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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역 입구에 새겨진 원태우 의사 동판 부조와 현판이다.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원태근(元泰根)[1]·원창수(元昌壽)·김태우(金泰祐) 김태근(金泰根, 金台根)·김창수(金昌壽) |
본관 | 원주 원씨[2] |
출생 | 1882년 3월 4일 |
경기도
과천현 하서면 안양리 (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만안로 22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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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0년 6월 25일[4][5] (향년 68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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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구한말의 애국지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유아 시절
1882년 3월 4일 경기도 과천현 하서면 안양리(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의 농가에서 아버지 원태성(元泰成)과 어머니 이호순(李好順)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농민 신분이라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애국심과 의기는 무척 투철했다고 한다. 을사조약에 분노한 그는 최초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결심했으며 이토 히로부미에게 짱돌을 던져 중상을 입히는(!) 항거를 했다. 그때가 그의 나이 23살의 일이었다.[6]2.2. 암살 시도
2.2.1. 거사 과정
▲ 맹꽁이 서당에서 표현된 원 지사의 항거 과정. 독립운동가 원태우 지사 기념 사업회에서 윤승운 화백에게 허락받아 포스팅한 것이라고 한다. 기념 사업회 / 블로그 스크랩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평소 뜻을 함께했던 동료 이만여(李萬汝), 남통봉, 김장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5일 후인 11월 22일, 그때 이토 히로부미는 경부선 기차를 타고 안양 근처를 지나갈 예정이었다.[7] 당일 원태우 지사는 친구 3명과 함께 날품팔이를 위해 영등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을 조금 마셔 어느 정도 취해있던 상태였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철로 궤도 위에 커다란 돌을 놓고, 기차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기차가 전복해도,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죽일 수 있을 것이란 계획이었는데, 거사 직전, 동료였던 이만여가 겁을 먹고 철로에 있던 돌을 치워버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달려오자, 원태우 지사는 서리재 고개[8]에서 있는 힘껏 돌을 던졌다. 이게 그냥 가벼운 돌팔매 정도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원태우 지사가 던진 돌은 정확히 이토 히로부미가 앉아 있던 자리의 창을 깨고 들어갔다. 유리창이 박살이 나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유리 파편이 8군데나 박혔다. 자칫 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중상이었다고 한다.
이 의거는 일본 신문에도 신속히 보도되는 등 열도를 흔들어 놓았고, 원태우 지사는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했으며, 당시 한국주차군 군율규정 위반으로 금고 2개월에 곤장 100대에 처해졌다. 그때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고자가 되었으며,[9][10] 여름에도 긴팔과 긴바지를 입어야 할 정도로 흉터가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독립(해방)이 될 때까지 일제의 집중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2.2.1.1. 거사 과정의 진위 여부
이 문단은 항거 과정의 신빙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박 의견을 정리한 것이다.원태우 지사가 분명 이토 히로부미를 어떻게든 처리하려 했고, 상해를 입힌 사실이 발각되어 옥고까지 치른 것 자체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 있는 기차를 전복하려고 선로에 돌을 놓아서 암살하려 시도했고, 그게 실패하자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중상을 입혔다"라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방식으로 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교차검증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상해를 입혔다는 내용 자체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아서 정확한 거사 과정 자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사실이다. 일단 원태우 지사가 던진 돌이 기차 유리창을 깨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건 교차검증이 된다.
아래는 이 내용의 의문점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박 내용을 기록한다. 그러나, 항거 과정이 알려진 사실과 다르거나 그 진위 과정이 불투명하다고 하더라도 항거를 "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며 이를 허무맹랑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문단부터는 의문점과, 이에 대한 보충 자료를 첨부하여 정리한다.
2.2.1.1.1. 달리는 열차에 던졌는가?
우선적으로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에 돌을 던져 기차 안에 탄 이토 히로부미를 맞추었다" 라는 내용은 아직까지는 한국 내에서만 있다. 실제로 빠르게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 상식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이라, 이 점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박이 많이 제기되어 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선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의견이 있다. 의견 출처
- 1905년 당시의 기차 속도는 고작 시속 20km ~ 30km였다. 운전 면허 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속도로 열차가 달렸다고 보면 된다. 물론 당시 기준으로는 빠른 속도였겠지만, 그 느린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의자를 향해 돌을 던졌고, 유리창이 깨지면서 부상을 입었다.
