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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위마르크(Wiomarc'h)[1] |
출생 | 미상 |
사망 | 825년 |
재위 | 브르타뉴 왕국의 왕 |
822년 ~ 825년 |
[clearfix]
1. 개요
브르타뉴인들이 프랑크 왕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왕으로 추대한 두 번째 인물.2. 행적
8~9세기경, 브르타뉴인들은 프랑크 왕국의 지속적인 침략에 시달렸다. 753년 피피누스 3세가 브르타뉴로부터 반(Vannes) 백국을 탈취했고, 778년 카롤루스 대제는 렌, 낭트를 추가로 공략한 후 반 일대와 묶어서 브르타뉴 총독령을 신설했다. 브르타뉴 총독령은 브르타뉴인들이 프랑크 본토를 습격하는 걸 저지하는 동시에, 프랑크 왕국에 직접적으로 복속하지 않은 브르타뉴인들을 지속적으로 침략해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렌과 반 일대 사이에 둘러싸인 알레 일대는 프랑크군에게 집중적으로 습격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카롤루스 대제는 브르타뉴 내 프랑크인을 늘리고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자치권을 부여받았던 브르타뉴인들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라고 강요했다.이러한 카롤루스 대제의 강압 정책에 시달리던 브르타뉴인들은 814년 1월 카롤루스 1세가 사망하자 모르반을 브르타뉴 왕으로 추대하고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818년 카롤루스 1세의 뒤를 이어 프랑크 왕이 된 루도비쿠스 1세가 대군을 일으켜 브르타뉴 전역을 장악했고, 모르반은 공세를 피해 달아나다가 프리지악과 카하익스 사이 평원에서 초슬론(Choslon)이라는 종자에게 살해되었다. 하지만 822년, 브르타뉴인들은 다시 위마르크를 왕으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학자들은 그의 권력이 브르타뉴 총독령의 영역에 직접 귀속되지 않은 브르타뉴 북부, 즉 돔노네 서부 지역에서 행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극심한 기근이 프랑크 왕국을 강타했기 때문에, 루도비쿠스 1세는 브르타뉴로 가려던 원정을 연기했다. 824년, 마침내 군대를 모은 그는 브르타뉴의 도시 렌으로 행차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군대를 세 군단으로 나누어 두 군달은 아들 아키텐의 피핀 1세와 루트비히 2세에게 맡겼고, 자기는 3번째 군단을 이끌었다. 이후 프랑크군은 브르타뉴로 진군해 그곳을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했다. 40일간 원정을 이어간 프랑크군은 브르타뉴인들로부터 인질을 받아낸 뒤 11월 17일 루앙으로 철수했다. 825년 5월 루도비쿠스 1세가 엑스라샤펠에서 총회를 열었을 때, 상당히 많은 브르타뉴 영주들이 모였다. 이때 위마르크도 함께 있었는데, 다른 브르타뉴 귀족들과 함께 복종 서약을 하는 대가로 환대받고 상당한 선물을 받고 귀환했다.
그러나 위마르크는 본국으로 귀환한 뒤 루도비쿠스 1세에게 복종 서약을 위반하고 브르타뉴 총독령을 습격했다가, 낭트 백작이자 브르타뉴 총독 랑베르 1세가 파견한 부하들에게 자기 집에서 포위되어 살해되었다.
[1]
일부 기록에는 기요마르크(Guyomarch)로 기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