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46:16

웅진도독부

소백제에서 넘어옴
[[백제/역사|
파일:백제 군기.svg 파일:투명.png
백제의 역사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be673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008080; 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f5d2,#ccc4a8> 시대 국가
원삼국시대 마한 마한 백제국
십제 | 비류국
삼국시대 백제 한성백제 ( 위례성)
목지국 | 침미다례 | 건마국
웅진백제 ( 웅진성)
사비백제 ( 사비성 | 금마저)
삼국통일전쟁 웅진도독부
백제부흥운동
남북국시대 신라 장안국
후삼국시대 후백제
후고구려 | 신라 ( 후사벌국?)
고려시대 고려 백제부흥운동
왕족 및 주요 귀족 부여씨 | 대성팔족
}}}}}}}}}}}} ||



1. 개요2. 역사
2.1. 백제부흥운동?2.2. 건안성으로 옮겨진 후 발해에게 소멸되다
3. 구성4. 역대 웅진도독
4.1. 역대 대방군왕
5. 함께 보기

1. 개요

熊津都督府. 당나라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의 고토를 당나라 체제하에서 통치하고자 만든 행정 조직이다.

2. 역사

660년,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은 종전까지 5부(部) 37군(郡) 200성(城) 76만 호(戶)로 구성되어 있던 백제 땅을 다스리고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5개의 도독부를 세웠으며[1], 그중에서도 옛 백제의 수도권이었던 웅진, 즉 지금의 공주 지방에 세워진 웅진도독부가 5도독부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5도독부는 마치 현대 대한민국이 지정한 이북 5도처럼 명목상 설치한 것이었고, 실질적으로 당나라가 통치하는 것은 옛 백제 영토 중에서도 웅진, 사비의 도독부뿐이었다. 나머지 백제의 각 지방, 예를 들어 덕안(德安, 충남 논산시 일대로 비정) 등 여러 지역은 한국과 일본의 사료를 종합해 볼 때 백제 부흥군 잔존 세력이 지배하다가 일찍이 신라가 차지하고 있어 웅진도독부의 실제 통치력이 닿지 못하고 있다. 이후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하여 5도독부는 해체되고, 안동도호부 치하 웅진도독부가 백제를 통치하는 형태로 격하·재편되어 그 밑에 7주와 52현을 두었다.[2]

2.1. 백제부흥운동?

이렇게 새로 개편된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임명된 인물은 바로 의자왕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 그 이전에는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도독을 맡았었는데, 부여융이 도독으로 임명된 건 당연히 백제유민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서다. 웅진도독부 백제는 당의 지방통치체였으나 한편으로는 당의 괴뢰 위성국으로서나마 부활한 백제로서의 일면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당의 이민족 통치체제인 기미제도라 일컬으며 당시 백제뿐 아니라 서역 등 다른 곳에서도 활용하던 전략이었다. 이러한 성격으로 웅진도독 백제를 백제부흥운동의 한 범주에 포함시키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노선은 부여풍의 반당, 친일본적 성향 백제부흥운동과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었다. 당은 대놓고 배신당해 마지못해하는 신라의 힘까지 반강제로 빌려와 우격다짐으로 부여융의 친당 반신라적 백제부흥운동 노선을 옛 백제 유민과 신라 조정 모두에게 관철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백제부흥군을 비롯한 백제 유민이 너무나도 많이 죽어나가야 했기에 백제 유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때문에 백제 멸망 직후 수년간 벌어진 백제부흥운동 나당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통치는 말 그대로 형식적인 선에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신라 또한 사실상 백제가 당나라의 꼭두각시로서 부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크게 반발했고 나당전쟁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2. 건안성으로 옮겨진 후 발해에게 소멸되다

670년부터 문무왕은 대대적으로 백제의 고토를 공격해 당나라를 축출해내는데 성공함에 따라 웅진도독부는 철폐되고, 기구 자체는 백제와 별 관련이 없는 고구려의 옛 영토인 요동 지역의 건안성으로 명목상 옮겨진다. 이 과정에서 당나라는 하남 일대에 잠깐 사민했던 백제 유민 대부분을 다시 건안성으로 옮겨 부여융 휘하에 배치했으며, 이곳에서도 부여융은 백제 멸망 직후(660년) 당나라로 강제이주당한 백제계 유민들 약 1만 명을 통치했다. 당나라가 한반도 흡수의 전초기지 목적을 가지고 야심차게 출범시켰던 웅진도독부는 만주 내 백제 유민들의 자치기구 정도로 그 성격이 변하게 되지만, 이 웅진도독부는 뜻하지 않게 대조영의 발해에게 끝장나게 된다.

