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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4:39:33

의리없는 전쟁

인의 없는 전쟁에서 넘어옴
의리없는 전쟁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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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키네마 준보 창간 90주년 기념으로 선정된 올타임 일본 영화 베스트 순위.
1위 동경이야기
<colbgcolor=#a0522d> 2위 7인의 사무라이
3위 부운
4위 막말태양전
5위 의리없는 전쟁
6위 24개의 눈동자
7위 라쇼몽
백만냥의 항아리
태양을 훔친 사나이
10위 가족게임
들개
태풍 클럽
출처
같이 보기: 올타임,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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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키네마 준보 8월 초순 특별호에 선정된 1970년대 일본 영화 베스트 순위.
1위 태양을 훔친 사나이
<colbgcolor=#a0522d> 2위 의리없는 전쟁
3위 신칸센 대폭파
4위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5위 하우스
6위 복수는 나의 것
7위 이누가미 일족
8위 모래 그릇
9위 청춘의 차질
10위 료마 암살
출처
같이 보기: 올타임,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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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 없는 전쟁 (1973)
仁義なき戦い
파일:jingi.jpg
감독 후카사쿠 킨지
각본 카사하라 카즈오[1]
원작 이이보시 코이치,미노 코조(원작 수기)
제작 슌도 코우지, 쿠사카베 고로
음악 쓰시마 토시아키
촬영 요시다 사다지
주연 스가와라 분타, 가네코 노부오, 마츠카타 히로키,
다나카 쿠니에, 우메미야 타츠오 등
배급 토에이
1. 개요2. 내용3. 등장인물4. 음악5. 시리즈 목록6. 관련 매체7. 일화
7.1. 야쿠자들과의 일화7.2. 영화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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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cdn.mydramalist.info/6114.jpg
3부 대리전쟁의 포스터
1973년 1월 토에이사의 제작으로 1편이 공개되어 이후 엄청난 히트를 기록, 시리즈 제작이 결정되었다. 영어로는 Yakuza paper 혹은 Battle without humanity and honor 로 번역되거나 아니면 일본어 독음 그대로 Jinginaki tatakai 라 한다. 감독은 한국에서는 배틀로얄로 유명한 후카사쿠 킨지. 의리 없는 전쟁 모든 편을 감독했다. 후카사쿠 킨지 감독이 만든 본편이 1~5편이 있으며 그 후 외전격으로 3편이 더 있다.[2] 원래 1편으로 끝낼 영화였으나 워낙 인기를 얻어 속편 제작도 빠르게 이루어졌다.

워낙 유명한 영화라 동명의 영화를 다른 감독들이 오마주 하거나 리메이크 한 작품도 많다. 원래 제목은 '인의 없는 전쟁'이지만 한국에서 번역하면서 인의보다는 좀 더 친숙한 의리로 바꾼 모양이다. 인의(진기)와 의리(기리)는 둘 다 야쿠자의 주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인의가 없는 싸움'이니 그간 5~60년대의 일방적인 조폭미화물이었던 야쿠자 협객물에서 벗어난 작품으로 실화를 바탕으로한 사실적인 야쿠자의 모습을 그려 임협영화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2. 내용

줄거리는 패전 이후에 시비붙어서 사람을 쏴죽인 히로노 쇼죠가 야쿠자 세계에 몸담으면서 여러 항쟁에 휘말리게 되고 치열한 다툼과 음모&암투&배신에 시달리다가 야쿠자 세계를 떠난다는 것이다. 오프닝에서 실제 야쿠자 항쟁에 대한 신문기사 스크랩이 자주 쓰인다. 배경은 히로시마현 쿠레시. 고영근사건으로 유명하다.

일본 야쿠자 영화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실록물 중에는 ' 총장도박' 시리즈와 쌍벽을 이루고, 임협물(시대극적인 야쿠자 영화)인 타카쿠라 켄의 영화 ' 쇼와잔협전' 시리즈와 쌍벽을 이루는 영화 시리즈이다. 현대 야쿠자는 물론, 만화나 영화에도 굉장히 영향을 많이 주었다.

개봉 당시 영화 개봉 속도가 세 달에 한 번 꼴로 초스피드였다. 전편에서 죽는 역을 맡았던 배우가 다음 편에서는 다른 역으로 출연하는 등 이상하기도 하지만 명작이라서 감히 까질 못한다. 당시 일본 영화계에서는 다작하면서 복수 출연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영화사들끼리의 담합 때문에 한 영화사의 스텝은 다른 영화사에 출연하지 못하던 시기였기 때문.

