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위대한 세기
1. 개요
위대한 세기의 당시 재현에 대한 것을 서술한 문서.2. 상세
참고로 신문기사다.
튀르키예 예디테페 대학교 식품학 교수인 외즈게 사만즈와 작가인 투르굿 쿳이 위 장면에서 크게 짚을 수 있는 15가지의 오류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1- 근위병
근위병이 쓰고 있는 모자가 시기에 맞지 않는다. 술탄이 식사를 하는데 근위병의 수와 식사를 돕는 하인의 수가 너무 적다. 실제로 술탄은 식사를 할 때 한 무리의 하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했다.
2- 식탁보
당시에는 식사를 하는 사람 무릎 위에 식탁보를 얹었다. 오늘날 스타일과 다르다.
3- 앉은 자세
당시에는
4- 촛불
밥상위의 촛불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 당시에는 접시모양의 촛대에 초를 놓았다. 밥상 위에 놓인 라크와 포크와 나이프도 시대에 맞지 않는다.
5- 컵
할례를 받은 아이에게 선물하는 컵과 생김새가 닮았다.
6- 빵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빵을 덩어리째 손으로 떼어 먹었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오븐에서 나온 빵은 없었다. 그리고 빵을 잘라 그릇에 담아 놓았는데, 이는 당시의 풍습에 맞지 않는다.
7- 빵과 고기
오늘날 같은 모습으로 한 접시에 빵과 고기를 같이 놓았다.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빵과 고기를 따로 담아 놓았다.
8- 식탁의 상태
당시에는 술상이 아닌 이상, 오늘날처럼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먹는게 아니라, 하인이 그때 그때 음식을 가져왔었다. 술탄이 음식을 다 먹으면 그 접시를 물리고, 새로운 음식을 내오는 식이었다. 한 상에 술과 음식과 빵이 함께 놓여있는 것은 매우 이상한 모습이다.
9- 식기도구들
당시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는 중국산 도자기와 이즈닉산 도자기, 동그릇, 톰백 그릇을 사용했다. 그릇의 모양도 시대에 맞지 않는다.
10- 물병
위의 유리 물병은 19세기 스타일이다. 또한 당시에는 물을 마시고 싶으면 하인이 잔에 물을 담아주는 형식이었지, 직접 물을 따라마시지 않았다. 또한 당시의 물병은 동으로 만들었지 유리로 만들지 않았다.
11- 뚜껑 달린 도자기 팬
19세기에 이을드즈 궁전에서 생산하던 도자기를 사용했다.
12- 앞접시
당시에는 앞접시가 없었다. 상 위에는 딱 하나의 접시만이 있었고, 모두가 그 음식접시를 공유했다. 또한 재상들이 단체로 모인 상에서는 각 사람마다 각접시 하나별로 음식을 나눠서 주었다. 앞접시를 쓰는 풍습은 프랑스식 예법으로 1850년대 이후에야 등장한다.
13- 과일접시
과일접시는 식사 후에 와야 한다.
14- 숟가락
쉴레이만 대제가 살았던 시절에 금속 숟가락이 가당키나 하는가? 이는 19세기에나 등장한다. 그 당시에는 대모갑이나 거북껍질로 만들고 보석으로 장식한 수저를 사용했었다. 위의 장면에 등장하는 금속 숟가락은 그 당시 유럽궁정에서 조차도 없었다.
15- 초록색 사과
원래 터키에는 없던 종이다. 나중에 20세기 되어서야 유럽에서 소개된 종이다.