《신당서》와 《통전》 등을 보면 당이 684년 ~ 704년 어느 시기에 부여융의 손자 부여경을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봉했지만, 웅진도독부가 신라와 '발해말갈'에게 모두 잠식당해 없어져 형식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나와 있다. 여기서 '발해말갈'은 698년 건국된 발해니, 결국 건안성에 설치된 웅진도독부는 고왕 대조영이 통치하던 시기 발해군에게 공격당해 없어진 게 분명하다.[3][4] 당나라가 건안성에 웅진도독부를 옮긴 주된 이유는 백제인 병력을 당나라를 위해 활용하겠다는 것이었으니, 웅진도독부가 당나라의 의도대로 대조영의 고구려 부흥운동 진압에 동원되었다가 대조영의 군세에게 멸망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다만 웅진도독부 군사들이야 대조영에게 궤멸당했다 쳐도 사비성 함락 당시 끌려나왔던 이들인 그 나머지 유민들의 행방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소고구려가 설치될 때까지 있었으면 언급이 없었을 수가 없는데 그런 말 없는 걸로 봐선 전부 발해군에게 몰살당했거나,[5] 발해의 내지로 끌려가거나 둘 중 하나다. 다만 백제부흥군에게 나름 골탕을 많이 먹었던 신라마저도 백제부흥군을 가급적 죽이지 않고 신라 부대로 편성해서 같은 백제부흥군 진압에 활용하거나 나당전쟁 때 당나라와의 투쟁에 활용했던 전례를 봐선, 이 시기 대조영의 발해군이 한때 백제 왕성 사비성 출신의 애꿎은 양민들을 학살했을 가능성은 많이 낮다.

더군다나 발해와 백제는 서로 원한도 없을뿐더러 언어와 문화가 비슷했을 터, 가뜩이나 건국 초기 인구가 부족한 마당에 죽이는 헛수고를 할 이유가 없다. 구 백제 왕도 출신이자 당나라의 문화까지 경험한 이들을 발해에 동화시켜 인적 자원으로 활용했을 듯하다. 따라서 발해로 잡아 압송하고 사민했을 개연성이 더 높다. 이렇게 백제 유민 가운데 일부는 신생국 단계의 발해에 합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백제인 일부는 뿌리인 고구려로 다시 돌아간 셈이 되었다. 더 나아가면 발해 멸망 때 고려에 대규모로 유입된 발해 유민들 중 이들의 후손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돌고 돌아 다시 옛 백제 땅까지 돌아간 후손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3. 구성

현재의 지명에 비정하는 것은 거의 전부 추측이다.

4. 역대 웅진도독

이름 기간 비고
왕문도 660 ~ 661 당나라의 장수
유인원 661 ~ 663 당나라의 장수, 백제도호부 도호 겸직
유인궤 663 ~ 665 당나라의 장수
부여융 665 ~ 682 백제 왕족, 전(前) 백제 태자
부여경 690 ~ ? 백제 왕족, 부여융의 손자

4.1. 역대 대방군왕

대수 명칭 재위기간 비고
1대 대방군왕(帶方郡王) 부여융 660~676? 광록대부태상원외경(光祿大夫太常員外卿)
2대 대방군왕(帶方郡王) 부여경 690 부여융의 손자.
3대 백제대방왕[6] - ? 724년 봉선제에 참여
당의 내번지신[7]

5. 함께 보기


[1] 비슷하게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신라 땅에는 계림대도독부를 두었다. 단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멸망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계림대도독부가 당시의 신라 영토(한반도 중부지방과 영남)를 지배하지는 않았고, 당나라가 그냥 명목상 지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발해에도 명목상으로 홀한도독부가 설치되었다. [2] 웅진도호부 1개의 체제가 성립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물론 사비성에 도호부(학계에서는 사비성을 가리켜 백제부성(百濟府城)이라 표현한 기록을 바탕으로 편의상 백제도호부로 부르는 편)가 설치되고 예하 5도독부(웅진, 동명, 마한, 금련, 덕안)가 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워낙 기록이 적고 단편적이라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3]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발간 《백제 유민》편 참조 [4] 발해가 건국하자마자 요동의 동쪽끝에 가까운 건안성까지 세력을 투시하는게 조금 무리였음을 감안하면, 발해 건국 과정, 즉 이진충의 난 발발과 천문령 전투 승리 이후 동모산으로 계속 도주하는 과정에서 건안성을 공격하여 백제 유민들만 쏙 먹튀(...)하고 동모산으로 데려갔을 가능성도 있다. [5] 이쪽은 가능성이 떨어진다. 전근대 병기는 살상력이 그렇게 높지 않아서 근현대 전쟁사에서 있어왔던 대규모 학살은 물리적으로 힘들고 국력증강을 위해 이미 항복한 인력은 웬만해선 흡수하는 게 일반적이다. [6] 대방왕은 대방군왕이란 작위를 축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7] 당시 독립 세력으로 기록된 신라, 말갈, 일본과 달리 백제대장왕과 고려조선왕은 당나라에 종속된 신하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