- 돌팔매질을 한 장소는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경사가 급하여 열차는 속도를 줄이며 넘어가야 할 정도였는지라 서행을 해야만 했다는 곳이어서 맞히기가 용이했다. 또 고개를 깎아 기찻길을 놓았기에 비탈진 위쪽에서 아래쪽을 느리게 지나가는 기차 내부를 보기가 쉬운 점도 한 몫 했다. 즉, 위에서 내려보는 위치에서 돌을 던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현재 석수 IC가 있는 곳이 안양 육교 자리인데 이곳이 예전 말로는 서리재 고개였다. 도로로 개편된 현재에 봐도 기차길은 상당히 낮은 곳에 있어서 비탈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정확하게 돌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그 시대의 기차는 현대의 것과 달리 빠른 수준은 아니었기에 평상시같이 달리더라도 느렸을 것이고, 게다가 거사를 행한 서릿재 구간은 안그래도 느린 기차가 서행하는 구간이었으므로 그쪽의 지리를 잘 알던 원태우 지사가 기차를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때를 기다렸다가 바로 돌을 던져 맞히었다는 것이다.
2.2.1.1.2. 일본쪽에 기록이 없는가?
그 외에도 일본 측에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교차 검증이 힘든 사실도 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 정도의 거물을 암살 시도하여 그러한 중상을 입혔다면 일본 내에도 기록이 있을 텐데,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에서도 일본에 크게 보도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내에서는 이러한 기록이 소실되었는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일본이 이것을 굳이 감출 이유도 없을 것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본쪽에서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것이다.이렇게 일본 언론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 전쟁 중이나 여러 사정으로 기록이 소실되었을 가능성
- 그나마 적게 다친 상해였기에 뒤따를 복잡한 후폭풍을 막기 위해 법으로만 처리했을 가능성
후자의 경우,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에게 상해를 입히기는 했으나 완전히 중상이라기보단 경상 정도로 맞아 다치기만 했을 것이라 경찰들을 풀어 원태우 지사를 따로 잡아간 것이고 이런 사실이 함부로 알려진다면 조선 통치 정당화에 금이 갈 수 있거나 항일 운동의 불길이 거세지는 등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11] 진짜 중상이나 사망이 아닌 이상 가벼운 항거는 언론에 크게 알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한다.
다만, 거사가 있고 나서 3일 후인 1905년 11월 25일, 한국주차군 헌병대장 고야마 미키(小山三己)[12]이 쓴 선고문이 남아있어 교차검증에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다. #
京畿道(경기도) 果川郡(과천군) 安養市場(안양시장) 22통 不詳(불상)
元泰根(원태근) 당시 20세
피고는 1905년 11월 22일 同(동) 시장의 李萬汝(이만여) 외 2명과 함께 날품팔이를 위하여 영등포에 갔다가 귀로에서 음주결과 조금 취하였는데 그날 오후 6시 17분 경 京釜鐵道(경부철도) 安養驛(안양역) 西北方(서북방) 약 800미터 안양부근에서 北行列車(북행열차)가 진행하여 오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작은 돌을 궤도상에 올려놓는 것을 동행한 李萬汝(이만여)가 이것을 제지하면서 자신이 이 작은 돌을 치웠는데 피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서 주먹만 한 화강석을 주워 와서 객차를 향하여 돌을 던졌기 때문에 차창을 파괴하였는데 당시 열차 안에 있는 승객 한사람에게 미상을 입혔음.
이것은 京城憲兵分隊長(경성헌병분대장) 佐藤松太郞(사토 마쓰타로)의 具申書(구신서:보고서) 및 증거 물건을 徵求(징구)하여 사실이 명백함.
이상 피고의 소행은 韓國駐箚軍( 한국주차군) 軍律(군율) 제4조 제9항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정상을 참작해야 하는 것으로 함. 따라서 군율위반 심판규정 제6조에 의거 감금 2개월에 笞(태:곤장) 1백에 처함.