언어적인 측면에서 무흐테솀 유즈이을은 나름 신경을 쓴 탓인지, 오스만 시대의 튀르키예어를 상당히 많이 사용한다. 특히 쉴레이만이 휴렘 술탄에게 지어주는 시나 연애편지[2]는 오스만어로 된 원본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터키인들조차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오스만 시대의 궁중용어와 직책 등도 현대어로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데다가 단어도 옛스러운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터키어를 배우는 사람이 이 드라마를 보고 터키어를 배우는건 상당히 어렵다. 이는 일본 시대극보고 일본어배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대 터키어도 유럽권과 마찬가지로 왕족을 1인칭 복수로 칭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반영된다. 이를테면 "Hünkârım şu an halvette girdiler."라고 하는데, 번역하자면 "폐하께서는 지금 합궁에 드셨사옵니다."라고 황제를 3인칭 단수로 지칭해 girdi 라고 써야 정상이지만 3인칭 복수로 칭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알고 있다(biliyorum), 알았다(anladım), 절대로 안된다(asla olamaz) 같은 어휘도 당시의 어휘를 사용해서 각각 mâlum, alâ, zinhar edemez 등으로 사용하고 있어 고어를 모르는 터키인들조차도 헷갈려한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외국 인물들 특히 유럽인들이 작중에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전체적인 고증 수준은 튜더스나 마르코 폴로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시즌 1, 2, 4는 몇몇 창작 인물들만 제외하면 역사적 사실과 심각할 정도로 차이나는 점은 없지만[5] 시즌 3 스토리는 약간의 허구가 가미되어 있다.
2.1. 실제 역사와의 비교
2.1.1. 휴렘 술탄
실제 역사에서는 '소리지르고 발광'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아들을 차기 술탄에 앉히려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른 후궁의 아들이 술탄이 되면 자기 자신은 황궁 밖으로 쫓겨나고 아들들은 모조리 처형당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 어떻게 보면 야심찬 성격이었다기보다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것일지도.[6][7]휴렘이 쉴레이만을 진심으로 좋아했는지는 확인 불가능. 쉴레이만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황제의 첩이 된 자신의 처지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황제의 애첩이자 다음 황제의 모후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쉴레이만이 휴렘을 지극히 사랑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애첩을 노예해방시키고 정식 황후로 삼는다거나 평생 자기 옆에 있게 한다거나[8] 하는 등 이전까지의 관습을 깬 것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또한 휴렘은 폴란드 왕에게 편지를 두 통 보내 등, 황후로서 정치에 일부 개입했다.
2.1.2. 이브라힘 파샤
작중에서는 그리스 노예 출신이라 하여 다른 관료들로부터 멸시받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명백한 고증 오류다. 보다 상세한 소개는 예니체리 항목을 참고하고 여기에서는 간단히 쓰면, 초창기 오스만 제국은 투르크인들이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데브시르메 제도가 도입되어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 소년들을 징집해다가 군사 지휘관과 관료로 등용하기 시작하는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메메드 2세는 전제군주정을 수립하기 위해 데브시르메 징집자들을 정치의 중핵으로 들어앉히고 이전까지 지배층이었던 투르크인들은 일종의 야당으로 만들어 여당. 즉 데브시르메 출신들을 견제하게 한다. 하지만 이후 재상을 비롯한 고위 관직에 데브시르메 출신자들이 임명되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쉴레이만 대제 치세에는 마침내 두 세력이 공존하던 균형이 깨어지고 데브시르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즉 실제 역사에서 극중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인 노예 따위와 국정을 논의해야 하다니...'라며 한탄하는 관료가 있었다면, 이브라힘으로서는 "그러는 당신도 슬라브족또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뇌하는 모습도 그려지지만, 이 부분은 틀렸다고 하기 어렵다.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한 비잔틴 제국이나 세르비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지의 소년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이유가, '황제에게 충성하는 유능한 관료'로서의 정체성을 새로 수립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을 정도. 더군다나 이브라힘은 재상이 된 뒤에 부모를 콘스탄티노플로 모셔와 봉양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그만큼 그가 자신의 고향이나 출신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10]
2.1.3. 헝가리 및 전쟁 관련
극중에서는 로요슈 2세가 현군이든 폭군이든 나름 왕답게 그려지는데, 실제로는 당시의 헝가리는 말만 왕국이지 귀족 공화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왕권이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1521년의 베오그라드 공방전, 1526년의 모하치 전투 모두, '투르크가 쳐들어왔으니 군대를 이끌고 모여라!'라는 왕명이 떨어졌음에도 제때에 집결지에 모인 귀족이 한 명도 없었을 정도. 베오그라드는 그러다 떨어졌고, 모하치 때는 로요슈가 집결지로 먼저 향한 뒤에야 귀족들도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다.시즌 1에 국한해 서술하자면, 먼저 로요슈 2세 시대의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에 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에게 다짜고짜 '연공 바칠래, 죽을래.'라고 강요했고, 헝가리가 그걸 거부하자 침공한 것. 반면 극중에서는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에 바치기로 했던 연공을 몇년째 지불하지 않았고, 그것이 침공의 명분이 되었다. 또 베오그라드 공방전이 벌어졌을 당시 국왕 로요슈는 부다에 있었고, 나름 치열하게 묘사되는 드라마와 달리 당시 헝가리 수비군은 6백 명에 불과했다. 전투의 여파가 나름 커서 그렇지, 전투 자체는 시시한 싸움이었다. 모하치 전투에서 등장한 헝가리군의 복장도 실제 헝가리군이 한 복장이 아닌 스페인군의 복장을 하고 있다.
