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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24 02:21:59

이우정(1880)

李愚正
1880년 8월 28일 ~ 1956년 11월 3일

1. 개요2. 생애3. 친일 행적4. 가족

1. 개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법조인. 본관은 벽진(碧珍)[1], 자는 몽숙(夢叔), 호는 가석(可石).

2. 생애

1880년 8월 28일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월곡리(現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홈실마을)에서 아버지 이덕후와 어머니 진성 이씨(1852 ~ 1906. 1. 20)[2]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홍와 이두훈(弘窩 李斗勳)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903년 10월 2일 원산우체사 주사(元山郵遞司主事)에 임용되었다. 1906년 법관양성소에 입학해 1908년 11월 우등으로 졸업하고 재판소 서기에 임용되었다. 1909년 1월 11일에는 대구공소원 서기에 보임되었고, 8월 23일 대구지방재판소 안동구재판소 판사에 임명되었다. 1910년 8월에는 대구지방재판소 영천구재판소 판사에 보임되었다.

경술국치 이후로부터 1919년까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판사, 1919년 7월부터 1922년까지 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 판사로 재직하다가 1923년 1월 17일 퇴직하고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변호사로 등록해 개인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1956년 11월 3일 사망했다.

후술할 친일 행적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사법 분야에 등재되었다.

3. 친일 행적

4. 가족


[1] 감무공파(監務公派)-완정선생파(浣亭先生派) 32세 우(愚) 항렬. [2]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이만협(李晩恊)의 딸이다. [3] 1919년 3월 21일 판결 [4] 1919년 6월 26일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