- 宣告書(선고서), 1905년 11월 25일 韓國駐箚憲兵隊長(한국주차헌병대장) 小山三己(고야마 미키)
元泰根(원태근) 당시 20세
피고는 1905년 11월 22일 同(동) 시장의 李萬汝(이만여) 외 2명과 함께 날품팔이를 위하여 영등포에 갔다가 귀로에서 음주결과 조금 취하였는데 그날 오후 6시 17분 경 京釜鐵道(경부철도) 安養驛(안양역) 西北方(서북방) 약 800미터 안양부근에서 北行列車(북행열차)가 진행하여 오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작은 돌을 궤도상에 올려놓는 것을 동행한 李萬汝(이만여)가 이것을 제지하면서 자신이 이 작은 돌을 치웠는데 피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서 주먹만 한 화강석을 주워 와서 객차를 향하여 돌을 던졌기 때문에 차창을 파괴하였는데 당시 열차 안에 있는 승객 한사람에게 미상을 입혔음.
이것은 京城憲兵分隊長(경성헌병분대장) 佐藤松太郞(사토 마쓰타로)의 具申書(구신서:보고서) 및 증거 물건을 徵求(징구)하여 사실이 명백함.
이상 피고의 소행은 韓國駐箚軍( 한국주차군) 軍律(군율) 제4조 제9항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정상을 참작해야 하는 것으로 함. 따라서 군율위반 심판규정 제6조에 의거 감금 2개월에 笞(태:곤장) 1백에 처함.
- 宣告書(선고서), 1905년 11월 25일 韓國駐箚憲兵隊長(한국주차헌병대장) 小山三己(고야마 미키)
이 선고문은 이후 11월 28일 한국주차군 참모장 오타니 기쿠조(大谷喜久藏)에 의해 그 내용이 당시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까지 통보되었으므로 사실상 당시 일본 측의 공식 입장이라고도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도 이 기록을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의 일부로 취급하고 있다. 글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거사 과정과 거의 일치하며 딱히 차이점이랄 것도 없음을 알 수 있다.
▲ 일본 측 전쟁 화보에 그려진 기록화 ( 사진 출처)
물론 그렇다고 현재까지 남은 일본의 보도 자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중 일례로 일본 박물관 발행의 '일로전쟁화보' 제29권(1905년 12월8일 발행)에 일본 측 화가인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기록화로 남겨져 있다. 여기서 원태우가 농부가 아닌 갓쓰고 두루마기 입은 선비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동판과 흉상 등에 나타난 선비 모습의 원태우 의사와 비슷하다. 출처 1 출처 2
2.2.2. 유력한 과정 3가지
정리하자면, 아예 없었던 일은 아니고, 항일행위를 한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 방법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로 정리할 수 있다.- 서릿재 구간의 기차를 내려다보는 언덕에서 기차가 서행을 할 때를 파악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칸을 확인하고 돌을 던져 맞추었다.
- 이토 히로부미가 하루 일정을 마치고 기차에 타려고 하길래, 그 틈을 노려 기차에 타려는 이토를 향해 돌을 힘껏 던져 맞추었다.
- 열차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거나, 달리다가 잠시 서 있을 때 바로 이토 히로부미가 보이는 열차칸을 향해 돌을 던져 맞추었다.
2.3. 이후 말년까지
고문 후유증과 일제의 집중감시로 힘든 시간을 보냈으나 1945년 광복을 살아서 맞이하였고, 1950년 6월 25일 6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타계했다. 손자인 원상길 씨 인터뷰에 따르면 1951년 7월 22일에 사망했다고 한다.3. 가족
4. 여담
- 안중근 이전에 가장 먼저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을 투척한 인물이었지만 안중근과는 달리 완전히 저격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힌 것에 그쳐서 그에 비해 별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안중근에 비해서 밀리는 편이다.
- 원태우 의사 의거지가 개편된 것은 한 고등학생의 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안양고등학교 고건호 학생이 원태우 의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사를 쓴것으로 보인다. 글의 주인공은 현재 육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는것으로 확인된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의 시발점이 된 안양의 '원태우 의사'를 알고 계십니까?
