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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6 11:13:41

움바르


<colbgcolor=#000000><colcolor=#FF0000> 레젠다리움의 지명
움바르
Umbar
<nopad> 파일:Turner_Mohan_-_Umbar.jpg
이름 Umbar
움바르
이명 City of the Corsairs
해적들의 도시
위치 하라드
건립 S.A. 2280
주요사건 아르파라존 사우론 포획
친족분쟁
유형 항구

1. 개요2. 역사
2.1. 누메노르의 정착지 시절2.2. 누메노르의 침몰 이후2.3. 친족분쟁2.4. 움바르의 해적2.5. 하라드림의 통치2.6. 반지전쟁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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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마릴리온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도시. 위치는 모르도르보다도 아래인 하라드 지역에 있다.

2. 역사

2.1. 누메노르의 정착지 시절

제2시대 누메노르는 대규모의 항해를 통해 가운데땅의 모든 해안을 탐사했고 가운데땅의 강들도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가운데땅 곳곳에는 누메노르의 정착촌이 건설되었는데, 처음에는 원주민들과 평화롭게 교류하며 누메노르 본섬과 무역도 하는 정도였지만, 이후 누메노르가 점점 타락하여 탐욕스러워지자 이 정착촌들은 점차 누메노르의 식민지로 바뀌게 되었다. 움바르는 이런 식민 도시들 중 가장 큰 규모의 도시 중 하나였다. 그리고 타르앙칼리몬의 통치시절인 2280년에 국왕파에 의해 움바르는 거대한 요새로 개건되었고, 가운데땅의 주요 항구로 발전한다.

누메노르의 타락이 가속화되었을 무렵, 움바르는 국왕파의 정착지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모르도르에 돌아온 사우론은 누메모르의 정착지들을 공격해 그곳들에 요새를 세우려 했지만 움바르는 이에 저항했다.

3261년에 누메노르의 황금왕 아르파라존이 당시 지상의 왕을 자처하던 사우론을 벌하기 위해 움바르에 상륙한다. 아르파라존은 깃발과 나팔을 들고 7일 동안 여행해 모르도르를 포위한다. 이때문에 움바르는 누메노르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곳으로 남아있었고, 후에 곤도르인들 역시 아르파라존의 업적을 자랑스러워하여 도시 중앙부에 세운 거대한 오벨리스크에는 사우론의 굴욕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 오벨리스크의 꼭대기에는 수정으로 만든 구가 있었는데 맑은 날에는 곤도르 연안이나 먼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우론이 돌아오고 움바르가 그의 손에 떨어지자 이 오벨리스크는 파괴되었다.

2.2. 누메노르의 침몰 이후

누메노르의 멸망 이후에도 움바르에는 많은 수의 검은 누메노르인들이 살고 있었고, 검은 누메노르인들의 중심지였다. 곤도르 건국 초기에는 아직 곤도르 휘하에 들어가지 않고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곤도르의 선박왕 에아르닐 1세 펠라르기르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해군을 모아 움바르를 포위하였고, 제3시대 933년 움바르를 점령한다. 이때 움바르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움바르의 검은 누메노르인 주민들은 국왕파의 후손으로 신실파 엘렌딜이 세운 곤도르를 증오해서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곤도르가 움바르를 점령한 후 움바르의 영주였던 검은 누메노르인은 움바르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움바르를 점령한지 불과 3년만인 936년에 에아르닐 1세는 움바르 앞바다에서 큰 폭풍을 만나 실종되고 만다.

에아르닐 1세의 아들 키랸딜의 통치 기간 동안 움바르에서 쫓겨난 검은 누메노르인 영주들은 하라드인 군대를 이끌고 와서 움바르를 포위했다. 1015년 키랸딜은 1015년 움바르 포위 공격 때 사망했다. 이후로도 하라드인들의 포위 공격은 수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곤도르의 해군이 강력했기 때문에 움바르는 함락되지 않았다. 키랸딜의 아들 키랴헤르는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키웠고, 1050년에 하르넨 강을 건너 마침내 하라드인들을 완전히 격파했다. 이 승리로 키랴헤르는 남부의 승리자라는 뜻의 햐르멘다킬 1세라는 이름을 얻었고, 하라드인들의 왕은 곤도르에 복종하게 되었다. 햐르멘다킬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곤도르의 영역은 남쪽으로 하르넨 강까지 확장되었고 하라드인의 왕의 아들들은 햐르멘다킬 1세의 궁정에서 인질로 살았다.

