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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대 국왕
태종 이방원 太宗 李芳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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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 |
<colbgcolor=#A60C0C,#360505><colcolor=white> 묘호 | <colbgcolor=#ffffff,#111111> 태종 (太宗) |
작호 | 정안군 (靖安君) → 정안공 (靖安公) |
신분 |
전리정랑 (1회 ~ 3회) → 우부대언 (3회 ~ 10회) → 정안군 (10회 ~ 19회) → 정안공, 판상서사사 (19회 ~ 20회) → 조선국 왕세자 (20회 ~ 21회) → 조선국 국왕 (1회,[1] 21회 ~ 31회) → 조선국 상왕 (31회 ~ 32회) |
가족 |
원경왕후 (배우자) 양녕대군 (장남) 효령대군 (차남) 세종 (삼남) 소헌왕후 (며느리) 태조 (아버지) 신의왕후 (어머니) 신덕왕후 (계모) 정종 (둘째 형) 민제 (장인) |
등장회차 | 1회 ~ 32회 |
배우 | |
주상욱[2][3] |
[clearfix]
1. 개요
|
조선의 제3대 왕으로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 조선의 개국공신, 정사공신. 최종 작호는 정안공(靖安公). 묘호는 태종(太宗).
2. 배우
방영 전 이방원 역으로 주상욱이 결정되었을 때 기대보다는 안 어울린다는 평이 많았다. 특히 너무 현대적으로 생겼다는 평이 많았다.[4] 그러나 프롤로그에서부터 전임자인 유동근, 안재모, 유아인, 장혁에 결코 밀리지 않는 연기력으로 모두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반면 여전히 사극에 익숙하지 않고[5], 미묘한 감정 연기에 능하지 못하다는 시각도 있었다. 유동근, 안재모같이 정통 사극에서 일찌감치 만렙을 찍은 배우들과 비교하기 위해선 좀 더 지나봐야 한다는 의견이 여전히 존재했다.애초에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방향이 기존 여말선초 대하드라마와는 많이 달라서 연기방식도 같을 수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외모 면에서 선이 굵은 인물이 맡았던 태종과는 달리 사료에서 묘사된 태종과 가장 외모면에서 비슷한 인물이라는 역사학자들의 평이 있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주상욱이 출연했던 방영분에서 출연진들의 해당 언급이 있었다.
다른 연기보다도 눈빛 연기가 매우 좋은 편. 극 중 이방원이 느끼는 감정을 눈빛, 표정으로 잘 표현하여 호평을 받고 있다. 점차 흑화하는 과정에 어울리는 연기라는 평가. #
최종적으로 드라마의 타이틀롤로 32부작이라는 짧은 분량에서 이상주의자였던 젊은 문관 이방원부터 용상의 포로가 된 말년 태종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커버하면서 호평을 이끌어내 배우의 재발견은 물론, 정통 사극에서 앞으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7]
상단의 사진이 증명하다시피, 극 후반으로 갈수록 얼굴에서 최수종의 상이 보인다는 평가가 따르고 있다. 본 드라마의 출연진 중 최수종과 여러 사극을 찍던 배우들도 인정한 부분이다.[8]
여담이라면 형들인 진안대군과 익안대군을 맡은 엄효섭과 홍경인은 선덕여왕에서 각각 염종과 석품으로 만났었는데 그때는 서로 대적하는 입장이었는데[9] 이제는 형제로 만나게 된 것.[10]
3. 극중 행적
자세한 내용은 이방원(태종 이방원)/극중 행적 문서 참고하십시오.4. 인간 관계
자세한 내용은 이방원(태종 이방원)/인간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5. 인물 묘사
〈태종 이방원〉의 주인공인 이방원만의 특징은 대다수의 사극에서 나온 것처럼, 위화도 회군 시절 이전부터 미래의 철혈군주로 그려내는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있다. 이 점은 1화의 오프닝에서부터 확실히 보이는데, 태종 18년 세종에게 양위를 하기 직전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미 모든 것을 다 해내고 왕위에서 물러나기 직전임에도 자신이 예전에 했던 일들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것이 태종이다. 즉 이 드라마의 태종은 태생부터 철혈의 마음을 가져 모든 것을 다 좌우하고자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과거에 급제한 문관이였다는 건 많은 드라마에서 고증했으나, 관리 생활을 하는 이방원을 이 드라마만큼 상세히 묘사한 드라마는 없다.[11] 뒷날 강력한 군왕이 되건 어쨌건 20대 초반에는 아버지 뒷배를 달고도, 혹은 오히려 그 탓에 낙하산으로 취급되어 이리저리 치이는 관원으로 그려지는 것.[12]
이방원이 이성계 세력 내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건 아무리 빨리 잡아도 정몽주 척살 이후고, 그나마도 정도전, 조준, 남은 같은 진짜 핵심 공신들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정몽주 척살 이전에는 이성계의 아들 A 정도의 비중으로 기껏해야 빈객 접대나 거드는 젊은이였고[13], 정몽주 척살 때에도 형들과 함께 일을 꾸미면서도 긴장돼서 발을 동동 굴렀던 사람이 이방원이다.[14]
태종의 아들이자 후계인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계승을 정당화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 용비어천가》 등으로 의도적으로 태종의 역할을 마구 치켜세우는 가공 작업을 했고, 이 왜곡된 인식을 받아들인 사극들은 하나같이 위화도 회군 시점부터 이미 완성된 철혈군주 이방원으로 캐릭터를 잡고 여기저기 들이댄다.[15]
작중의 이방원의 특징 중 하나는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자신이 앞서 한 말을 어기고 만다는 것. 아버지를 돕고 싶다는 소망을 지녔었으나 훗날 아버지에게 비극을 안겨주고, 신덕왕후에게 방석을 죽일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훗날 방석을 죽이게 되며, 정몽주를 죽이기 싫다며 울부짖기까지 하지만 결국 스스로 앞장 서서 정몽주를 죽이고, 민씨 일가에게 은의를 반드시 갚겠다 하지만 정작 보답은 멸문지화. 작중에서 이방우가 고려의 충신으로서의 행동하다가, 조선 건국 후 세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완전히 대치되는 두 기치 사이에서 고통스러워 하며 광기에 휩쓸릴 뻔했다며 토로하는데, 이방원은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1회에서 태종이 아들 앞에서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 일을 언급하며 광기와 고통을 내비친 이유를 추론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본인도 이 점을 인지하기 때문에 어기게 되는 상황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발악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는 비극이 연속적으로 벌어진다.
재미있는 점은 자신이 앞서 한 말을 어기고 마는 경향이 부정적인 행적에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스스로 자신을 용상만 바라보는 자, 미치광이, 폭군이 될 것이라며 자조하지만 알다시피 그는 조선 왕조사에 길이 남는 명군 중 한명으로 추앙받는다.[16] 2차 왕자의 난 이후 아버지, 형들을 다 죽이고 왕위에 오르겠다며 폭주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는 방번, 방석 형제를 죽인 이래 권력을 놓을 때까지 아버지와 형제 중 그 누구도 해하지 않았다.[17] 자신이 형의 양자로 들어가면서까지 적장자 승계의 원칙을 고수하고 싶다고 했지만, 결국 적장자 승계의 원칙을 포기하고 자신을 닮아 능력과 야심이 충만한 셋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해주었다.
