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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08:20:46

장 1세 드 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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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 1세 드 푸아.jpg
성명 장 1세 드 푸아
Jean Ier de Foix
생몰년도 1382년 ~ 1436년 5월 4일
출생지 가스코뉴 공국
사망지 프랑스 왕국 푸아 백국 마제르
아버지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
어머니 이자벨 드 푸아카스텔봉
형제자매 가스통 1세, 아르샹보, 마티외, 피에르
배우자 나바라의 호아나, 알브레의 잔, 우르헬의 잔
자녀 가스통 4세, 피에르
직위 푸아 백작, 베아른 자작, 마르샹 자작, 카스텔봉 자작, 안도라 공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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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에 귀속된 푸아 백작. 본래 부계로 가스코뉴의 귀족 가문인 그레일리 가문의 후손이지만, 그레일리 가문의 이름과 문장을 버리고 모친이 속한 푸아 가문의 이름과 문장을 사용했다. 백년전쟁 시기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를 오갔지만 직접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지 않고 이득을 챙겼다.

2. 생애

부흐의 카프탈(Captal, 특정한 주의 최고 영주)로서 가스코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와 카스텔봉 자작인 로저베르나르 2세 드 푸아카스텔봉의 딸인 이자벨의 장남이다. 형제로 가스통 1세, 아르샹보, 마티외, 피에르[1]가 있었다.

그레일리 가문의 시조인 장 1세 드 그레일리는 본래 사부아의 제네바 호수 기슭 출신으로,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통치 기간에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왕비의 삼촌인 사보이아 백작 피에르 2세의 수행단을 따라 잉글랜드를 방문한 뒤 당시 왕위 계승권자였던 에드워드의 기사가 되었다. 그 후 베나쥬 자작으로 선임되었고, 보르도의 제염소와 도르도뉴강 통행료 취득권을 획득했으며, 가스코뉴 영지의 세네샬로 발탁되었다. 1270년 잉글랜드 국왕이 된 에드워드 1세 십자군 원정에 동행했으며, 1289년 트리폴리와 아크레에서 프랑스 자원부대를 이끌고 맘루크 왕조의 공세에 끝까지 항전하다가 중상을 입고 기옌으로 돌아왔다. 이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가스코뉴 침공에 맞서 항전했다.

장 1세 드 그레일리 이래로, 그레일리 가문은 대대로 잉글랜드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며 가스코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부 피에르 2세 드 그레일리(1285 ~ 1356)는 카스티용 자작으로서 가스코뉴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였으며,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기사로서 백년전쟁에 참여했지만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버지 아르샹보는 잉글랜드 왕국을 위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해 흑태자 에드워드의 대승에 기여했다. 이후 베르트랑 뒤 게클랭 등 프랑스 장성들이 아키텐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저지하는 데 참여했으며, 프랑스 왕위를 노리고 군사를 일으킨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를 지지했다. 그러나 1364년 5월 16일 코르슈렐 전투에 참가했다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참패하고 사로잡힌 뒤 500프랑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391년 8월 1일,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던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 사냥을 마치고 식사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곧 사망했다. 가스통 3세의 유일한 적법한 아들이었던 가스통은 1380년 6월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푸아 백국의 작위와 영토는 가스통 3세의 6촌이자 그의 어머니 이자벨의 남동생인 마티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마티외 역시 1398년에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고, 어머니 이자벨이 푸아 가문의 마지막 구성원으로서 모든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아버지 아르샹보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카스텔봉 자작에 이자벨의 남편으로서 푸아 백국의 공동 통치자 자격으로 마르샹 자작, 베아른 자작, 카스텔봉 자작, 그리고 푸아 백작에 취임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은 프랑스 왕국의 가장 큰 영토 중 하나였던 푸아 백국이 잉글랜드의 봉신에게 넘어가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르샹보가 프랑스 왕실에 충성을 서약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프랑스 무관장 루이 드 상세르에게 푸아 백국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루이 드 상세르는 군대를 일으켜 아르샹보가 다스리고 있던 대부분의 영토를 점거해, 아르샹보가 1399년 5월 10일에 타르브에서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겠다고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그 후 아르샹보는 프랑스 국왕을 주군으로 받들었으며, 두 아들 장 1세와 가스통 1세를 파리 궁정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그렇게 인질로 보내진 장 1세는 1406년 4월 24일 푸아 백국의 후계자로서 샤를 6세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베아른 중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1406년 블라예 공방전, 1406 ~ 1407년 부르 공방전 등 여러 작전에 참여했다. 1409년 제노바에서 사르데냐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한 아라곤 왕국의 국왕 마르틴 1세에게 가담했으며, 그 해 9월에 푸아로 돌아갔다. 1410년 5월 31일 마르틴 1세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아라곤 왕위가 공백 상태가 되자, 여러 경쟁자가 왕위를놓고 경쟁했다. 그는 마르틴 1세의 형이자 전임 아라곤 국왕인 추안 1세의 여동생 아라곤의 욜란다와 결혼한 앙주 공작 루이 2세를 지원했다. 그러나 1412년 아라곤 왕위는 페란도 1세에게 돌아갔다.

1412년 2월 12일, 아버지 아르샹보가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아르샹보처럼 어머니 이자벨의 공동 통치자가 되어 푸아 백작, 베아른 자작, 마르샹 자작, 카스텔봉 자작 직위를 상속받았고, 그레일리 가문의 이름과 문장을 버리고 푸아 가문의 이름과 문장을 사용했다. 같은 달, 샤를 6세로부터 랑그독과 기옌의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4월에는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와 전쟁을 벌였다. 1413년 5월 28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베르나르 7세가 파리를 8월 23일에 접수하고 권력을 장악한 뒤 파기되었다. 1415년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5세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그는 베르나르 7세와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잉글랜드에 대항했다. 하지만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1418년 5월 28일 도팽 샤를과 합류했으며, 8월 17일 랑그독과 기엔 보안관에 재차 선임되었다. 1418년 11월 16일 아르마냐크 진영에 합류했지만, 1419년 3월 보안관으로서 특권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도팽 샤를에 의해 해임되자 그해 10월 부르고뉴파에 가담했다. 이후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1421년 3월 3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로부터 랑그독과 기옌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헨리 5세가 사망한 뒤 프랑스 쪽으로 등을 돌려 1423년 5월 도팽 샤를로부터 샤면 편지를 받은 뒤 랑그독과 기옌 보안관에 재선임되었다. 1425년 조상이 가졌던 비고르 백국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전쟁에 직접적으로 뛰어들길 거부하고 영지를 지키는 데 주력했으며, 잔 다르크의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1428년 어머니 이자벨이 죽어 단독 푸아 백작이 되었다. 1433년 형제 피에르를 대리 사도로 임명하기 위해 아비뇽 교황청에 압력을 가했다. 1436년 5월 4일 마제르에서 사망했다.

3. 가족



[1] 1386 ~ 1464, 아를의 대주교이자 추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