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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50:03

정업원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4호 5호 6호
낙성대 삼층석탑 정업원 터 용양봉저정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5호
정업원 터
淨業院址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산3번지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 / 면적 석비 1基, 비각 1棟, 토지 691㎡
지정연도 1972년 5월 25일
시대 조선 영조 47년 (1771년)
소유자
(소유단체)
청룡사
관리자
(관리단체)
문화재청
파일:정업원구기.jpg
<colbgcolor=#ae1932> 정업원 터를 알리는 비각
1. 개요2. 역사3. 정순왕후와의 관계4. 외부 링크5.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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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시대 조선 전기에 한양 궁성 내에 존재했던 비구니 처소. 현재 영조 시기에 비정한 장소인 종로구 숭인동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 정업원구기는 '정업원 터'라는 명칭으로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유산 제5호로 지정받았다.

2. 역사

정업원(淨業院)은 고려 때부터 왕실 또는 권문세가 여인이 출가해 살던 개경에 있던 절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1164년( 고려 의종 18) 의종이 정업원에 행차한 기록, 원나라(元) 침략으로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 후 1252년(고종 38)에는 박훤(朴暄)의 집을 정업원으로 사용한 기록, 개경 환도 후 정업원도 다시 개경으로 이전한 기록, 충숙왕 때 남편 이집(李緝)을 살해한 반씨(潘氏)를 정업원에 있게 한 기록, 고려 말에는 비구니 묘장(妙藏)이 주지라는 기록이 있어 그 전부터 정업원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 기록만 보면 고려시대 정업원은 왕조가 관리하는 사찰로 지배계급 출신의 비구니들이 살던 절로 추정된다. 특히 충숙왕 때 남편 이집(李緝)을 살해한 부인 반씨(潘氏)를 정업원에 머물게 한 이유를 살펴보면 당시 고려는 원의 지배를 받는 국가였고, 반씨(潘氏) 부인은 원의 세조가 아낀 반부(潘阜, 1230~?)의 후손으로 형벌의 제제가 쉽지 않는 점을 생각하면 고려 정업원은 여자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업(業)을 참회하는 사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쿠테타로 집권한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며 고려왕권의 주요 왕족과 귀족들을 인질로 데려온다. 이 중에는 남편을 잃고 승려가 된 왕족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살게 한 곳이 정업원으로 추정된다.

조선건국 후 처음으로 정업원으로 들어간 여인은 1398년, 태조 이성계의 3녀이자 신덕왕후 강 씨의 장녀인 경순공주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복오빠 태종 이방원에 의해 남편 이제가 이방번, 세자 이방석과 함께 살해되자 아버지에 의해 승려가 됐다.

고려 공민왕의 후비이자 익제 이제현의 딸 혜빈 이씨(혜화궁주)가 공민왕 사후 정업원으로 출가했다가 한양으로 옮긴 정업원에서 1대 주지를 했다. 태종이 혜빈에 이어 2대 주지에 임명한 여성은 소도군(昭悼君) 처 심 씨다. 소도군은 태조의 8남이자 조선의 첫 번째 세자였던 방석을 말한다.(그가 의안대군이 된 것은 거의 300년 뒤다)

성종 때는 수춘군 이현(1431~1455·세종의 13남)의 부인 정 씨가 정업원 주지를 했다. 남편이 수양대군의 반대편에 서 정 씨 역시 머리를 깎았다. <성종실록> 1482년(성종 13) 2월 3일 기사에 따르면, 조정에서 왕자의 부인이 여승으로도 모자라, 절의 주지가 된 것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성종은 “대왕대비께서 명하여 주지로 삼은 것이다. 처음 비구니가 되었을 때에는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꾸짖었다. 궁에서 쫓겨난 왕실 여성들이 간 곳은

초기 조선의 정업원은 건국의 안정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수도 이전에 따른 중요 공사에 밀리면서 신축이 아닌 기존 사찰을 정업원으로 이용한다.

정업원에 대한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은 창경궁 서쪽 응봉(鷹峰)에 있었다는 기록인데 응봉(鷹峰)은 고유명사가 아닌 산 정상을 뜻하는 말로 조선 개국 당시 창경궁 서쪽 응봉에 있던 절은 747년에 진표가 창건한 정토사(淨土寺)가 있다.