5.1. 역대 '이방원'들과의 비교
나는 그리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그리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24화 중, 아들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평하는 모습.[18]
24화 중, 아들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평하는 모습.[18]
본 드라마처럼 똑같은 21세로 첫 등장하는 정통사극 〈 용의 눈물〉의 이방원은 김저 사건을 조작한 배후고, 〈 정도전〉의 이방원은 수시로 역성혁명을 입에 올리며 정도전이 뭘 하든 옆에서 보좌하고, 퓨전사극 〈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은 어린 시절부터 온갖 거물들과 엮이게 되고, 청년이 되었을 때는 상당한 지혜로 조선 건국의 주역들과 함께 활동한다. 〈정도전〉과 〈육룡이 나르샤〉는 아예 본작보다 어린 10대 시절부터 등장하는데도 말이다.
같은 방송사의 〈용의 눈물〉, 〈정도전〉, 〈태종 이방원〉에서 이방원이 작중 초반 시점에서 이성계 일파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차이가 두드러진다. 〈용의 눈물〉에서는 무려 첫 등장 장면이 부친 이성계의 대업 파트너인 정도전과 마주앉아 장기를 두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으며[19], 〈정도전〉에서는 처음부터 정도전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를 초빙하려고 노력했으며 그가 이성계 일파로 들어온 이후에는 그의 곁에서 직접 많은 것을 배워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에서는 위화도 회군 이후 김저 사건 당시 부친을 몸으로 직접 보호한 이후에야 그에게 인정받아 말석이지만 대업을 논하는 자리에 나설 수 있었다.
물론 기존의 이방원 캐릭터들이 성장하는 모습이 없는 건 아니다. 성장을 한다만, 미래의 철혈군주를 미리 상정하고 만들어서 그 티를 팍팍 낸다.[20]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 문제는 물론 아니고. 각본이 처음부터 강력한 군왕의 자질을 드러내던 사람이 용인술, 정치, 술수 같은 걸 습득하는 식으로 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같은 경우에는 분명히 어린 시절부터 어른처럼 상당히 똑똑한 모습을 보여주긴 하나 아직 어리기에 미숙한 면 또한 있음을 보여주었고, 어린 시절 처음 본 정도전의 모습에 매료되어 현재의 고려에 불만을 가지고 개혁과 정의를 바라는 열혈청년이 되어 정도전, 남은 등 조선 건국의 주역들과 같이 행동하였으나, 정도전이 원하는 새로운 국가의 정치 체제를 알게 되거나, 선죽교 사건 직후 갈등하게 된 시점을 전후로는 내면의 야심을 깨닫고 이를 실현하는 인물로 서서히 성장하여 결국 권력을 얻지만, 대신 주변에 있던 이들을 하나둘 잃어가고 고독한 인물이 되는, 〈태종 이방원〉의 이방원과 거의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한다. 물론 그런 미숙함조차 결국 강력한 군왕의 자질을 각성하는 계기에 불과하고, 고려멸망의 주역들과 동등한 선상에서 활동하는 등 실제역사에서 정몽주 참살전까지 조역에 가까웠던 이방원과는 확연히 다르다.
반면 〈태종 이방원〉의 젊은 이방원은 대의나 백성은 그냥 책 읽고 읊는 수준이며, 역성혁명이나 왕위에 대한 거창한 야심이나 전망도 없다. 넷째 형이 자신에게 공연한 트집을 잡으며 화를 내도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우왕이 자신들에게 기습을 가하자 어쩔 줄 몰라서 형들에게 찾아가서 물어본다. 그래서인지 사극에 묘사된 역대 이방원 중에서 우는 장면이 가장 많은[21] 이방원이기도 하다. 이전 사극들의 이방원이 청년기부터 죽을 때까지 냉철한 모습을 주로 보여주거나 벼락같이 화내는 장면이 많이 두드러졌지 우는 장면이 크게 부각됐던 적은 없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22] 이 점에서는 기존 사극의 이방원 캐릭터들보다는 오히려 제작진이 참조했다고 밝힌 영화 〈 대부〉의 주인공 마이클 콜레오네의 캐릭터와 더 닮은 점이 많다.
위의 인용한 대사도 기존 사극에서 보인 이방원 캐릭터와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용의 눈물에서 이미 완성되어 나아가는 이방원과 확고한 자신의 신념 하에 사건을 헤쳐나가는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에서 보인 이방원의 모습과는 달리 어떻게든 눈 앞에 닥친 과제에 대해 해결하기 위해 고뇌하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김저 사건 이후 창왕 폐위 건, 정몽주와의 정쟁, 조선 건국 직후의 신덕왕후와 세자 방석을 비롯한 정도전 일파와의 갈등, 1차 왕자의 난, 2차 왕자의 난, 그리고 즉위 후에는 조사의의 난과 아버지와의 오래된 앙금, 마지막으로는 외척과 후계자에 대한 문제 등 이방원의 눈 앞에는 수 많은 문제들이 쌓여 있었으며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였고 해결을 하면 문제들이 다시금 드러나면서 이방원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앞선 작품들의 이방원은 이런 면에서 본작의 이방원과는 달리 이 정도로 큰 고뇌를 하지는 않았다.[23] 기존의 이방원들은 이미 완성되거나, 확고하게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철학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나 본작의 이방원은 그런 면이 없는 자신이 말한대로 그리 되고 싶어하는 사람의 몸부림과 심적 고통을 보여준 것이다.