그 외에도 앞의 사건과 뒤의 일이 앞뒤가 안 맞는 등의 자잘한 오류가 있다. 저예산, 옛날 영화의 한계.

'의리 없는 전쟁'을 시작으로 토에이 야쿠자 영화에서는 실제 야쿠자 계에서 벌어진 사건을 소재로 하는 '실록' 노선이 시작된다.

히로시마 항쟁[3]이라는 야쿠자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로 미노 코조[4]란 야쿠자가 쓴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원작 수기에는 실명으로 게재되었으나 영화는 이름이 바뀌어졌다.
예: 야마무라 구미 = 야마모리 구미.
예: 야마구치구미 = 아카시 구미
예: 교세이카이 = 텐세이카이
예: 무라카미 구미 = 오오토모 구미
아바시리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미노 코조가 히로시마 대리전쟁을 다룬 잡지사의 기사를 보고 자신에 대해 잘못 다룬 점을 분노하여 7년간 700매에 걸쳐 쓴 수기가 원작으로 이를 이이보시 코이치가 입수하여 실록소설화하였고 이것이 엄청난 히트를 기록해 카사하라 카즈오가 각본화 하여 영화화가 결정되었다.

저예산 영화로, 각종 제작비 절감의 아이디어가 많이 쓰였다. 예를 들면 1인 다역을 비롯해서 사진이나 정지영상이나 화약을 잘 안 쓴다든지 말이다(어떤 장면은 사진과 내레이션만으로도 진행한다.). 그리고 자막을 많이 활용한다.

3. 등장인물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4. 음악


이곡은 자기야 - 백년손님의 오프닝에서 사용된다. 의리없는 전쟁 테마곡으로 초반의 깜짝 놀라게 하는 부분이 한국 예능 BGM으로 많이 사용되는 편. 일본에서는 여전히 야쿠자 관련 매체에서 자주 나오는 단골음악. 대표적으로 팝팀에픽에서도 패러디되어 나왔다. 즉 한국과 일본의 용도가 전혀 다르다는 것.


테마곡1, 테마곡2
작곡가는 쓰시마 토시아키. 원체 유명해진 곡들이라 듣기만 해도 일본에선 영상이 생각난다는 평이 많다.


킬빌에 나오는 배경음악 중 하나인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는 의리없는 전쟁의 2000년도 리메이크 판인 신 의리 없는 전쟁의 OST 중 한 곡이다. 작곡은 호테이 토모야스. 이 노래는 무릎팍 도사에서 자주 쓰였다. 액션! 빠~바~밤

리메이크판 주제가 제목은 JINGI. 원래 곡 이름은 新・仁義なき戦いのテーマ였으나 Electric Samurai에 수록되면서 제목을 바꿨다. 예고편 초반부에서 들을 수 있다., 초반 씬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와 같이 호테이 토모야스의 앨범 Electric Samurai에 수록되기도 했다.

마키하라가 죽을 때는 축제 배경음으로 1968년 발매되어 인기를 끌었던 '365걸음의 마치'가 나왔다. 노래 이 노래는 부른 에반게리온: 파에서 마키나미 마리 일러스트리어스가 부른 음악이기도 하다.

5. 시리즈 목록

6. 관련 매체

원래 유명한 영화지만 서브컬쳐계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도 유명하다. 원피스에서 나오는 해군 대장 사카즈키, 볼사리노의 모델이 바로 이 영화의 배우들인 스가와라 분타와 타나카 쿠니에다. 심지어 사카즈키는 캐릭터 자체가 야쿠자를 모티브로 삼았다.

크레용 신짱 원장선생님도 외모는 타나카 쿠니에를, 이름은 스가와라 분타를 패러디한 것이다.[14]

아이돌 마스터/애니메이션 26화에 나온 극장판 예고편은 바로 이 영화 패러디다. 제목부터가 '끝없고 의리 없는 전쟁(果てしなく仁義ない戰い)'

만화 헬싱의 작가 후기에 나오는 야마모리 요시오가 바로 이 의리 없는 전쟁의 야마모리 요시오다.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는 이 영화 오마주라고 한다. 감독 나가이 타츠유키가 전쟁을 잘 모르는데 모르는 걸 억지로 하는 건 안 될 것 같아서 건담과 야쿠자 영화를 접목시키기로 했으며 그때 특히 이 작품을 참조했다고.

