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9:25:25

전영택

田榮澤
1894년 1월 18일 ~ 1968년 1월 16일 (향년 73세)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대한민국 소설가이자 감리회 목회자이다.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호는 늘봄, 추호(秋湖), 불수레, 장춘(長春) 등이다.

특히 찬송가 559장에 있는 사철에 봄바람 불어있고 라는 찬송을 직접 작사했는데 지금도 가정예배에서 많이 불리고있다.

2. 생애

1894년 1월 18일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외천방 사창동(現 평양시 중구역 교구동)에서 아버지 전석영(田錫永, ? ~ 1909)과 어머니 강순애 사이에서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진남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성중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 재학 중이던 1910년 중퇴했다. 중퇴 후 잠시 진남포 삼숭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고, 이듬해인 1911년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로 이주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했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가쿠인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고, 1914년 고등학부를 졸업했다. 1915년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문학부에 입학해 1918년 졸업했으며, 같은 해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1919년 김동인, 주요한, 김환 등과 문예지 창조(創造)의 동인이 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창간호에 '혜선(惠善)의 사(死)'를 발표했다. 같은 해 도쿄도에서 있었던 2.8 독립 선언에 가담했다가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3월 말 일시 귀국했고, 4월 29일 이화학당을 졸업한 채혜수(蔡惠秀)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튿날 채혜수가 평양부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이 때문에 9개월간 아내의 옥바라지를 했다.

1921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신학부에 재입학해 30세 되던 1923년 마침내 졸업하고 귀국했다. 1923년 7월 조선기독교창문사에서 정기 간행물인 '신생명(新生命)'을 창간하자, 초대 주필에 선임돼 편집 실무를 담당했고, 1924년 협성여자신학교 교수에 임명돼 활동하면서 중앙교회, 창천교회 소속으로 목회 활동에 종사했다. 1925년 화수분을 발표했으며, 1927년 5월 감리교회 목사 안수를 받고 이듬해인 1928년 10월 아현교회에 부임했다.

1930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퍼시픽 신학교에 입학했고, 시카고에서 흥사단에 입단했다. 1932년 12월 퍼시픽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으며, 이듬해인 1933년 황해도 봉산교회에 파견되었다. 1935년 목회를 그만두고 경기도 경성부로 이주해 집필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1938년 6월 18일 직전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이묘묵(李卯默)을 비롯하여 정영도(鄭英道)·김여제(金與濟)·김여식(金麗植)· 현제명(玄濟明)·류형기(柳瀅基)·이명혁(李明赫)·박태화(朴泰華)·차상달(車相達)·하경덕(河敬德)· 갈홍기(葛弘基)· 홍난파(洪蘭坡) 등 12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김노겸(金魯謙)· 노진설(盧鎭卨)·이기윤(李基潤)·최봉칙(崔鳳則) 등 5인의 동우회원 등 17인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단체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가입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했다. 같은 해 8월 18일 위 사람들과 함께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받았다. 1939년 10월에는 친일 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8.15 광복 조선민주당 문교부장에 선임되었고, 1945년 12월 월남해 이듬해인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관이 되었다. 1947년 국립맹아학교장, 1948년 중앙신학교 교수, 1952년 도쿄 한국복음신보 주간, 1954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국장, 1961년 초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1]

그러던 1968년 1월 16일, 범세계 기독교통합을 축하하는 원고를 작성해 기독연합신문에 기고한 뒤 오후 3시 50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91번지 기독교방송국[2] 앞길에서 전차를 타려고 길을 건너던 중, 과속으로 달려온 코로나 택시에 치여 교통사고를 당했다. 직후에 동대문구 신설동 윤복영외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오후 6시 13분 뇌출혈 별세했다.

3. 가족



[1] 이후 한국외국어대학교 부근인 동대문구 이문동 327-15번지에 거주했다. [2] 당시에는 YMCA회관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