5.2. 능력
형들과 달리 문관 출신이었다는 점을 반영해서, 무력은 역대 이방원 중 최약체급으로 묘사되었다. 태종을 다룬 예전 드라마 중 〈 용의 눈물〉의 이방원은 직접 싸우는 장면은 불시에 습격을 당해 피치 못해 싸우게 된 두 번 뿐이지만 그때마다 잘 싸웠고, 1차 왕자의 난부터 조사의의 난까지 자주 갑옷을 입고 친정하는 모습이 묘사되는 데다가 배우인 유동근의 포스와 뒷날 고려 최고무장 이성계 역도 아무 위화감 없이 소화해내는 떡대 덕분에 역대 이방원 중에서도 가장 강해 보이는 인상이다. 〈 정도전〉의 이방원은 등장부터 자주 칼이나 활을 들고 나오고 상당히 잘 싸우고,[24] 〈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 또한 직접적인 검술은 묘사되진 않지만 이성계 못지않게 활을 잘 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방원이 문관 출신이나 집안은 본래 무관 출신이며 재위 시절 온갖 핑계를 대며 사냥을 가는 일도 잦았던 만큼 말타기와 활쏘기는 제법 했을 것이다.[25] 이 두 가지는 공자가 강조한 육예[26]이에 속해 있어 유학자들도 많이 배웠기 때문. 물론 교양이나 취미로 배우는 말타기나 활쏘기는 실제 전투에서의 기예에 비할 바가 아니기에, 수많은 실전을 겪어온 형들에 비해 무예 소양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무력 너프의 시작은 1회 위화도 회군 당시부터인데, 궁에서 달아날 때 바로 앞에 묶여 있던 남의 말들은 제대로 다룰 수 없어서 멀리 묶여 있던 자기 말[27]을 타고 달아나려다 달려온 한 병사와 격투를 벌였고, 그 병사의 가슴에 주먹을 날리지만 병사가 입고 있던 갑옷에 손이 깨지고 이후 일방적으로 내동댕이 쳐진다. 그래도 머리를 써서 말발굽으로 그 병사의 얼굴을 후려쳐서 겨우 달아난다. 이후 조정에서 보낸 군사들에 앞서 포천으로 이동해 이성계의 식솔들을 데리고 피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면을 보면 무예 실력은 떨어질지라도 고려 최강 무인 집안 출신답게 깡이나 기본적인 운동 신경은 뛰어난 편이다. 이 때 제일 어린 이방석은 자신이 업고 갈 만큼 챙겨주는데 훗날 이들의 결말을 생각하면 씁쓸한 부분. 잡으러 온 장수[28]와 싸울 때도 일방적으로 밀렸다.
3회에서는 이성계를 습격한 김저, 정득후를 막으려고 했는데 50이 넘은 아버지 이성계는 맨몸으로 비수를 든 자객을 가볍게 집어던졌지만 젊은 이방원은 어깨를 찔려 쓰러진다.[29]
4회에서는 맏형 이방우[30]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방우가 차마 동생을 죽이지 못하여 살아남긴 했지만.
6회에서는 어머니 한씨의 시묘살이를 하는데, 장작도 제대로 못패서 쩔쩔매기도 한다. #[31]
시간이 흘러 1차 왕자의 난 당시에는 정도전을 직접 죽이긴 했지만, 20회에서 형 방간이 일으킨 난을 진압한 뒤 광기에 휩싸여 정종 이방과를 찾아가 자신은 두 분 전하를 죽이고 미치광이 왕이 될 거라며 칼을 휘둘렀다가, 곤룡포 차림에 맨손인 이방과에게 제압당한다.
24회에서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러 나섰다가 주력이 나간 사이 이성계가 보낸 별동대에게 기습당하는데 2회에 군관 하나 어쩌지 못하고 몰리던 때와 다르게 소수 병력들을 이끌고 직접 몇 명 베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잘 싸우지는 못하고, 점차 밀려서 전사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때맞춰 지원군이 도착한 덕에 살아난다.
이렇게 무력은 현저하게 떨어진 반면 언변과 빠른 판단력이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위화도 회군 당시 가족들을 피신시키다가 최영의 군사들에게 추격당했을 때, 군관에게 '우릴 개경으로 압송한다는데 개경에 우리 아버님이 와있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최영의 군사로 막을 수 있을 것 같냐?'며 군사들을 찔끔하게 만드는 언변이 강조된다. 이방원의 언변이 어찌나 설득력이 있었는지 자기들을 지휘하던 군관이 죽었다지만, 여전히 수적으로 우세했는데도 남은 군사들은 이성계의 가족들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그냥 도망친다. 그리고 정도전이 없는 상황에서 이성계가 낙마하고 당여들이 모조리 잡혀 들어가자 전주 이씨 가문 구성원들은 우왕좌왕할 때, 이방원은 바로 '아버지를 개경으로 모셔서 건재함을 과시해야 모두가 살 수 있다'는 해결책을 낸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혹은 일을 벌일 때에는 반드시 합당한 명분을 챙겨 행동한다.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는 '정도전 등이 서자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뒤 세자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적자 소생의 왕자들을 살해하려 했기에 거병하여 정도전 등을 처단했다'라는 명분을 통해 '정도전을 척살하고 이방석을 폐세자 시킨다'라는 목표를 얻어냈고, 조사의의 난을 진압한 직후엔 '현비 강씨의 인척인 조사의가 (태상왕을 사칭하여) 난을 일으켰다'고 규정하여 조사의와 지휘관 급 주동자들만 처형[32]하고 실질적 배후인 이성계는(차마 아버지라 죽일 수 없었기에) 살렸다.[33]
5.3. 행위의 동기
이방원을 다룬 기존의 사극들에서 이방원이 정도전과 갈라진 뒤 그와 상반된 정치관을 보이며 대립하는 묘사를 보여주는 것과 달리, 정치적 이상이나 대의를 주창하는 모습은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그가 등극 전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오직 가문으로, 가까이 있는 소중한 가족과 아버지를 지키고자 움직이는 것이 최우선이다. 대의, 사상, 개인의 야심이 아닌 가문의 안위를 위해 아버지의 대업에 동참하고 싶어하는 이방원 캐릭터는 매우 참신한 컨셉이다.극초반 이방원은 자신의 집안과 식구들을 위협하는 고려의 정국 속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 격동의 한가운데에 들어가게 되는 미숙한 젊은이다. 2회에서 이성계와 둘이서 대화할 때 잘 드러나는데 어린 나이에 첫발을 디딘 개경에서 눈에 띈건 역적으로 처형당한 남자들과 노비가 되어 울부짖는 아녀자들의 모습이었다. 어지러운 고려 말 정계에선 앗하는 순간 고꾸라져 집안이 풍비박산날수 있었기에 어려서 본 끔찍한 광경이 어른이 되어서도 지워지지 못하고 트라우마로 남는다. 이 때문에 가족의 안위에 극히 민감한 모습을 보이며 3회에서 김저 사건으로 이성계가 습격받자 왕씨와 이씨는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충의 논리에 모순됨을 알면서도 창왕 폐위를 적극 주장하며 아버지의 대업을 돕는다.