로도스 공방전에서는 성 요한 기사단 측의 병사들은 큼지막한 방패를 들고 있는데, 물론 당시의 기록화를 보면 기사들이 방패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귀족 자제들만 입단을 허용했던 특징 탓에 기사들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받았을 때는 용병을 고용하거나 로도스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맞섰는데, 극중에서는 용병이고 주민이고 없고 기사가 수천 명이었던 걸로 퉁치자고 했던 모양. 그리고 주인공은 휘렘 술탄이지 쉴레이만이 아니어서인지 공방전이 상당히 간략하게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반년에 걸친 싸움이었다. 쉴레이만이 이끄는 본군은 전위부대보다 한달 뒤에 로도스에 도착하지만 그래도 요새 위에 오스만의 깃발을 게양하기까지 5개월이나 걸렸으며, 그마저도 정공법으로는 끝끝내 함락하지 못하고 항복을 협상한 결과였다. 로도스 공방전으로부터 8년이나 지난 뒤에 스페인이 기사단을 신하로 삼으며 떼어준 땅인 몰타가 이 당시에도 기사단 영토로 묘사되는 건 보너스[11].
또 베오그라드 공방전 때에도 그렇고 로도스 때에도 그렇고 예니체리들이 검을 들고 백병전을 벌이는데, 이미 백년 전인 무라드 2세 때에 예니체리의 제식병기로 총이 채택되었다. 총이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극중에서처럼 예니체리들이 검과 방패를 들고
모양이 이 지경이 된 건 기본적으로 본작이 쉴레이만 1세 시대 오스만 제국의 정치나 외교, 군사를 다루는 작품이 아니라 하렘의 궁중 암투물이기 때문. 다만 시청자 중에는 "하렘물이라니 정치, 군사적 고증에는 일단 눈을 감겠다(또는 이런 고증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다)" 라는 경우도 많겠지만 "아무리 하렘물이라지만 그래도 기본은 지켜야지?" 라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을 간과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 가령 이 항목에 서술되어 있듯 위대한 역사가 잘못 알려지고 있다며 본작에 반발하는 터키인도 적지 않은데,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 와서 생각하자면 본작은 세종대왕 시대 4군 6진 개척 이야기를 하는데 조선군 갑사는 온데간데 없고 개마무사가 앞장서서 돌격하며 뒤에서는 화랑이 화살을 쏘는 수준이다. 이래서야 아무리 세종과 소헌왕후의 로맨스를 그럴싸하게 창작한다 해도 좋은 소리를 듣기는 어려울 것이며, 실제로도 기황후니 조선구마사니 해서 이런 쪽으로 욕을 얻어먹거나 아예 조기종영까지 된 물건도 있다.
