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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4:58

육조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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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육조거리를 재현한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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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육조거리와 광화문

1. 개요2. 범위3. 역사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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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시대 육조의 관청가. 조선 건국 후 한양 천도 당시에 계획되어 경복궁 앞으로 의정부, 삼군부, 육조, 한성부 관아가 세워지면서 형성됐다. 현대에는 광화문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2. 범위

도로의 북측 종점에 왕궁 정문인 경복궁 광화문이 있고 그 앞으로 지금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의 육조 관아, 그리고 지금의 합동참모본부 역할을 하는 삼군부 서울특별시청의 전신인 한성부 관아까지 모두 지금의 광화문광장 양 옆으로 모여있었다.

육조거리의 최남단은 현재의 세종대로 사거리( 동아일보 사옥· 광화문사거리)까지였다. 또한 육조거리 이남은 현대의 모습과 달리 청계천 이남부터는 환히 트여있던 구조는 아니었다. 세종대로 사거리(광화문광장 사거리, 동아일보 사옥)까지가 육조거리의 끝이었고, 그 이남으로는 군락이나 작은 길이 있었다. 이남에 대한 설명은 태평로 문서 참고.

3. 역사

1395년 정도전 태조의 명을 받아 한양으로 천도하며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앞에 관아를 배치하고 큰 길을 낸 것이 현 광화문광장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육조거리이다.

1396년(음력 태조 5년 4월), 한성부 행정구역을 5부(五部)로 나누면서 북부 관광방(觀光坊), 서부 적선방(積善坊)과 여경방(餘慶坊), 중부 서린방(瑞麟坊), 징청방(澄淸坊)이 나누어 이 일대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 중 관광방은 임금의 덕이 빛나는 것을 본다는 뜻이니, 빛으로 교화한다는 뜻을 담은 광화문의 앞 동네로서 적절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왕실은 폐허가 된 경복궁을 떠나 창덕궁에서 기거하였으나, 육조거리는 여전히 조선의 행정적 중심이었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의 산(火山)'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선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 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했다. #

조선시대에는 이 길에 경복궁과 다르게 통일된 이름은 없었고, 광화문 앞길, 관아거리, 육조거리, 육조 앞길, 궁궐 앞길 등을 혼용해서 불렀다. 임진왜란 이후에 경복궁과 광화문은 복구되지 못했지만 육조와 한성부 등 주요 궐외각사는 여전히 이곳에 위치했다.

1751년( 영조 27)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地圖)>에는 북부 관광방의 관광방계, 의정부내계와 서부 적선방의 당파동계, 공조후동계, 사온동계, 도렴동계, 서부 여경방의 신문내계, 장생동계, 두석계, 해풍군계, 서학동계, 내계, 동령동계, 중부 서린방의 일영대계, 중부 징청방의 두석동계가 각각 이 일대를 관할하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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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도〉, 18세기 후반 제작, 보물 제1560호. #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한양의 도성도에 당시 도로 모습이 보인다. 오늘날의 지도와 다르게 남북이 뒤집혀 있는데, 왕이 궁궐의 어좌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려졌기 때문이다. 지도 한 가운데에 동서축으로 나있는 도로가 오늘날의 종로이고, 6시 방향에 凸모양처럼 생긴 정원같은 공간이 창덕궁과 창경궁, 그 앞에서부터 종로까지 이어지는 거리가 돈화문로이며 그 오른쪽 5시 방향에 있는 네모난 공간이 경복궁이다. 경복궁 가운데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이어지는 붉은 선이 과거의 육조거리이다. 현재의 세종대로에 해당하는 구 태평로 지역의 도로는 조선시대에는 주 도로가 아니었다. 서울시청 서편을 통과하는 세종대로 부분은 과거에는 경운궁( 덕수궁)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었고, 대한제국 때에 와서 개통한 태평로는 정식 도로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남대문로 숭례문에서 종로까지 이어지는 주도로였다. 괜히 종각이 그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종각 자리가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4. 여담

흔히 당나라 장안성, 신라 금성, 발해 상경성, 일본 헤이안쿄처럼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도시 구조에서 보이는 주작대로의 역할을 담당했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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