하스스톤 비열한 거리의 가젯잔의 일본판 제목이 이 영화를 패러디한 의리없는 가젯잔(仁義なきガジェッツァン)이다

2019년 11월, 후쿠오카 하카타자 극장 20주년 기념으로 의리없는 전쟁 여자들의 사투편(仁義なき戦い〜彼女(おんな)たちの死闘篇〜)을 타이틀로 AKB48 그룹이 무대에 출연하기로 했다...(?!) 뭐지... 이 조합은??

이시카와 켄도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으며 겟타로보 만화판에도 이 작품의 오마주를 여럿 삽입했다.

애니메이션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의 1회 1화의 제목이 의리 없는 배설(仁義なき排泄)이다. 본작의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다.

애니메이션 아키바 메이드 전쟁 11화의 제목도 모에 없는 전쟁(萌えなき戦い)이다. 당연히 본작의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며 내용도 철저하게 오마주로 이루어졌다. 11화 외에도 전체적으로 이 작품 오마주가 있다.

나홍진 감독이 이 영화의 광팬이다. 일본 배우 오자와 히토시는 이 작품을 자신의 바이블로 꼽으며 해설하는 영상을 자신의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 #

7. 일화

7.1. 야쿠자들과의 일화

영화가 개봉될 당시 생존해있던 사람들이 많아서 히로시마 야쿠자를 비롯한 각지에서 항의가 많았다고 한다. 영화적 각색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실과 다르다" "난 저렇게 겁쟁이가 아니다" "내가 나오지 않는다" 라는 말들이 있었다고..역으로 3편에서 와타세 츠네히코가 연기한 쿠라모토 다케시의 모티브를 제공한 조직원의 어머니가 그걸 보고 "덕분에 아들도 면목이 섰다" 라고 감사해 하기도 했다.

작중 우유부단하고 무능하게 나오는 우치모토 역의 실제 인물인 우치코시 노부오는 훗날 히로시마 항쟁을 술회하며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미노 코조를 비판했다.[15] 또 우치코시 노부오는 사업적 감각이 있던 인물로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가급적이면 항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 택시업으로 돈을 벌고 초창기 자금사정이 어렵던 히로시마 카프의 생존에도 도움을 주고 있었다고 한다.

미노 코조는 두목을 헐뜯는다라는 비판을 의식했는지 2003년 인터뷰에서 원래 자기는 야마무라 타츠오와 사카즈키고토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즉 오야꼬 사카즈키를 애초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는 야마무라의 부하가 아니며 부하였다면 저런 수기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는 야마무라의 7인방으로 알려져 있지만 야마무라구미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야마무라가 미노를 "저건 이제 우리집 식구가 아니다"라고 하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만 전후 혼란기에는 사정상 사카즈키고토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꼭 사카즈키고토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부하가 아니었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한다. 미노 코조는 2010년 향년 83세로 사망했다.

작중 아카시 구미는 야마구치구미가 모델인데 야마구치구미 3대 두목 다오카 카즈오도 이 영화를 감상 했다고 한다.

교활하면서도 왠지 소심하고 주책맞으면서도 결국엔 최후의 승리자로 남는 야마모리 요시오 두목역의 가네코 노부오는 연기를 하면서도 설마 일본 야쿠자 두목 가운데 이런 두목이 있겠는가? 싶었지만 오히려 영화를 본 야마구치구미의 다오카 카즈오는 가네코의 야마모리 두목 연기를 칭찬했다. 텐세이카이의 모델이 된 교세이카이(공정회) 3대 두목 야마다 히사시(극 중 마츠무라 역)와 우연히 만난적이 있는데 야마다가 부하들에게 "너희들 모두 우리 두목님께 인사드려라!" 라고 했다고 한다.