하륜이 '화가위국(化家爲國)'이라 평한 것처럼 조선 건국 직후 전주 이씨 가문은 이성계의 독선과 신덕왕후의 이간질로 인해 분열되는데, 이 때 이방원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인 민씨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선 자신이 용상을 얻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신덕왕후 사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아버지를 제압하고 이복 동생의 피를 보고 만다. 왕위를 가지지 못하면 자신과 아들들, 손자들, 그 아래 후예들은 영원히 역적으로 남을테니 그에게는 왕좌가 절실하다.[34] 이를 보듯 기존의 사극의 이방원들이 왕자 시절부터 왕권 강화니 사직 보호니 정치적 사상을 내비치는 것과 달리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에서 비롯된 복수, 자신과 가족에 대한 안위, 용상에 대한 욕심이라는 지극히 사적이고 인간적인 이유[35]만을 내비쳐 독특함을 드러낸다. 말 그대로 기존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에서 묘사된 것 같이 처음부터 뭔가 뚜렷한 자신만의 가치관을 세운 채 주도적으로 일을 계획하고 움직인 것이 아닌 주변 환경이 급격히 바뀌어가면서 철저하게 그를 비롯한 가족들을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맞춰서 변해가고 움직이는 느낌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36]
이방원이 진지하게 정치적 사상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기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세자 시절부터이다. 그나마도 왕권 강화의 상징적 치적 중 하나인 사병혁파를 이방원과 척을 진 것으로 유명한 외척 민씨와 상의하다가 반대에 부딪히는 모습으로 기존에 그려졌던 철혈군주 이방원의 이미지와 어긋난 무른 면모를 보인다. 한 마디로 평하자면 초보 철혈군주.[37][38]
그러나 왕좌에 등극하자마자, 즉위식 때부터 자신과 처자들의 생존을 위해 권좌를 얻어야 했고, 권좌를 얻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고 가문을 산산조각 냈으니, 그 권좌 위에서 나라를 바로 세워 속죄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군왕은 군왕답고 신하는 신하다움으로서 백성이 편안한 나라" 조선을 만들겠다는 선언과 함께 강한 왕권이라는 대의를 천명하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들을(원경왕후[39], 민제[40], 민무구와 민무질[41], 이성계[42], 이거이[43]) 차근차근 정리해나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세종의 원망을 받아가면서도 심온마저 숙청해버리며 왕권 강화에 주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5.4. 내면 묘사
자신 딴에는 아버지를 위해 직접 손을 더럽혔으나 이로 인해 자신이 모든 것을 힘으로 빼앗아 쟁취하기 전까지는 용서도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사실상 내쳐지고, 신덕왕후 강씨의 배신, 어린 아들의 죽음으로 절망한 뒤에 비로소 냉소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때 아내 민씨의 충고와 더불어 명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로, 자신의 분노를 숨길 줄 알게되고 성장한 모습을 보인다.무인정사를 기점으로 흑화한 이후로는 위의 형인 방과나 방간을 겁박하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는 아버지 앞에서도 "전하께서 뿌린 씨앗이다" 라 냉정하게 받아치는 등,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행보를 보여준다. 특히 아버지 이성계를 대하는 태도는 기존 사극들과 비교할 때 매우 차이난다. 기존 사극에선 부자 관계가 이성계가 격노해도 덤덤하게 아버지를 위해 그랬다고 하거나 또는 표현은 거칠어도 그간 쌓였던 애증이 폭발하는 모습이었다면, 본작에선 표정 하나 안바뀌고 이성계 면전에 대고 독설을 퍼붓는 것도 모자라 병사들을 시켜 그를 제압시킬만큼 막 나간다.[44] 그래도 내심 갈등은 했는지 집에 돌아오자 맏이인 양녕을 껴안고 오열하는 외강내유의 모습이 드러난다.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형제간의 정과 권좌를 향한 욕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사이, (동복) 형제들에겐 원망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낙인이 찍힌 채 점점 고립되어가며[45] 정신적으로 그로기 상태에까지 내몰리는 모습이 묘사된다. 애당초 그가 무인정사를 결심하게 된 것은 자신들과 형제들을 모살하려고 한 정도전 일파의 움직임에 대한 저항, 그러니까 살고 싶어서였단 점을 감안하면 씁쓸한 모습.
그리하여 본인이 고대하던 권좌의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평생의 반려자라 믿었던 아내는 물론 아내의 가문과도 척을 지게 되었고 좋은 왕이 되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추잡한 짓을 일삼는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이 들던 찰나 도망치듯 도성을 떠나간 아버지는 결국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며 반란의 배후가 된다. 그리고 아버지를 다시 한 번 창칼로 굴복시킨 뒤, 자신의 야심을 알고도 내치지 못하고 그저 기다렸던 게 아버지의 속마음이었음을 헤아리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결국 자신이 해야할 일은 유능한 인재를 다음 세대의 국왕으로 세우고 그가 원만하게 국가를 운영해가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집착에 가까운 믿음 아래 위험요소가 되겠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가차없이 제거하는 냉혹한 면모를 보인다.
특히 처가를 숙청할 때에는 정말 피도 눈물도 다 말라버린 듯한 모습을 보인다. 시종일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일을 다 벌이고 난 뒤에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묘사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민무구와 민무질에 대한 사사를 명할 때는 원경왕후의 원망을 고스란히 감내하면서 괴로워하는 정도가 전부일 뿐, 민무휼과 민무회마저 숙청할 때는 자신에게 애걸복걸하는 민씨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이 나라의 국왕일 뿐'이라고 말한다.[46] 심지어 양녕을 세자에서 끌어내릴 때도 자식을 쳐내야하는 아버지로써의 괴로움을 그려내기보다는, 양녕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법한 여지를 말소시키며 충녕을 확실하게 밀어주는 잔인하고도 노련한 정객으로써의 면을 부각시켰다.[47]
하지만 충녕을 세자에 올리고 그에게 보위를 넘겨주는 것을 기점으로 그간 이방원 본인이 품어왔으나 내색하지 못했던 극심한 죄책감과 자조가 폭발했고, 고독함과 괴로움을 오롯이 홀로 감내하며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데 온 힘을 쏟았던 철혈의 군주는 그렇게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48]
그간 쌓아올린 수많은 업보들이 태종을 후벼파기 시작했으며, 원경왕후는 결국 원하시는대로 홀로 서는 군왕이 되도록 해드리겠다며 사가로 떠났고, 결국 태종은 그녀에게 뒤늦게 용서를 구하지만 이 용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한채 원경왕후가 떠나간다.
세종의 즉위와 함께 태종이 벌인 심씨 가문에 대한 숙청에 대해서도 본인이 다음 세대 국왕을 위해 짊어지는 마지막 업보와 같은 느낌으로 묘사한 용의 눈물과는 달리, 작중에선 상왕으로 물러나며 점점 실권을 잃어가는 태종이 권력에 대한 집착과 편집증적인 의심으로 심온을 노린 것처럼 해석할 수도 있는 묘사를 내놓았다.
물론 태종은 끝까지 '다 주상을 위해 하는 일이다' 라던지 '모든 악업은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이다' 라는 말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49]. 태종 본인이 여말선초의 난세를 거치면서 손에 피를 묻히길 주저한다면 사소한 일로도 트집이 잡혀 몰락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배워왔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로 인해 세종은 "반드시 아버지의 방법이 틀렸음을 증명하겠다" 고 선언하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각성한 세종이 점차 불세출의 명군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에 만족스러워하며 자신이 추진하던 정책들을 전수해주고 아낌없이 지지를 표하는 아버지로써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한편으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실권을 내려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모습으로 마지막 생애엔 세종에게 직접 "용상의 포로가 되셨다."라는 일갈까지 듣게 될 정도로 정치적 편집증에 매몰된 군주의 일면도 드러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자신의 손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어쩔 수 없이 들어준 세종에게 고맙다라는 말을 남기며 만족스럽게 죽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결국 그 역시 군왕이란 자리로 인해 고독하게 살아온 탓에 가족의 정을 그리워하는 인간임을 보여주게 된다.
