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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1 02:48:45

우간다-탄자니아 전쟁


우간다-탄자니아 전쟁
Vita vya Uganda na Tanzania
Uganda–Tanzania War
파일:우간다-탄자니아 전쟁 전황 지도.png
기간
1978년 10월 9일 ~ 1979년 6월 3일
장소
탄자니아, 우간다
교전국 및 교전세력

[[우간다|]][[틀:국기|]][[틀:국기|]]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틀:국기|]][[틀:국기|]]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팔레스타인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사우디아라비아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탄자니아|]][[틀:국기|]][[틀:국기|]]
파일:우간다 국기.svg 우간다 국민해방전선

[[모잠비크|]][[틀:국기|]][[틀:국기|]]
파일:잠비아 국기.svg 잠비아
파일:앙골라 국기.svg 앙골라
파일:에티오피아 국기.svg 에티오피아
파일:알제리 국기.svg 알제리
지휘관

[[우간다|]][[틀:국기|]][[틀:국기|]] 이디 아민


[[우간다|]][[틀:국기|]][[틀:국기|]] 유수프 고원

[[우간다|]][[틀:국기|]][[틀:국기|]] 이삭 말리야문구

[[우간다|]][[틀:국기|]][[틀:국기|]] 알리 파둘
파일: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기.svg 무아마르 카다피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무틀라크 함단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마흐무드 다스

[[탄자니아|]][[틀:국기|]][[틀:국기|]] 줄리어스 니에레레


[[탄자니아|]][[틀:국기|]][[틀:국기|]] 압달라 트왈리포

[[탄자니아|]][[틀:국기|]][[틀:국기|]] 투마이니엘 키웰루

[[탄자니아|]][[틀:국기|]][[틀:국기|]] 데이비드 무수구리

[[우간다|]][[틀:국기|]][[틀:국기|]] 티토 오켈로

[[우간다|]][[틀:국기|]][[틀:국기|]] 데이비드 오이테오조크

[[우간다|]][[틀:국기|]][[틀:국기|]] 요웨리 무수베니
병력
우간다군: 20,000명
리비아군: 4,500명
팔레스타인군: 400명 이상
탄자니아군: 150,000명
우간다해방군: 2,000명
모잠비크군: 800명 이상
피해
탄자니아인 1,500명 사망
우간다인 500명 이상 사망
결과
탄자니아의 승리
이디 아민 축출
우간다 내전
1. 개요2. 전쟁의 원인3. 전개
3.1. 개전3.2. 결과
4. 종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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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8년 10월 9일부터 1979년 6월 7일까지 벌어진 우간다 탄자니아 사이의 전쟁. 우간다에서는 1979년 해방 전쟁이라 불리고, 탄자니아에서는 카게라 전쟁이라 부른다.

2. 전쟁의 원인

당시 우간다 이디 아민에 의한 독재 정권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서 국민들은 참혹한 학정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분노는 아민 정권에 의한 자나니 루움(Janani Luwum, 1922?~1977) 대주교 사망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고조되고 만다. 자나니 루움 대주교는 우간다 내부에서 존경받던 인물로, 영국 성공회 대주교로서 동아프리카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큰 종교인 중 한 명이었고, 당시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 콩고를 관할하고 있었다. 루움은 이디 아민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인물이었는데, 1977년 2월 16일에 총살된 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사인이 조작되었으며, 아민이 직접 총을 쏴 죽였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루움 주교의 암살 7개월 후인 1977년 9월 20일에 우간다에서는 당시까지 허용되던 32개의 기독교 종파 중 무려 27개가 금지되고 단 5개만이 종교 활동을 허락받게 되었다.

이디 아민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이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이디 아민은 탄자니아에 대한 침공을 개시한다.

3. 전개

3.1. 개전

1978년 10월, 이디 아민 정권은 탄자니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카게라 지역을 침공하였다. 참고로 탄자니아에 대한 첫 공격을 직접적으로 명령한 사람은 바로 주마 부타비카였다. 이디 아민은 우간다군이 탄자니아군을 이길 수 있다는 오판을 하였고, 당시 탄자니아에 망명 중인 밀턴 오보테 전 대통령을 잡으면 국내의 분노를 외부로 돌리고 정적도 없애는 일석이조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긴다면.