움바르가 곤도르에 점령된 이후 곤도르인들은 아르파라존 사우론을 굴복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움바르 곶의 가장 높은 언덕에 거대한 흰색 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햇빛과 달빛을 반사하는 수정 구슬을 장식했는데, 맑은 날씨에는 곤도르 해안이나 멀리 서쪽 바다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2.3. 친족분쟁

곤도르 발라카르 왕이 늙었을 때 남부에서는 그의 아들 엘다카르가 후계자인 것에 불만을 가진 일부 두네다인이 반란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엘다카르의 어머니는 두네다인이 아닌 북부인 비두가비아였고, 엘다카르 또한 곤도르 땅이 아닌 로바니온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1432년에 발라카르 왕이 사망하자 친족분쟁이라고 불리는 내전이 시작된다. 움바르와 펠라르기르의 주민들은 당시 왕족 중 가장 혈통적으로 순혈 두네다인이라 할수 있는 카스타미르 지지한다. 1437년에 카스타미르 엘다카르를 폐위시키고 본인이 왕위에 오른다. 엘다카르는 친족들이 있는 로바니온으로 후퇴하였고, 10년 후인 1447년에 자신을 따르는 북부인과 두네다인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에루이 건널목의 전투에서 카스타미르를 죽인다. 카스타미르의 아들들은 펠라르기르로 후퇴했고, 엘다카르는 펠라르기르를 포위한다.

2.4. 움바르의 해적

1448년, 카스타미르의 아들들은 펠라르기르에서 가능한 모든 군대를 모은 후 움바르로 도망쳤고 그곳에 독립적인 거점을 세운다. 이후 움바르는 지속적으로 곤도르를 공격하는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친족분쟁 이후 종종 왕에 대한 반역이나 음모 혐의를 받은 왕의 친족들 또한 움바르로 도망쳐 반군에 합류했다. 이 움바르는 완벽한 해적굴이 되어버렸다. 곤도르는 이 곳을 탈환하기 위해 번번히 공격해서 몇 번 점령했지만 곧 다시 빼앗기고 왕조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냥 내버려두게 된다. 가운데땅의 모든 해적들의 고향이며, 반지전쟁 당시 곤도르 남부 영지를 공격한 검은 해적단도 이곳 출신이다.

1540년에 알다미르 왕은 하라드와 움바르의 해적과의 전쟁에서 사망한다. 1551년에 알다미르의 아들 비냐리온이 하라드인과 움바르를 격파했고, 햐르멘다킬 2세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미나르딜의 시절, 카스타미르의 증손자이자 움바르 해적들의 지도자인 앙가마이테와 상가햔도는 밀정을 통해 미나르딜 펠라르기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634년 앙가마이테와 상가햔도가 이끄는 움바르의 해적은 안두인 대하 하구를 습격하여 펠라르기르에서 미나르딜을 살해했고, 해안을 황폐화시킨 뒤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도망쳤다.

미나르딜의 증조카인 텔루메흐타르 왕의 통치 기간 동안 해적들은 안팔라스까지 세력을 넓혀 습격했다. 텔루메흐타르는 군대를 모아 움바르를 습격하여 1810년에 해적들을 몰아냈고, 카스타미르의 마지막 후손은 그 전쟁 중에 사망했다. 이후 텔루메흐타르는 움바르의 승리자라는 뜻의 움바르다킬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2.5. 하라드림의 통치

키리온의 통치 기간 동안 움바르의 해적들은 곤도르의 해안을 공격했고, 2746년, 돌 암로스의 15대 대공이 움바르 해적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후 해적들은 대규모 함대를 준비했고, 2758년에 3개의 함대가 움바르에서 출항하여 곤도르 해안을 따라 여러 장소에 상륙했으며, 심지어 아이센 강 어귀와 레브누이 강 어귀에도 상륙했다. 그리고는 던랜드의 영주인 프레카[1]의 아들 울프가 이끄는 던랜드인들을 도왔고, 던랜드인들이 로한을 침공하는 동안 곤도르를 침공해 곤도르가 로한을 도울 수 없도록 한다. 2759년의 봄이 오기 전, 당시 곤도르의 섭정이던 베렌의 아들인 베레곤드가 하라드인들을 물리쳐 군대를 로한으로 보낼 수 있었고, 그 결과 던랜드인들은 로한과 아이센가드에서 물러나게 된다.

사우론이 귀환한 이후 움바르는 사우론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사우론의 굴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흰 기둥도 파괴된다.

2980년에 소롱길이라는 가명으로 당시 곤도르 섭정이던 엑셀리온 2세를 섬겼던 아라고른 2세는 소규모 함대를 모아 움바르를 밤에 기습해 대부분의 해적선을 불태우고 항구의 선장을 죽였다.

2.6. 반지전쟁 시기

반지전쟁 동안 움바르와 하라드인들은 길라인 강을 거슬러 린히르로 항해하여 강의 여울목을 방어하던 라메돈의 사람들과 싸웠다. 아라고른 2세 죽은 자들의 군대를 이끌고 린히르에 왔고, 겁에 질린 선원들은 모두 배 밖으로 뛰어내렸다. 일부는 강을 따라 탈출했으며, 작은 선박들은 대부분 불탔다. 아라고른은 나머지 배를 이끌고 레벤닌, 에시르 안두인, 라메돈의 군대를 모으고 안두인 대하를 따라 펠렌노르 평원으로 가 미나스 티리스 수성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반지전쟁 이후에는 엘렛사르 왕에게 복속되어 곤도르의 항구로 복귀한다.


[1] 당시 로한의 왕인 헬름을 모욕했다가 그의 주먹을 맞고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