[1]
메흐메트 2세 이전까지 술탄들은 재상 이하 고위 관료들의 자문회의기구인 '디반(divan)'을 직접 주재했는데, 회의가 해뜰녘에 시작되어 여름에는 정오. 겨울에는 오후녘에나 끝났기 때문에 회의 중간중간에 식사를 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술탄도 관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 하지만 전제군주로 군림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이것도 정복의 이유 가운데 하나다)한 메흐메트는 관료들과 거리두기를 시도. 디반을 황제가 직접 주재하는 관습도 폐하고 식사도 황제 혼자서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극중에서는 쉴레이만이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거 없었고, 회의가 다 끝나면 재상이 황제를 알현하여 회의에서 논의된 사항과 결과를 보고하고 황명을 받은 다음 그것을 다른 관료들에게 전달했다(이때의 황명은 디반 회의으 결정을 그대로 따를 수도 있었지만, 니들은 다 틀렸고 내가 맞다는 식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문자 그대로 자문기구였던 셈이었지만, 회의의 구성원들은 각 분야별로 제국의 최고 브레인들이었기에 결정이 존중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전쟁 선포 등 황제가 가끔씩 재상 이하 관료들에게 특정 사항을 전달해야 할 경우는 예외.
[2]
쉴레이만은 휴렘에게 바치는 연애시를 실제로 썼다. 심지어 시인으로서의 필명을 '연인' 이라는 뜻의 '무히비(Muhibbi)' 로 정했을 정도. 다만 이것은 휴렘의 연인이라는 것보다 비유적인 표현으로 시의 연인이라는 뜻일 수도 있겠다. 134화에서 휴렘이 숨을 거둘때 휴렘은 쉴레이만에게 오래전에 쉴레이만이 휴렘에게 바친 연애시를 다시 한번 들려 달라고 부탁하고 쉴레이만이 읊는 시를 들으면서 세상을 떠난다(
영어 자막 달린 해당 장면 동영상). 쉴레이만의 연애시를 보고 싶다면,
휴렘 술탄 항목 참고.
[3]
참고로, 실제로 카를이 신하나 외국인에게 독일어를 썼을 가능성은 낮다. 카를의 모어는 플람스어라 불리는 프랑스어계
네덜란드어 방언과
프랑스어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을 구사할 수 있었으나 썩 좋지는 못한 실력이었고
라틴어는 고생고생해서 뒤늦게야 겨우 말할 수 있었다. 혹은
프로이센 왕국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의 말이라고도 하지만, 카를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짐은 신에게는 스페인어, 여자에게는 이탈리아어, 남자에게는 프랑스어, 그리고 짐의 애마에게는 독일어로 말한다." 카를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국왕 겸
저지대 지역의 군주였지만 치세 대부분은 저지대 지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반도나 스페인을 떠돌았으며 종교 문제는 내팽겨치고
신성 로마 제국의 문제는 친동생인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훗날의
페르디난트 1세)를
독일왕으로 선출시켜 '황제 대리' 로 국정을 주관하게 했다. 즉 고증에 충실하자면 스페인어가 나와야겠으나, 아무래도, '카를 5세 = 신성로마제국 황제'. 그러니까 독일인. 이라고 생각한 듯. 추가적으로 카를은 유년기에 저지대 지방에서 자라 네덜란드 말을 잘했고 스페인어는 잘 못했으며 그런 점 때문에 스페인의 국민들에게 외국인 군주라고 적대되기도 한 사실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치세 초의 이야기. 애초에 스페인 왕으로 등극하는 조건 가운데 '스페인어를 배울 것' 이 있었으며, 점차 능숙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러나저러나 독일어를 쓴다는 것은 문제.