정토사는 1399년 (정종 원년)에 조선 건국공신이자 최초 국사(國師)였던 무학(無學) 자초(自超)의 지시로 함허가 중창한 사찰로 1413년(태종 13)에는 상왕인 정종(조선 2대 왕)이 요양을 위해 절에 머문 기록, 세조 때 의숙옹주의 묘가 백련산 밑에 있어 이 절을 재궁으로 정하고 백련사로 이름을 고친 기록, 정업원과 백련사의 폐사가 비슷한 점, 조선 중기까지 존재한 정업원을 기록한 한양 지도의 부재 등을 고려하면 현재 서대문 홍은동에 소재한 대한불교천태종 소속 백련사가 최초의 정업원으로 사용된 사찰로 추정된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창덕궁 후원 뒤편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숭유억불 정책이 강화되는 태종년간부터 궁궐 내에 불교와 여성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극혐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정업원을 폐지시키자는 논의가 계속 제기되었다. 결국 1448년(세종 30) 세종대에 이르러 내불당(內佛堂) 건립을 앞두고 정업원이 혁파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다 1457년( 세조 3)에 당시 왕이었던 세조의 명에 따라 원래 있던 자리에 정업원이 다시 부활했다. 다만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정업원의 부활은 불교의 흥성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혼자가 된 여성들과 장애인들의 궁핍한 삶을 구제하고자 시행하겠다는 점을 주로 표방했다.
"과부(寡婦)와 외로운 여자들이 대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는데, 여승이란 실로 궁박(窮迫)한 무리들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 정업원(淨業院) 을 세우고 이곳에 모여 살게 하여 이들을 구제하려고 한다. 또 다리를 절어서 보행할 수 없는 자도 지극히 궁하고 불쌍한 자이다. 삼각산(三角山)의 들에서 살며 걸식(乞食)하는 의뢰(依賴)할 곳 없는 기민(飢民)들은 어찌 그 생명을 이어 가겠는가? 내 뜻을 몸받아 포치(布置)하도록 하라."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9월 8일 기사 2번째기사

이후 세조는 정업원에 전지 100결을 내렸고, 매달 멥쌀(粳米) 7석을 정업원에 주게 했다. 그리고 정업원 소속 노비에게는 잡역을 모두 면제토록 했다.

하지만 성종대에 사림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정업원은 유학자 관료들의 주요 까임 대상이 되었다. 결국 1489년(성종 20)에는 인수대비가 정업원으로 보낸 불상을 유생 이벽 등이 가져다 태워버리고, 임금인 성종이 반달리즘을 벌인 유학자들을 두둔하며 어머니 인수대비를 막아서는 일까지 발생했다. 성종실록 228권, 성종 20년 5월 11일 무진 4번째기사 대놓고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왕의 어머니가 수호하는 까지 불태우는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

결국 1504년(연산군 10) 7월 29일 연산군이 "정업원과 안암사(安庵寺)의 여승들을 국가에서 몰수한 한치형(韓致亨)의 집으로 강제로 이동시키라"고 명하면서 정업원을 철폐했다. 이로써 세조가 중창한 정업원은 명맥이 끊어졌다. 이후 중종이 1506년(중종 1) 선비들을 정업원에서 사가독서하게 했고 독서당(讀書堂)으로 사용하다가 독서당을 두모포(頭毛浦, 현 서울 성동구 옥수동)로 옮긴 1517년(중종 12) 이후로는 완전히 폐사지가 되었다.

3. 정순왕후와의 관계

정업원은 오랜 세월동안 조선 왕실 여성들의 보호처였다.

조선 건국 후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말년에 정업원에서 지냈고, 1차 왕자의 난 뒤에 세자 방석의 누나인 경순공주도 이곳에 머물렀다.

조선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계유정난 이후 이 정업원에서 지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될 때, 동대문 밖에서 단종과 생이별한 정순왕후는 지금의 숭인동 청룡사 터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 시녀 3명과 함께 눌러 앉는다. 이곳이 바로 정업원 옛터다. 이때 송씨의 나이 18세였으며, 이때부터 그녀는 날마다 남동쪽 가까이에 있는 바위산에 올라 단종이 유배된 영월 쪽을 바라보며 슬픔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며 애절한 삶을 살았다. 그녀가 죽은 82세까지 64년의 길고 긴 세월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산에 올라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다만 실제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된 후 확인해본 결과, 실제 정업원은 동대문 밖에 아니라 궁궐 내에 있었다. 이는 조선 영조 47년(1771), 지금의 자리인 동대문 밖 연미동 청룡사를 영조가 과거 정업원 터라고 보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친필로 써 정순왕후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기 때문인데, 이는 제대로 잘못된 정보였다. 훗날 경혜공주 분재기도 발견되면서 당시 관련 여성들이 궁궐 내에서 공주직을 유지하며 지냈음이 공식적으로 재확인되었다.

영조가 직접 친필로 세운 정업원구기는 현재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다만 관리상태가 엉망이라 이를 지적한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오마이뉴스 : 단종 비의 한이 서린 정업원 옛 터 주변에는 야인이 된 정순왕후가 매일 바위산에 올라 울면서 단종의 넋을 기린 장소라는 동망봉도 함께 있다.

4. 외부 링크

5.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제5호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송씨는 단종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자, 정업원에 머물며 평생동안 그의 명복을 빌었다. 정업원은 여승방(女僧房)으로 원래 창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성안에 있는 것인데, 성 밖에 있었다는 전설에 따라 이곳에 비를 세우고 비각도 짓게 되었다. 이는 정순왕후 송씨가 동대문 밖인 이곳에서 지냈던 사실과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던 일이 얽혀서 잘못 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47년(1771)에 세운 비로, 비문 일부와 비각 현판의 글은 왕이 손수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