- 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송상도는 그의 저서 『 기려수필』에서[17], 이 의거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꼬투리는 이미 원태우로부터 있었다(伊藤雖死於重根之丸, 而其符乃已到於台根之石也)" 라고 평하기도 했다. 출처 원문: 金台根(一) 乙巳伊藤에게投石
- 오늘날 그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진 곳으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그를 기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23세의 젊은 농부였던 당시의 원태우를 나이든 선비로 조각하는 오류를 범했으며[18], 안양역 입구의 부조와 달리 그를 '의사(義士)'가 아니라 '지사(志士)'로 칭했다. 의사는 의로운 일을 행한 인물에게, 지사는 의로운 일을 행하려는 '뜻을 품은' 자에게 주로 붙는 단어이지만 이처럼 혼용되는 경우가 많다. 의거지 근처의 버스정거장에는 '석수체육공원.자동차학원.원태우지사의거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위 사진에서 표석 뒤로 보이는 곳이 서릿재 고개로, 그 아래로는 오늘날 석수역과 관악역 사이를 잇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이 다니고 있다. 근처에는 연현마을이 있다.
- 생전에 돌 절구와 맷돌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지사가 만들었던 돌절구 하나는 지금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현재 안양시 만안도서관에는 의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지금은 폐쇄된 디시위키에서는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점에서 야구를 했다면 에이스가 됐을 것이라는 드립을 쳤다.
[1]
이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
[2]
원성백계 평리공파 31세.(
족보(1)
족보(2)
족보(3))
[3]
1911년 당시 지적원도 참고.
안양역 바로 앞에 있다.
[4]
위키백과에는 7월 22일에 사망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정작 그 근거가 결여되어 있다.
[5]
그리고 공교롭게도 민족간의 비극이자 현재에도 진행중인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6.25 전쟁이 시작된 날이다.
[6]
안중근 의사의 의거보다 4년 더 빨랐다.
[7]
당시
수원에서
사냥을 한 후 서울로 올라오는데, 경부선이 안양을 지났다.
[8]
현재 안양시 석수동 고가도로 있는 방면. 석수 체육 공원 인근. 운전면허학원에서 길을 건너면 설명판이 조그맣게 하나 있다.
[9]
본 위키의
고문 항목을 참조해보면 왜 그렇게 됐는 지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해방 후 군사 정권 하에서도 이런 희생자가 많이 생겼다.
귀천 시(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로 유명한
천상병 시인도 누명을 쓰고 중정에서 고문을 당해 평생 고자가 되었다.
[10]
이 탓인지 그 시대 사람 치곤 자식이 하나밖에 없다.
[11]
일본 자신들이 조선을 식민 통치할 때 내부 원성이 대단하다는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는 꼴이 될 수있는 데다가, 그 당시 민중에 뿌리내린 반일 감정이 항일 투쟁으로도 이어질수 있기 때문. 게다가 당시에는 자기 나라의 초대 총리대신을 지낸 이토가 모욕을 당하거나 다쳤다면 일본 내부에 흉흉한 소문이 돌거나 문제가 복잡해 질 수 있다.
[12]
1905년
최익현을 체포할 당시에 헌병대장도 바로 이 사람이다.
[13]
첫째 동생의 생년이
1791년이므로.
[14]
아버지의 몰년이
1863년이므로.
[15]
족보상
1910년.
[16]
족보상
1952년.
[17]
기려수필에는 김태근(金台根)으로 기재되어 있다.
[18]
이는 본 문서 맨 위에 있는 안양역 입구의 부조는 물론 모든 조각상에서 똑같이 범한 오류이다.
[19]
다만 직계 후손은 아닌 듯 한데, 원태인 선수의 아버지인 원민구 씨가 원태우 지사 가계도에 없기 때문이다. 원태인 선수는 원태우 지사의 현손쯤 되는데, 나이 상 증손쯤 되어야 하는 원민구 씨가 증손에 올라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본관이 같을 뿐이라 보는 게 옳다. 참고로 쓰는 항렬자는 한자음만 같은 한자다. 둘 다 돌림자인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