5.5. 家를 넘어 國
家를 넘어 國으로 國家를 다시 생각한다
드라마 캐치프레이즈
드라마 캐치프레이즈
"내가 원하는 건 가문(家)을 넘어서는 국가(國)요. 오롯이 홀로 서는 국왕이오."
29화, 민무휼과 민무회를 숙청한 뒤 원경왕후 민씨에게
상술했듯 권좌에 오르기 전 이방원의 목표는 오직 가문, 그 다음엔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국왕에 등극한 이방원은 '가족, 가문(家)'이 아닌 '국가(國)'를 최우선시하는 인물로 변모한다. 그리고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신념 하에, 붕망(朋亡)을 각오하며, 필요하다면 가족까지도 저버리는 비정한 행보를 보인다. 국왕을 능멸하는 발언을 했던 이거이를 숙청하면서 이거이의 아들들에게 시집 간 자신의 동복 여동생과 딸이 숙청에 휘말리는 것도 감수했고, 세자를 홀로 설 수 있는 국왕으로 만들기 위해 이에 방해가 될 혹은 될수도 있을 민씨의 아우들을 모두 숙청했으며, 나라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국왕을 후계자로 가려내야 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이 왕자 시절 겪었던 골육상쟁이 재현될 수도 있을 가능성을 감수하고 양녕과 충녕이 서로 경쟁하게 만들었다.29화, 민무휼과 민무회를 숙청한 뒤 원경왕후 민씨에게
본 드라마는 분량 문제도 있거니와 가족사에 집중하다보니 당대 인물들의 업적, 정책들이 많이 생략되는데, 그 와중에 언급되고 묘사되는 것들은 모두 본 드라마의 주제 의식과 관련이 있다.
- 사병 혁파: 가문의 군대였던 사병을 국가의 군대로 귀속
- 정몽주 복권: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국가(사직)을 향한 충성심
- 편전에 사관을 들이는 문제: 국왕은 공적 존재인가, 사적 존재인가?
그리고 이방원에게 신임을 얻은 인물들은 모두 이러한 이방원의 행보를 이해하고 동조하며 발 맞추어 가는 인물들이다. 하륜, 조영무, 그리고 아들인 충녕대군이 그 예인데, 하륜은 여흥 민씨 가문의 위세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방원의 심리를 가장 먼저 간파하여 그에게 공감을 표하고 민씨 가문을 압박하는 일에 속은 불편하더라도 기꺼이 앞장 섰으며, 조영무는 사병 혁파에 잠시 반발하여 귀양 갔다가 돌아온 뒤로는, 조사의의 난 당시에 동북면 백성들에게 가주(家主)가 아닌 국왕(國王)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천명하며 이방원의 사상이 완전히 내면화되었으며, 부패 혐의로 탄핵됐던 하륜을 두호하는 이숙번을 비판하는 요지도 '국왕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짓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충녕대군은 家보다 國을 우선시하는 국왕으로서의 이방원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國과 家를 조화시킬 생각까지도 헤아리는 모습을 보였기에, 이방원이 적장자 승계 원칙을 깨고 충녕을 왕으로 세우는 선택을 하게 될 정도였다.
그러나 國을 위해 家를 짓누른 그도 끝내 家를 벗어나지 못해, 양위하고 나서는 더이상 國이 아니게 된 이후에 넘어섰던 家로 되돌아 가려 시도하는 면모를 보인다. 어찌보면 캐치프라이즈 '家를 넘어 國으로'의 뒤에 '다시 家로'가 숨겨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사실 '다시 家로'라는 문구가 쓰여지지 않은 이유를 작중 이방원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는데, 國에서 빠져나온 이방원이 家로 돌아 가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한을 산 家는 그를 거부하고, 家로 돌아가는데 실패한 이방원은 자기가 주장했던 패도조차 어기면서 더이상 자기 자리가 없는 國에 들러붙으려 한다. 마지막에 겨우 家에게 용서받고 나서야 그는 책임에서 벗어나 평온과 영면을 얻는다. 이는 國과 家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國이 家를 넘어서야 하는 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렇다해도 國에게는 쉴 수 있는 家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가문(家)을 넘어서는 국가(國)요. 오롯이 홀로 서는 국왕이오." 다음 대사가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요."인데, 즉, 家는 피와 눈물이 있는 존재이고 國은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국왕이 인간인 이상 정말로 피와 눈물이 없을 순 없다. 피도 눈물도 없는게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에 불과하다. 國은 家를 잠시 넘어서는 것 뿐이고 넘어섰던 길을 통해 얼마든지 家로 다시 돌아 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國과 家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이방원이 말년을 통해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5.6. 결말
상술한 것처럼 기존 사극의 이방원들과 대조되는 출발점에서 시작된 이방원이었지만 결국 왕으로서는 기존의 철혈 군주로서의 이방원들이 그랬듯 조선이라는 대의와 다음 세대에 찾아올 태평성대를 위해 가차없이 정을 끊고 피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상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그런 그가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주위의 반응은 용의 눈물로 시작된 기존 이방원 세대를 그린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르다.우선 원경왕후의 경우 임종을 맞이하며 단둘이 극적인 화해를 이루던 것과는 정반대로 용서하지 않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끝까지 화해를 이루지 못했고 결국 임종도 자식들 사이에서 맞이했다. 정작 이방원은 그녀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 주변에서 자식들이 통곡하고 있는 반면 이방원은 대비전 바깥에서 혼자 통곡함으로서 그녀의 장례에서도 배제당한다.
또한 세종은 용의 눈물에서는 아버지의 심온 숙청에 대해 극도로 반발하면서도 결국 속을 삭히며 감내하고 사실상 이방원이 구축해놓은 차세대로의 체제를 받아들이는 계승자로서의 이미지였던 반면, 태종 이방원에서의 세종은 심온 숙청 후 죄없는 이들의 시체 위에서 성군이 되라는 거냐는 물음을 시작으로 이방원의 방법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성군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하며 결코 그를 이해할 일은 없을 거라 못박는다.