악역으로 그려진 야마모리 요시오의 모델이 된 야마무라 타츠오 같은 경우 역시 악역으로 그려진 사모님이 촬영 현장으로 가서 배우들과 담소를 나눴다고 하니 야마무라 본인은 영화는 영화일 뿐 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야마무라 타츠오는 영화 개봉 후 1년 뒤 1974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한편 극중 하야카와 히데오로 나온 야마구치 히데히로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나온것에 분개, 지나치게 미노 코조의 시각으로 영화가 그려졌다며 자신을 주인공으로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히트하지 못하면서 조용히 잊혀졌다. # 서로 말이 엇갈리므로 색다른 시각에서 보는게 재밌긴 하다. 의리없는 전쟁에선 희대의 교활한 모략꾼으로 나오는데 자신이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에서는 의리의 화신으로 나온다.

7.2. 영화의 일화

이 영화에 영향을 받아 이후 일본의 야쿠자 영화와 만화등에서 히로시마 방언이 좋지 않은 이미지로 새겨지면서 지역민들의 원성을 샀다. 마치 서남 방언을 악역이나 개그 캐릭터(주로 덜 떨어진)가 자주 쓰게 되어 좋지 않은 이미지로 새겨지면서 전라남도에서 항의가 들어온 것과 비슷한 경우. 스가와라 분타는 히로시마 사투리를 익히기에 위해 친했던 장훈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제대로 사투리 고증을 한 작품이 아니다. 사투리 고증을 한 사람이 여러 명이었는데 한 사람이 히로시마 출신 할머니였다고 한다. 그래서 종종 할머니 말투가 섞였으며 히로시마 주민들이 보면 "야쿠자가 왜 할머니, 아줌마 말투로 싸우냐?"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와 감독의 연출력 덕에 히로시마 이외의 지역 사람들은 어색함을 느끼지 못 했으며 히로시마에서도 팬이 있는 작품이다.

2편의 에다 쇼죠와 3편, 4편, 5편의 에다 쇼이치는 동일인물이다. 원래 모티브를 제공한 야쿠자의 이름이 하라다 쇼죠 였는데 가족들의 항의가 들어와서 바꿨다고 한다.

2편에서 오오토모 카츠토시가 바닷물에 상대방 조직원을 집어던져서 물고문을 하는 장면은 실제로 과격한 씬으로 인해 연기자가 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절을 했다고 한다. 간신히 심장마사지를 해서 살려냈다고 한다.

3편에서 나오는 '한밤중의 사무실 습격'이라든가, 신참을 극장 앞에서 총질해서 죽일 때는 고감도 필름을 가지고 촬영했다. 실내에서는 조명을쓸수있지만, 실외에서는 조명 배치등등이 어렵기 때문에(한마디로 돈과 시간이 많이 드니까)고감도 촬영을 했다. 그래서인지 그 부분은 어째 노이즈가 많고, 색감도 이상하지만 영화 미학이 되어버렸다.

원래 4부 정상작전편에도 2부에서 오오모토 카츠토시 역으로 인기를 끌었던 치바 신이치가 나올 예정이었지만 다른 영화 때문에 출연을 못했고 5부에서는 치바가 그만 매독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평생의 후회로 남는다고 한다. 다만 시시도 조의 연기도 극찬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전화위복이랄까.

5편에서 마츠무라가 기찻길 건널목에서 습격 당하는 장면을 찍을때 그만 자동차의 타이어가 도랑에 걸려 버렸다. 당시 촬영현장에 같이 있던 아마가사키시의 젊은 야쿠자들이 저 멀리 기차가 오는 걸 보자 황급히 비상등을 흔들어서 기차를 멈춰서 간신히 촬영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5편 의리없는 전쟁 완결편에서 재등장한 오오토모 카츠토시를 연기한 시시도 조와 적대하는 이치오카 테루키치(=마츠카타 히로키)가 요정에서 대치하는 장면은 큰 화제를 주고 어마어마한 연기력에 감탄한 사람들이 많았다. "소똥도.."로 시작하는 명대사로도 알려진 장면이지만 그 장면은 시시도 조의 애드립이 많이 섞여있다고 한다. 연기중에 격앙된 시시도 조가 테이블의 접시와 잔을 그대로 걷어치워 그만 시시도의 왼팔정맥이 베였다. 피가 철철 나오는 상황이고 시시도는 술을 마셔서 피가 멈추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츠카타 옆에 있던 여배우 후지 히로코가 그것을보고 기겁해서 실신까지 갔다고 한다.[16] 그 애드립과 테이블을 와장창 하는 상황에서도 마츠카타는 눈하나 깜짝 안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넘겨 사카즈키고토를 하는 모습을 묘사해 그야말로 연기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보여준다.