[4]
다만 어거지로나마 변호를 하자면, 사파비 제국은 5대 황제인 아바스 1세 치세 이전까지
아제르바이잔어를 궁정언어로 사용했다. 그리고 타마습 1세는 2대 황제이므로 고증에 철저하자면 아제르바이잔어를 써야 옳은데, 터키어와 아제르바이잔어는 서로 친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까운 언어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는 터키어와 아제르바이잔어를 한 학과에서 교육하고, 두 언어를 서로 비교해보는 연구도 많을 정도. 다만 아제르바이잔어는 어디까지나 아제르바이잔어이지 터키어가 아니기 때문에 터키어를 쓰는 것은 부적절하고, 헝가리는 이런 것도 없으므로 꼼짝없는 고증 오류. 아마 헝가리어가 되는 배우를 구할 수가 없었나 보다
[5]
다만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수두룩하게 나온다. 얼핏 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수준.
[6]
그 '몸부림' 이 오스만 제국 쇠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7]
여담으로 극중에서는 이브라힘 파샤와 휘렘 술탄 사이의 갈등이 진작부터 시작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이 '몸부림' 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브라힘 파샤는 마히데브란 소생의 황자 무스타파가 유달리 총명하다는 이유로 그를 지지했지만, '살아남아야' 하는 휘렘으로서는 무스타파의 황제 즉위는 절대로 안 될 말이었기 때문. 극중에서는 이브라힘 파샤가 하렘을 관리하는 직책 비스무리한 것을 꽤 오래 맡는 걸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승진의 계단을 착착 밟아올라가기 바빴을 것이므로 휘렘 술탄에 대해서도 '폐하께서 흠뻑 빠져 계신 여자가 있나보다' 식으로만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8]
황자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지방에 총독으로 보내고, 그때 황자의 어머니(황제를 기준으로 하면 첩)도 함께 보내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때 황자의 어머니는 황자가 황제로 즉위하지 않는 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 불가능.
[9]
실제로 극중에서나 실제 역사에서나 이브라힘을 크게 견제하고 그가 재상에 취임하는 것도 불쾌하게 생각한 끝에 이집트 총독으로 좌천된 하인 아흐메트 파샤(Hain Ahmet Paşa) [13] 는
조지아 출신으로,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되어 관료가 되었다. 즉 아흐메트 자신도 튀르크인이 아닌데다 '노예' 인 셈.
[10]
다만 극중에서는 이브라힘이 다시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고향인 파르가로 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가 가족을 소중하게 여긴 것은 맞고 그로 인해 콘스탄티노플로 부른 것도 맞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고 선언한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로 보기 어렵다. 아직 민족 개념이 희미했던 쉴레이만 시대의 오스만 제국에서는 어느 민족이냐보다 어느 종교를 믿느냐가 훨씬 중요했는데, 파르가 주민들은 기독교도인 반면 이브라힘은 무슬림. 설령 다시 기독교로 개종한다 치더라도, 줄곧 기독교도였던 것과 기독교→이슬람→기독교 테크를 탄 사람이 똑같이 여겨질 리는 없다. 가족이야 반기고 환영했겠지만 동네 주민들까지 살갑게 대했을 가능성은 낮으며(이해가 잘 안 된다면, 일제 시대에 서울에서 태어났다가 어렸을 때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이 '내 고향은 한국이니, 돌아가겠다'라고 선언하고 다시 서울로 건너온 걸 떠올려보자. 태어나서 줄곧 한국에서 자란 한국인들과 똑같이 대우받을 수 있겠는가.), 그 때문인지 극중의 이브라힘도 '죽더라도 내 곁에서 죽어!'라는 쉴레이만의 편지 한 통에 곧바로 파르가에 정착하려는 생각을 접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간다.
[11]
본거지가 없는 집단이 다 그렇지만 기사단은 이 8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작중에서는 기사단장과 협상을 마친 쉴레이만이 "자네들 그럼 이제 몰타로 가겠구먼?" 하고 묻고 기사단장이 그렇노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12]
또
항목을 참고해보면 알겠지만, 예니체리는 애당초 돌격부대가 아니라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탱커에 해당하는 부대였다.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주력 딜러는 오스만 제국의 주력군이었던
시파히. 물론 공방전은 야전과 달라지는 게 당연하지만, 사회적인 신분도 높은데다 정예병이기까지 한 예니체리를 함부로 쓸 수는 없었던 게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