이 공격했을때 편지로 퇴각시켰다는 버프를 받았지만.) 사실상 양수 이상의 트롤링.(애초에 한중 공방전은 조조가 불리하여 퇴각을 고민하는 선이었으면 4차 북벌은 제갈량이 승기를 잡은 상황이었다. 거기서 이엄이 오나라와 위나라가 손을 잡는다는 위보를 흘렸으니 정사의 자연재해보다 더한 거짓말을 한것.) [28] 칭왕제의도 엄밀히 표현하면 100년전도아니고 몇년전에 한실 역적 조조가 구석을 받고 위왕이 되었다. 조조의 위세가 컸음에도 조조가 위왕이 되자 역적질이라고 전국적으로 소규모 반란들이 일어났는데 누가봐도 역적질 하라고 꼬드긴것이다. 유비에게 탁고를 받은 대신이 게다가 상국이 되어도 아무런 욕심도 없이 촉한에 충성을 바친 제갈량의 생애를 본다면 당시 이엄의 칭왕 제의는 제갈량 입장에선 선제의 신뢰에 대한 지나친 배신이었기에 상소문 첫 마디에서는 선제에게 탁고를 받은 이엄이 선제의 신뢰를 배신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29] 생전에 정황이 있어봐야 제갈량의 후예들이 이엄을 쓰기 어렵고, 거기에 제갈량도 이엄이 탁고대신이라 통제하지 못한 정황도 있는데 제갈랑의 후예들이야... [30] 황권은 위나라에 항복하면서도 자신은 '동오에는 도저히 항복할 수 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괜히 황권이 조위로 전향했는데도 촉한에서 별다른 반발이 없었던 게 아니다. [31] 실제로 유비도 황권이 자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황권을 배신한 격이라고 하며 법 집행을 담당하는 관리의 황권의 일가족 체포 상주에 대해 일축한다. [32] 2차 권유에선 학소가 근상에게 제갈량에게 항복권유에 감사하다고 하면서 어디 한번 공격해봐라 도발하는 뉘앙스로 대답한다. [33] 몇 십년 전만 해도 대규모로 일어난 황건적의 난의 수뇌부가 태평도라는 종교집단인걸 감안하면 제갈량의 장로에 대한 부정적 인상은 이상하지 않다. [34] 정작 장로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태평도와 다르게 자신이 차지한 한중을 그런대로 잘 다스려서 당시 한 조정으로부터 자신의 지배권을 인정받기까지 했다. [35] 장완도 마속의 처형을 막기위해 "중죄를 지은 건 맞지만 그래도 처형까지는 심한것 같다"고 의견을 낸적이 있었지만 이막은 "저 인간같지도 않은 서쪽 오랑캐들도 용서라는 걸 하는데, 넌 왜 못 하는 거야? 오랑캐만도 못한 거야? 대업 이루기 싫어?'라며 만류하는 척 하며 제갈량을 돌려 깠다.(당연히 장완이 가뜩이나 나라에 인재가 없는 이유로 마속을 변호라도 했지 이막은 오로지 제갈량을 까기 위해서 도리에 맞지 않는 비유를 들며 마속을 변호했다. 문제는 마속이 한 병크는 너무나 초보적이고 명백한 자신의 잘못, 그것도 정상적인 정신 상태라면 당연히 이행해야 할 명령을 고의로 어긴 것(항명)으로 인해 국가의 대업인 북벌을 좌절시켰으며 탈영까지 한 정황도 있었다. 이쯤되면 제갈량이 마속을 살려주고 싶어도 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융이라는 표현도 제갈량이 남쪽으로는 남월을 북서쪽의 강족과 화친을 맺으려고 기를 쓰고 있는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개소리인 셈. [36] 성격만큼은 순한 유선도 이 때만은 크게 분노하며 이막을 죽였다. [37] 제갈량이 만약 권력 욕심을 내거나 이엄처럼 사유화 하며 황실을 기망했다면 이막의 주장은 변호받을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었겠지만 그 반대였다. 고대 중국사에서 드물게 상국의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직무에 충실했고 정치를 할때도 황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택하여 유선도 제갈량을 마음에 들어했고, 촉한의 신하들의 모범이었다. 이런 제갈량을 모욕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촉 황실을 기만하는 것이기에 이막은 죽음을 자초한 셈. 굳이 유선이 아니더라도 일개 관리가 개국공신의 사망을 기뻐하는 표를 올린다면 군주는 기강을 잡기 위해 표를 올린 관리를 바로 참할것이다. [38] 제갈량이 엄격한 통치를 펼쳤음에도 그 동안 그를 원망한 백성들은 없었던걸 감안하면 촉의 민중들에게 경애받고 있다는걸 알수 있다. 이런 제갈량을 억지로 비방했으니 이막을 변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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