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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제국 제21대 국왕
자야바르만 7세 ជ័យវរ្ម័នទី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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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B8E23><colcolor=#fff,#fff> 출생 | 1125년 |
크메르 제국 앙코르 | |
사망 | 1218년 (향년 92~93세) |
크메르 제국 앙코르 | |
재위 기간 | 크메르 제국 국왕 |
1181년 ~ 1218년 (37년) | |
대관식 | 1181년 |
전임자 |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 |
후임자 | 인드라바르만 2세 |
부모 |
아버지 :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 어머니 : 스리 자야라자쿠다마니 |
종교 | 상좌부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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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메르 제국의 국왕. 앙코르와트 건설자인 수리야바르만 2세와 함께 크메르 제국을 넘어 캄보디아 최고의 성군으로 손꼽히는 명군이다. 위대한 도시 '앙코르 톰', 사면미소상 바이욘 사원, 어머니를 위해 바친 타 프롬 사원 등을 지은 업적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힌두교 중심 국가였던 크메르 제국을 본격적인 불교 국가로 탈바꿈시킨 국왕이기도 하다.2. 상세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에 오르기 직전의 크메르 제국은 한창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앙코르 와트를 세운 수리야바르만 2세 사후, 후계자들끼리 내전이 발발하고 외세가 쳐들어오면서 제국 자체가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수리야바르만 2세에게 당한게 많던 참파가 이를 갈고 크메르를 집중 공략했다. 1177년 참파의 국왕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는 함대를 이끌고 메콩강과 톤레삽 호를 건너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를 기습공격했다. 수도를 방어하던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 국왕을 죽인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는 앙코르를 약탈하기까지 했다.이렇게 크메르 제국이 참족에게 수도가 털리는 굴욕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자야바르만 7세였다. 선왕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의 아들이자 왕족, 당시로서 이미 50대 중반이었던 자야바르만 7세가 남아있는 군대를 규합해 앙코르를 약탈하던 참족 병사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자야바르만 7세는 1178년 처음으로 참족 군대를 물리쳤고, 나중에는 이 업적을 내세워 수도의 파벌 싸움을 정리한다음 1181년 수도 앙코르에서 직접 왕위에 올랐다. 자야바르만 7세는 즉위 직후 참파의 추가 병력을 물리치고 인근 소왕국의 반란을 제압하며 제국 안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참파에게 수도 앙코르까지 빼앗겨본 기억을 잊지 않은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를 공격하는 데 진심이었다. 그는 1190년에 8년 전 크메르로 망명해온 참파 왕자 비드야난다라를 내세워 참파를 침공했다. 비드야난다라는 크메르의 도움을 받아 참파 군대를 격퇴, 수도 비자야를 함락하는 데까지 성공했고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를 잡아 크메르로 압송해 끌고 왔다. 비드야난다라 왕자는 참파의 왕으로 즉위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반란으로 비자야에서 쫒겨나 크메르로 도망쳐왔다. 격노한 자야바르만 7세는 다시 군대를 보내 비자야를 다시 한번 함락시키고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 그리고 그 후계자 자야 인드라바르만 5세를 죽여버렸으며 1203년에는 참파 북부 전체를 아예 크메르 제국의 속령으로 편입했다. 크메르 제국의 참파 통치는 1220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이후 크메르 제국의 국력이 점점 약화되자 파라메스바라바르만 2세가 참파의 재독립을 선포하면서 결국 18년만에 종결된다.
바이욘 사원의 인면상. 인면상의 모습은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을 본떠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자야바르만 7세의 치세 대부분 동안 참파는 크메르 제국의 속국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저멀리 북쪽으로는 태국의 비엔티안, 남쪽으로는 크라 지협까지 크게 확장했다. 현대 태국 + 라오스 + 캄보디아의 영토를 모두 합쳐놓은 것만한 거대한 영토의 제국을 이룩했던 것이다. 학자들은 이때를 크메르 제국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하며 실제로도 국력, 문화적으로도 이때가 최고 정점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단순히 영토 뿐만 아니라 수많은 건설 프로젝트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국 곳곳에 102개가 넘는 병원, 도로를 따라 만든 127개의 휴게소, 저수지를 지어댔으며 덕분에 유통물산이 전국에 뚫리면서 크메르 제국의 인구 밀도는 급격히 높아졌다.
신비한 미소로 유명한 바이욘 사원이 이때 지어졌으며 아름다운 폐허로 유명한 타 프롬 사원, 폐허도시 앙코르 톰 등이 모두 자야바르만 7세 시절에 만들어졌다. 이 시절이 크메르 건축의 최고 전성기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시기의 대표작인 바이욘 사원은 나라의 최고 중심이 되는 사원으로 무려 200여개가 넘는 사면 인면상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크메르 건축의 정점을 찍었으며, 앙코르 톰의 경우 철저한 계획도시로서 이전 크메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화려함으로 유명하다. 특히 1186년 자야바르만 7세의 어머니를 위해 지어진 타 프롬 사원의 경우 국사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는데, 전성기 시절에는 이 사원에만 18명의 대제사장과 615명의 여성 무희, 8만 명이 넘는 유지관리인원이 배속되었을 정도였다고. 거대한 나무 줄기가 폐허를 신비롭게 칭칭 휘감은 장면으로 유명한 장소가 바로 여기기도 하다.
독실한 대승불교 신자여서 빈민 구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그의 치세 동안 102개의 전통 병원들이 세워졌다. 자야바르만 7세 이전까지의 크메르 제국은 힌두교가 중심이 되는 국가였지만, 자야바르만 7세 들어 불교가 왕실의 주도로 본격적으로 유입되며 이후의 크메르 제국은 명실상부한 불교 국가로 탈바꿈한다. 여러모로 크메르 제국의 근간을 바꾸어놓은 명군이었던 셈이다.
3. 기타
- 당대 기준으로 말년에 가까운 56세에 즉위했지만, 재위 기간이 무려 37년이다. 장수왕과 비슷한 나이인 93세까지 살았다. 현대 기준으로도 장수한 인물이다.
- 징기스칸 4에서도 시나리오 1의 앙코르 왕조 군주로 등장한다. 그냥 '자야바르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인도 문화권 군주 중에서는 능력치가 고른 만능형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