나아가 이 모든 것이 세종을 위해서 악업을 짊어지고자 하는 일이라는 이방원의 표현에 대해서도 상왕 스스로의 영생을 위해 자신을 그의 그림자로 만들어 죽어서도 무덤 속에서 조선을 다스리고 싶어하는 것이란 반박과 함께 용상의 포로란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말의 태종우도 비록 성사되었다고는 해도 기존과는 정반대라 할 만한데 용의 눈물에서는 이방원의 처절한 고해에 대답하듯 비가 내려 그의 삶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것과 달리 태종 이방원에서의 이방원은 그와 동일한 고해의 기우제를 이뤘음에도 비가 내리지 않은 채 쓰러지게 되고, 그가 세종의 손을 잡고 최후를 맞이한 다음에서야 비가 내린다. 여기서는 하늘도 이방원의 염원에 살아 생전에는 부응해주지 않은 것. 이렇게 보면 태종 이방원에서 기존 사극과 같이 그에게 입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해준 인물은 아버지 이성계와 아들 이도 뿐이었다.[50]
6. 결론
여타 사극의 '이방원'과는 다른 묘사를 보여줬지만 꽤나 호불호가 갈리는 이방원이다.6.1. 장점
역대 이방원 묘사 중 이방원이 처음부터 완성된 군주로서 그려지지 않은 것은 분명 참신한 각색이며, 본작이 이방원을 무조건 옹호하지 않는다는 점도 좋은 평을 받았다. 담당 배우 주상욱의 열연 및 이전 사극의 이방원과 대비되는 모습과 더불어 '家를 넘어 國'이라는 주제만큼은 어느 정도 살렸기에 방영 당시에는 그럭저럭 호평을 받았다.기존 사극에서의 이방원 세대를 다룬 작품들이 이방원의 행보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은 일부 있었을지언정 용의 눈물 마지막 나레이션에서 한 태종이 한 일이 어찌 세종보다 가볍다고 할 수 있겠냐는 표현대로 그러한 행보가 있었기에 세종의 시대가 있었다는 의의를 부여하던 것과 달리, 태종 이방원에서는 명백히 그에 대해 부정은 않되 긍정도 않고 태종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며 건조한 스탠스로 확실히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이방원이 주연급으로 나오는 여말선초 사극 패러다임의 시초가 되었다고 할 만한 용의 눈물에서의 이방원이 맞이한 결말과 연출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의도적으로 노렸다고 할 만한 대비이다.
본작의 이방원은 신덕왕후와 한 차례 설전을 벌인 후 어떤 일을 당했을 때, 혹은 일을 벌일 때에는 반드시 명분을 챙겨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줘 미약하게나마 캐릭터로서의 성장을 보여준다.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는 '정도전 등이 서자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뒤 세자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적자 소생의 왕자들을 살해하려 했기에 거병하여 정도전 등을 처단했다'는 명분을 통해 '정도전을 척살하고 이방석을 폐세자 시킨다'라는 목표를 얻어냈다. 사의의 난을 진압한 직후엔 '현비 강씨의 인척인 조사의가 (태상왕을 사칭하여) 난을 일으켰다'고 규정하여 조사의와 김 내관 등의 지휘관 급 주동자들만 처형하고, 실질적 배후인 이성계는 차마 아버지라 죽일 수 없었기에 살렸다.[51]
6.2. 단점
하지만 대본 작가인 이정우의 처참한 실력으로 인해 정치가로서의 면모나 논리를 많이 보여주지 못하였으며, 같은 각본가가 집필한 고려 거란 전쟁에 대한 특정 논란이 불거지면서 이전에도 시청자들 사이에서 평가 문서를 통해 지적되었던 문제들이 다시금 대두되었기에 본 작품 속의 이방원에 대한 묘사 역시 더 비판적이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졌다.흔히 알려진 외척 제거나 가문과 가문의 대립 구도에만 집중하여 정작 조대림 사건 같은 더 흥미로운 일이나 조선을 반석 위에 올린 명군으로서의 면모를 다루지 못한 점 역시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죄인을 국문하거나 자백을 받으려 할 때 본작의 이방원은 논리로 대립하지 않고, 우왕이나 공양왕에게 보인 태도처럼 상대가 왕이어도 화를 내거나 항상 힘이나 억지 명분으로 찍어누르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그 외에 이방원의 행동에 대한 동기가 대사로 많이 드러나 직관적으로 묘사된 부분에 대해서도 호불호가 갈리며[52], 그가 왕이 되기 전까지는 반역을 꾸며도 항상 '어쩔 수 없이' 일을 벌이는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된 것도 이상하다는 반응이 있다. 이러한 여러 문제점이야말로 작품 속 이방원 묘사의 한계인 셈이다.
또한 이 작품의 이방원도 결국 애민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 것은 이전 사극의 이방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본작의 평가 문서에도 언급되듯이 이정우 작가의 단점 중 하나가 빌드업을 한 것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하는 점인데, 초반부의 이방원은 백성들을 자주 입에 담으면서 전란으로 인해 고통받는 그들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그들을 어떻게 받들어야 하는지를 꾸준히 고민하고 다시 배우는 묘사가 나왔다. 하지만 본작의 시점이 조선 건국으로 넘어가면서 이방원이 백성을 언급하는 일은 사실상 거의 없어졌다. 대본 작가의 회수 능력도 문제이지만, 본작에서 백성들을 제대로 조명하는 장면들이 적어서 초반부에 이방원을 포함한 인물들의 백성 타령이 와닿지 않는다는 반응도 있다.
애민군주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였다는 점은 그렇다 쳐도 전주 이씨 가문 한정으로 철저한 재현을 한다는 일부 평에 비하면, 과도하게 이방원의 입장에서 띄워주려다가 다른 인물들의 묘사가 너무 악하거나 무능하게 묘사된 부분도 있다. 신덕왕후는 실제 태종의 의도로 곡해가 존재하는 태조실록에서 묘사된 것보다도 더 사악하고 계략을 꾸미는 모사꾼이 되었으며, 이성계를 부정적으로 그린 것은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여지가 있기에 해석의 차이지만, 이성계가 이방원과 비교해도 조선 건국 이전부터 지도자로서의 통솔력이나 판단력이 거의 없는 식으로 묘사한 것은 방영 당시에도 이상해 보인다는 반응을 받았다. 정도전도 본작에서 이방원에 비해 제대로 하는 일 없는 정치가로 곡해되었으며[53], 원경왕후도 과한 각색으로 인해 '조선의 절반은 자기의 것'이라면서 해설 왈 '태종의 정적'이 된 것도 너무 억지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물론 이방원을 옹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방원이 왜 킬방원이란 비난을 들을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비판의 여지도 보여줌으로써 태종 이방원의 인간적인 고뇌와 군왕으로서의 삶에 대해 적절히 그려낸 것은 사실이지만, 이방원을 양면적으로 묘사한 점은 이미 약 25년 전의 용의 눈물에서도 보여진 부분이며, 본작이 조선왕조실록이 전부 제대로 번역된 이후에 제작된 작품이라서 더 부각되는 것도 있다.
7. 어록
자세한 내용은 이방원(태종 이방원)/어록 문서 참고하십시오.
[1]
1화 프롤로그에서 세종에게 양위하는 장면이 나왔다.
[2]
대군 - 사랑을 그리다 이후로 3년 만의 사극 출연이다. 다만 이전에 출연했던 사극
선덕여왕,
조선미녀삼총사,
대군 - 사랑을 그리다는 모두 퓨전사극이라 이번 작품이 첫 정통사극 출연이다.
[3]
여로모로 배우의 전작
대군 - 사랑을 그리다의 진양대군과 비슷하다. 왕이 되기 위해 아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는 점, 부모와 대립하고 왕재로서 인정받고싶어 한다는 점이 비슷하다. 그런데 웃기게도 진양대군은 제 2의 이방원을 꿈꾼 수양대군, 즉
세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4]
호평을 받는 현재는 외모가
최수종을 닮았다는 의견이 있다. 주연 정보 없이 본 시청자들은 방영 초기부터 최수종으로 착각한 사례도 있다. 재밌게도 최수종 역시
태조 왕건에 캐스팅됐을 때 안 어울린다고 굉장히 말이 많았으나 예상을 뛰어넘는 호연을 펼치며 사극의 본좌로 등극하게 된다.