워낙 대히트를 기록해서 당시 일반 시민들을 비롯해서 경찰 가운데서도 팬이 많았다고 한다. 한번은 스가와라 분타의 집에 밤늦게 웬 청년이 찾아와서 두목! 야마모리는 제가 죽이겠습니다! 하는 일도 있었다. 스가와라는 당황하지 않고 음 고마운데 ~ 일단 라면이나 먹으러 갈까? 라고 달랬다고 한다. 또 후카사쿠 감독이 교통단속에 걸린적이 있는데 순경이 그를 알아보고 "의리없는 전쟁인가, 그냥 가시오" 라고 통과시켜 줬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영화 촬영장에는 많은 야쿠자들이 나와서 배우들에게 리얼한 연기지도를 했다고 한다. 또 경찰도 당시에는 느슨해서 실제 총을 연기 소품으로 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아베 신조도 은퇴한다면 야쿠자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의리없는 전쟁과 대부를 섞어 만든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야쿠자 영화가 아니라 일본 영화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후대의 감독들과 영화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같은 반열에 든 작품들이 동경이야기, 7인의 사무라이니 말 다했다.

2009년 키네마 준보가 선정한 '일본 영화 올타임 베스트 순위'에서는 역대 5위에 선정됐다.[17] #

[1] 이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다. 또 다른 대표작으로 203고지, 대일본제국, 카츠마타 토모하루 삼국지가 있다. [2] 신 의리없는 전쟁이란 이름으로 나왔으며 본편과 스토리가 연결이 되진 않는다. 원 스토리를 가지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다. 감독 자체 리메이크 혹은 리빌드 수준. [3] 정치인 기우치 미노루의 아버지 기우치 야스미츠 전 경찰청 장관이 1965년 당시 히로시마현 경찰본부 수사2과장으로 이 사건을 수사중이었다. [4] 극중 히로노 쇼조. [5] 특히 거짓눈물을 보여 부하들에게 동정심을 사서 이를 이용한다. [6] 실제로는 교세이카이(공정회)로 실존조직이다. [7] 이때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이치오카 구미의 보스인 이치오카 테루키치와 술집에서 난데없는 즉석 사가즈키를 했는데 여기에는 이치오카를 끌어들이려는 하야카와가 중간에 다리를 놓았기에 가능했다. 만일 하야카와가 없었더라면 이치오카와 오오토모는 피비린내나는 격렬한 항쟁을 했을 것이다. [8] 와타리 테츠야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당대를 풍미한 인기배우이다. 오하라 레이코의 전 남편이기도 하다. 2017년 사망. 여담으로 니시코리 케이의 어머니가 와타리 형제와 재종형제간이다. [9] 탐정이야기에서 핫토리 형사, 야규일족의 음모 시리즈에서 카라스마루 소장으로 나온다. 주로 악역배우로 큰 명성을 얻었으며 1990년 사망. [10] 이누가미 일족 1976년작에서 타치바나 서장 역을 맡았다. [11] 신 의리없는 전쟁: 조장 마지막 날의 스핀오프 작품이며 쿠도 에이이치 감독이 맡았다. [12] 1974년판의 리메이크 작품으로 사카모토 준지 감독이 맡았다. [13] 2000년 작품의 번외편 후속작. 감독이 하시모토 잇페이로 교체되었다. [14] 다만 원장선생의 성씨는 이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타카쿠라 켄이다. [15] "히로시마 항쟁은 6년이 소요되었지만 항쟁의 피크는 쇼와 38년에서 39년까지 1년이고 나는 그 사이 전비로 1억엔 가까이를 썼다고 생각한다. 미노는 '인의 없는 전쟁'이라는 책을 썼지만 항쟁이 가장 격렬하던 시기에는 형무소에 갔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를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불만이 있던 두목이라도 그렇게 헐뜯으면 안된다. '울었다'던가 '벽장으로 도망쳤다'라던가, 그런것은 정말 야마무라 입장에서는 발로 치고 때려 밟는 꼴이다. 그 책으로 인해 히로시마의 야쿠자, 나아가서는 전국의 야쿠자들이 저런것인가 생각하게 할테니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전국의 야쿠자들을 저렇게 더럽히다니" [16] 실제로 영화를 보면 깜놀해서 안절부절 못하는게 보인다. 연기가 아니라 실제상황이었던 것 [17] 1위는 동경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