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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04:09:02

원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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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
,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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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廟

1. 개요2. 역사3. 논란4. 후신5. 미디어에서

1. 개요

본래 종묘와는 구별되는 원묘(原廟)가 궁궐 내에서 운영되었다. 처음에는 혼전으로 운영되다가 원묘로 정착한 것이다.

2. 역사

원묘는 전한 혜제 때 소손통의 건의로 시조 이하 조상을 위하여 처음 건립되었다. 이후 중국의 왕조들도 원묘제를 이어갔다. 송나라 신종이 경령궁(景靈宮)에 원묘를 지었고, 명대에는 제왕의 가묘(家廟)로서 자금성 안에 봉선전(奉先殿)이라는 원묘를 설치하였다. 고려 때에는 송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궁궐의 북쪽에 원묘로 경령전(景靈殿)을 지었다.

조선의 원묘제는 본래 혼전으로부터 시작하였다. 1398년 경복궁 내에 신의왕후의 혼전인 인소전(仁昭殿)을 건립한 뒤 1408년 태조가 사망하자 태조의 신위도 인소전에 함께 봉안되었고, 이 때 전각 이름이 문소전이 되었다.

이어서 정종 정안왕후의 혼전인 인덕전(仁德殿)이 정종이 살던 인덕궁 내에, 태종 원경왕후의 혼전인 광효전(廣孝殿)이 생겼는데, 당시에는 3년상이 끝난 뒤에도 신어가 계속해서 남아 종묘와는 별도로 운영되며 궁궐 내의 종묘 역할을 하였다.

세종 대에 들어가서야 "한 세대마다 이렇게 혼전이 생기면 나중에 가서는 궁궐이 혼전으로 꽉 차겠다."는 의견이 나와서 1432년, 광효전을 문소전으로 합하고 경복궁에 봉성전(奉誠殿)을 건립하여 원묘로서 관리하였다.[1]

봉성전을 지을 때, 종묘처럼 비대해지지 못하도록 5칸으로 지어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도록 하였고, 태조의 자리를 고정시키고 남은 자리에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니까, 4개의 남은 자리는 한 명이 죽어서 봉성전에 들어가면 나머지 한 명의 신위는 치우는 방식으로 진행하도록 했다.[2]

봉성전으로 이름을 정하고 한 달 후 봉성전을 문소전(文昭殿)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진왜란까지 약 200여년은 원묘제가 유지가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문소전도 함께 불타 원묘제는 중단되고, 위패는 강화도로 모셨으나 재사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땅에 묻고, 신주는 종묘에 있는 것[3]만 사용하였다. 이렇게 원묘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3. 논란

중종 대에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들이 원묘제가 부당하니 폐지할 것을 아뢰었다. 또 조광조야? 그러나 원묘제는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명종이 죽은 뒤 인종과 명종이 형제 간이라 같은 사당에 나란히 넣기가 굉장히 애매해졌다. 이게 왜 문제냐면, 선조 입장에서는 사대봉사를 지내야 하니, 고조부인 덕종부터, 증조부인 성종, 조부인 중종, 양아버지 명종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중간에 인종이 끼어 있으니 고조부 덕종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세종이 5칸으로 못을 박아 더 넣을 공간은 없고, 그렇다고 인종을 빼자니 먼저 재위하신 분을 빼고 나중에 재위하신 분은 제사를 지내주는 셈이고, 그렇다고 명종을 빼자니 양아버지를 제사에서 빼는 건 도리가 아닌 애매한 상황이었으나, 그냥 덕종을 빼고 삼대봉사를 지내는 걸로 하였다.

4. 후신

이후 숙종때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선원전이 건립되었고 숙종 이후의 국왕들의 어진이 봉안되기 시작했다. 봉안되는 임금이 늘어날수록 건물이 증축되었고 최종적으로 고종때에는 경운궁 선원전을 세운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기존의 6칸이었던 경복궁, 창덕궁의 선원전도 태조의 어진을 모시기위해서 7칸으로 증축한뒤 칠묘제로 운영했다.[4]

5. 미디어에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왕이 어떤 방에 앉아 오래 전에 돌아가신 선왕이나 모후의 얼굴을 보면서 푸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조선 전기를 다룬 사극이면 문소전일 테고, 조선 후기를 다룬 사극이면 선원전일 것이다.
* KBS 드라마 왕과 비 87화에서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가 위독하자 세조가 문종의 위패 앞에서 의경세자를 살려달라 빌던 곳, 88화에서 결국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가 다시 와 문종 앞에서 노산군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외치던 곳이 문소전이다. 183화에서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하겠다는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던 인수대비가 밤 중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문소전으로 가자!"고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소전에 봉안된 세조-성종의 위패를 보고 엎드려 절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의 배경이 바로 문소전이다.

[1] 이 때 인덕전은 봉성전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정종은 정식 임금으로 인정되질 않았서였다. [2] 예를 들어 선조가 명종, 인종, 중종, 성종, 태조의 제사를 지내다가 선조가 죽어서 선조의 신위가 들어가면 성종의 신위를 치우고 광해군은 선조, 명종, 인종, 중종, 태조의 제사를 지내는 식이고 신위도 소목이라해서 중앙의 태조의 신위를 제외하고 소 2, 4 목 3, 5으로 배치했다. [3] 임진왜란 때 몽진하면서 종묘에 있는 신위는 챙겨갔었다. [4] 단 배치는 소목제가 아닌 종묘처럼 제사를 하는 쪽 기준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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