[5]
아예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고 MBC 월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망국의 왕자였던
월야 역할을 했었고, 또 TV조선 드라마
대군 - 사랑을 그리다에서는 수양대군을 모티브로 한 진양대군 역할을 맡았었다. 물론 그 사극들은 확실히 KBS 대하드라마와는 다르고, 무엇보다 월야 자체가 가상인물이었고 진양대군을 연기했을 때는 큰 임팩트를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맡는 배역이 자료가 가장 풍부한 이방원이라는 점은 매우 큰 차이긴 하다.
[6]
실제로 주상욱의 소속사가 커피차를 보냈을 때 이 드립을 써먹었다.
[7]
덕분에
아시아태평양 어워즈 연속극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2022 KBS 연기대상 대상을 거머쥐었다.
[8]
공교롭게도, 현재 주상욱의 나이 또한
대조영 방영 당시의 최수종의 나이와 같다. 또한 최수종과 주상욱은 2005년에 각각
해신과
점프-청해의 꿈에서
장보고를 연기한 적이 있다.
[9]
정확히 말하자면 염종은 중간까지는 한편이었으나 미실의 난 이후로 갈라졌다.
[10]
이 드라마에서는 진안대군과 한때 역성혁명 건으로 갈라섰다가 화해했고, 익안대군과는 함께하다가 막판에 2차 왕자의 난 때문에 갈라섰다가 가까스로 화해를 한지라 형제라고는 해도 아주 다정한 사이는 아니게 되었다.
[11]
<용의 눈물>에서는 태조를 기쁘게 한 과거 급제자라는 게 한두 번 언급되고, 궁여지책으로 태조와 군신동맹을 맺으려는 공양왕의 부름을 받고 동맹문을 작성할 것을 지시받는 정도로만 그려진다. <정도전>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묘사되고, 그럼에도 처음엔 아버지를 따라 무관이 되겠다면서 거진 백수로 지내다가 위화도 회군 전후로 관복을 입는데 그마저도 정도전 옆에서 붙어있는 것으로만 묘사되며,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과거 급제 대신 정도전에게 감명되어 어릴 때부터 성균관에 들어간 것으로 각색했으며, 조선 건국 후 왕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관복 입은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12]
후에 신하들을 좌지우지 할만큼의 먼치킨 정치력을 가졌으며, 그 어렵다는 과거를 합격한 것을 생각하면 음서로 벼슬하는 관원들에게 당하는 이방원은 굉장히 억울한 셈이다.
[13]
이성계가 교분 맺는데 이방원의 도움이 컸다고 칭찬하는 기록이 남아있기는 한데, 이성계는 공민왕 시절부터 정계에 구르며 왕족인 개성 왕씨와도 혼맥을 맺는 등, 일찌감치 중앙 권력에 편입한 사람이다. 진짜 도움이 커서가 아니라 그냥 열심히 거드는 아들에게 덕담해준 것.
[14]
다른 드라마에서처럼 이방원이 주도한게 아니라 이방원은 모든 형제들이 분담을 나눈데 한 축을 담당한 정도다. 근데 그게 하필 정몽주를 교살하는 일이라 가장 임팩트가 있었던감은 있다. 이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정몽주 살해가 이방원 단독으로 이루어진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려냈다.
[15]
이런 걸 보면 왜 아버지의 말까지 무시하고 이방원이 정몽주를 쳤는지도 알 수 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은 전혀 없고 뒷감당은 아버지가 다하는데,
이름값은 워낙 높아 단숨에 존재감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16]
심지어 후계가 세종대왕이라는 점, 그가 마음껏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안배했다는 점이 고평가를 받는다. 비슷한 행보를 보인 손자 세조와 달리.
[17]
게다가 방번의 죽음을 방조한 <용의 눈물>과는 완전히 달리 방번은 어떻게든 살려주고자 했다. 방간이 자기 멋대로 방번을 죽이자 방간의 멱살을 잡을 정도였기에 이 작품 안에서 방번의 죽음은 이방원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서 방원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처음부터 이방석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방번 역시 이를 파악했기에 이방원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방원의 거사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방석을 도와 방원을 상대로 싸우지도 않았다.
[18]
기존 사극에서 보여진 완성된 철혈군주로 시작된 이방원들과의 캐릭터성에 대해 차별점을 두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모습이다.
[19]
이 "앞으로의 일" 이라는 게 다름아닌 위화도 회군과 관련된 것이다. 정도전은 장기 기물 가운데 포를 일부러 규칙에 어긋나게 움직이며 장군을 부르고, 그로써 이방원이 장기판에서 사면초가에 몰렸듯이 이성계도 위화도에서 이런 상황일 것이라며 일깨운다.
[20]
〈용의 눈물〉에서는 상술된 김저 사건 당시 이미 노인인데다 병마사, 예의판서 등 고위직을 지낸 곽충보에게 "왜 하고 많은 선물 중에서도 하필이면 칼인가!" 라고 호통을 치다시피 하며, 대놓고 말하지만 않았다 뿐이지 길게 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하라며 위협하기까지 한다. 실제 같으면 된통 깨지는 것은 곽충보가 아닌 이방원이었을 테지만, 이 바로 다음 장면은 곽충보가 덜덜 떨면서 이성계에게 김저의 음모를 실토하는 것이다.〈정도전〉에서는 15세의 나이로 천복을 직접 죽여 안락사시킨다.
[21]
사실 영어 제목이 'king of tears', 즉 눈물들의 왕인 것이 이것과 관련이 있다.
[22]
용의 눈물은 제목부터 시작해서 이방원이 우는 장면이 종종 나왔고 그 대부분이 명장면으로 회자되지만, 캐릭터 자체가 카리스마적인 철혈군주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인물이었고 눈물을 흘리는 부분도 시청자들에게 "그 피도 눈물도 없던 이방원이 울다니!"라는 감상이 들도록 평소 모습과의 대비가 철저히 의도된 소수의 장면들이다. 대표적으로 성녕대군이 요절했을 때, 양녕대군을 폐세자할 때, 아버지 이성계와 화해할 때, 이성계가 승하했을 때 정도. 사실 실록을 보면 의외로 이방원이 우는 기록은 많이 남아있다. 단지 킬방원 이미지가 두드러져서 그럴 뿐.
[23]
그나마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은 일을 행한 뒤에 그 후폭풍에 대하여 괴로워하거나 후회하는 면을 보였다. 하지만 일을 시행할 때에는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자신의 신념 하에 일을 실행시키는 면을 보였다.
[24]
이게 또
배우가
배우인지라 무예가 뛰어난 느낌을 준다.
[25]
여담이지만 이제껏 묘사된 이방원 캐릭터는 기록에 묘사된 사냥 덕후답게 사냥과 관련된 묘사가 자주 나오던 반면 이 작품의 이방원은 방영 중반이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사냥 얘기가 잘 안 나온다. 2차 왕자의 난 때 잠깐 나온 게 끝.
[26]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예절, 음악, 활쏘기, 승마(본래 춘추시대에는 전차 몰기였다), 독서, 수학.
[27]
등청을 할 때 부인 민씨가 손수 챙겼던 말로 안장에 칼을 매달아놨다.
[28]
재미있게도
SBS 드라마 〈
야인시대〉에서
아버지의
협력자 역을 맡았던
조상기가 일회성으로 맡았다. 안 되겠소! 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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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아버지가 찔린 아들을 보고 놀라서 자신에게 달려든 자객을 그쪽으로 내던져 저지해줬다.
[30]
방우 밑에 있는 방과, 방의, 방간이 모두 무장이라 헷갈리기 쉽지만, 방우도 문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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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그냥 개그 씬으로 볼 수 없는 게 도끼질이 서툴었을 때 찾아온 정몽주는 차마 못 죽이고 오히려 붙잡고 울면서 제발 대업을 막지 말아 달라고 사정할만큼 정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도끼질이 능숙해진 때에 이성계가 낙마하고 조준, 남은 등 측근 사대부들이 파직되어 고문을 당하는 등 가문이 위기에 처하자 다른 식구들은 엄두도 못 내는 정몽주 살해를 앞장서 주도하는 등 캐릭터의 변화로 볼 수 있는 연출을 보였다.
[32]
그 중에는 이성계를 즉위하기 전부터 모시던 김 내관도 포함되었다.
[33]
유일한 예외라면 2차 왕자의 난 당시 왕위를 향한 갈망과 죄책감에 정신이 나간 나머지 아무 잘못 없는
이방과에게 칼을 들이댔던 것. 이방과가 이를 크게 문제삼지 않아서 넘어간 거지 자칫 잘못했으면 이방원은 여기서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었다.
[34]
멀리 갈 것도 없이 형 이방간의 후예들이 이 꼴을 맞이했다.
[35]
폐세자가 된 방석이 자신도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는데 왜 그 기회를 빼앗느냐고 원망하자, 이전의 구밀복검하던 태도를 버리고 대놓고 "내가 하고 싶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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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과 창왕의 폐위 건, 정몽주 살해 건, 1~2차 왕자의 난에서 나온 사건들도 거의 상황 자체가 뭔가 수를 쓰지 않으면 정말로 큰일나는 상황이라 자신들의 안위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 컸다.
[37]
비슷한 시기를 다룬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은 권력을 잡기 무섭게 상의고 뭐고 할 것없이 강압적으로 사병혁파를 이뤘다. 용의 눈물의 이방원이 세자 시절부터 자신만의 길이 잡혀있고 그걸 확실하게 드러내는 수준의 완성형이라면, 태종 이방원에서 그려진 동시기의 이방원은 아직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과정형이라는 것이다.
[38]
이는 배우의 무게감 때문일수도 있는게 용의 눈물을 찍을 당시 유동근은 이미 파천무와 장녹수를 통해
세조와
연산군을 연기한 바 있다. 이미 사극에서 포스를 내던 시점이었던 것. 그런데 주상욱은 대하드라마 내지 정통 사극은 사실 이번 작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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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롭게 "조선의 절반은 내 것"이라며 통치의 동반자가 되길 선언했지만 가례색 설치를 포함한 태종의 강력한 대응과 자식과의 생이별로 결국 무너지면서 자신과 태종의 역학관계를 처절히 깨닫고, 후일 장성한 세자에게 외숙부들을 구해달라면서 자신은 힘이 없다고 자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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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태종의 의도를 깨닫고 가장 자중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가례색 설치를 포함한 태종의 중전 홀대에 결국 집단상소를 사주하여 한 번 태종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바짝 엎드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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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의 등극에 공헌했던 공로 때문에 자신들 민씨 가문을 홀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발하다가 결국 양위 파동의 덫에 걸려 유배를 당하게 되고,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키우다시피했던 조카에게 통수를 맞아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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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의의 난을 진압하여 자신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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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의의 난으로 국가의 존립이 걸린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사병 혁파에 끝까지 불만을 가지며 태종 치세를 능멸하는 발언을 했다가 태종의 호령에 가장 먼저 숙청된 공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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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기존 사극에서 이성계가 이방원을 저 정도로 심하게 대하지는 않았던 것이 기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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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는 아버지를 냉대하는 방원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으며, 방의는 방원을 대놓고 두려워한데다, 방간은 방원이 용상에 오르는데 있어 넘어야했던 최후의 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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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점은
용의 눈물의 이방원이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쪽의 원경왕후가 동생들을 사살할때 오히려 더 "차라리 나를 죽이고 가라" 라고 하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등 더 했기 때문에 그쪽 이방원이 숙청과 관련해서는 더 잔인하게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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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은 역대 이방원 중 가장 포스있게 그려지던 유동근의
용의 눈물과도 대조적인데 용의 눈물의 이방원은 세자를 폐하고나서 아버지에게 인정받았을 때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서럽게 큰 소리로 울어대며 슬픔을 표시했다. 반면 이 작품에서는 세자때문에 실망한 모습은 표현하지만 딱히 울거나 슬퍼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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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에서 보인 이방원은 민씨 일가, 사돈 집안까지 파탄냈음에도 이 점에 대해서 손에 피를 묻혀야만 했다 라고 넘어가거나 회한적으로만 남긴 채 마지막에서야 죄를 지었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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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대사는 용의 눈물에서도 세종을 꾸짖을 때나 마지막 화의 기우제 신에서 나왔었으며, 둘 모두 명장면들로 평가받는다. 다만 본작에서와 달리 용의 눈물에서의 태종의 이 말은 정당화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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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점은 먼저 두 사람이 그를 똑같이 마지막에서야 인정해주었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둘이 이방원을 용서해주는 방법론이 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선왕으로서 이방원을 웃으면서 응원의 말을 남김으로서 그를 용서하지만, 이도는 아들로서 울음과 함께 아무 말없이 손을 잡아 주는 것으로 이방원을 용서한다. 더불어 이성계가 이방원을 용서한 날은 이방원의 생일이었고, 이도가 이방원을 용서한 건 그의 장례가 치러질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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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예외라면 2차 왕자의 난 당시 왕위를 향한 갈망과 죄책감에 정신이 나간 나머지 아무 잘못 없는
이방과에게 칼을 들이댔던 것이다. 이방과가 이를 크게 문제삼지 않아서 넘어간 거지 자칫 잘못했으면 이방원은 여기서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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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이기에 시청자가 쉽게 이해할 수는 있지만, 행동만으로 알아낼 수 없거나 빌드업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단순히 배경 설명을 위해 주변인물들이 동기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은 아쉽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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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초반부에 당시 20대 관리였던 이방원이 '폐가입진'이라는 의견을 내기 전까지 그 어떤 사대부도 관련 의견을 내놓지 못하였고, 정도전도 아예 '제가 그걸 놓쳤다'면서 이방원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묘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