하지만 탄자니아군은 우간다군보다 체계적인 지휘 계통에다가 훈련도가 높았다. 또 우간다의 주력이던,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쓰고 나서 전 세계에 뿌린 낡아빠진 셔먼 전차보다 우수한 중국 59식 전차 62식 전차가 있었으며, 공군의 숙련도 역시 훨씬 높아 우간다의 중요 시설들을 정확히 타격하는 바람에 이디 아민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갈 지경이었다.[1] 애초 탄자니아의 국력이 우간다를 훨씬 상회했고 총 병력도 15만 명으로 2만에 불과한 우간다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즉 이디 아민은 자신의 독재 권력 유지 하나를 위해 맨땅에 해딩하는 무리수를 범한 것이었다.

그나마 이디 아민이 믿었던 뒷배인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군이 우간다를 지원했지만 오히려 C-130 수송기와 다수의 전투기 및 병력들까지 손실하면서 역으로 탄자니아군에게 패퇴해버렸다. 또한 오보테가 지휘하는 해방전선군이 우간다군에 맞서 게릴라를 하였다. 결국 우간다군은 이들의 협공에 패퇴하기 시작했고, 이디 아민은 당황하여 국민들에게 탄자니아군에게 저항하라는 국민 메시지를 내놓았지만 국민들은 되려 이들을 환영하였다.

3.2. 결과

결국 1979년 4월 11일 되려 탄자니아군과 우간다 국민해방전선의 반격에 수도인 캄팔라가 점령당한다.[2] 이에 아민은 4월 12일에 라디오 방송에서 " 캄팔라는 탄자니아의 군대에게 점령 당하지 않았다. 우간다의 군대가 여전히 캄팔라를 장악하고 있다."라는 거짓 연설을 한 후 곧바로 아내 4명과 30명이 넘는 자녀들을 데리고 리무진 5대의 호위를 받으며 헬리콥터를 타고 리비아로 도망쳤다. 아민은 도주하기 전에 수감된 죄수들 중 일부를 병사들에게 처형하게 했다고 했으며, 이날에는 아민의 비밀 경찰이던 SRB 요원들이 캄팔라를 탈출하기 전에 수용소에 수류탄을 던져 약 100명의 수감자를 살해하고는 대부분 탈출에 성공했다.


1979년 5월, 우간다 영내 리라에서 교전을 벌이는 탄자니아군. 리라는 이디 아민 충성파들이 장악한 마지막 지역이었다.


탄자니아 병사들을 환영하는 우간다 주민들

우간다 사람들은 탄자니아군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거리에서 축제를 벌이기까지 했으며[3], 8년간의 학정에 대한 원한을 푸는 듯이 정부 건물을 점령하고 유리창을 모두 깨부순 후 아민 정권 시절의 인사들 중 일부를 조리돌림하였을 정도였다. 참고로 우간다-탄자니아 전쟁을 실질적으로 일으키고 아민 치하에서 많은 권세를 누리며 스스로를 ' 반신'으로 일컬었을 정도였던 주마 부타비카는 캄팔라가 함락되기 직전에 이미 전투에서 사망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반 이스라엘적으로 뜻이 맞던 무아마르 카다피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기에 아민은 리비아를 떠나야 했다. 카다피 같은 독재자도 아민 같은 미치광이 학살자의 망명을 받아주기 싫어했을 것이다. 나중에는 이라크로 향했지만 거기에서도 사담 후세인 당시 이라크 대통령에게도 홀대를 받아 결국 이라크를 떠나 1979년 12월 이라크의 아랫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지막 망명지로 택했다. 여담으로 아민이 사우디 정부에게 망명을 신청할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보수적 이슬람 성직자들은 아민이 충실한 이슬람 신도가 아니라며 국왕에게 아민의 사우디 망명을 불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칼리드 사우디 국왕은 아민이 우간다의 대통령이었던 시절 이스라엘에게 맞섰다는 점 하나 때문에 망명을 수용해줬다고 한다.

처음에 아민은 제다의 한 호텔의 꼭대기의 2개 층을 통째로 빌려 썼는데, 망명 후에도 아민은 자신의 학정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 인터뷰에서 "우간다는 나를 필요로 한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4. 종전 이후

이 전쟁으로 인해 이디 아민은 정치적으로 축출되었고,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을 떠난다.

아민이 쫓겨난 후에도 아민의 추종자들은 우간다에서 반군으로 활동하며 아민의 사면과 대통령직 복귀를 외쳤는데, 아민은 이들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은 물론 1989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허가 없이 아들 1명을 데리고 위조한 여권을 가지고 자이르로 가 뻔뻔하게도 반군들을 동원해 우간다의 정권 재장악을 시도하려 했다.

물론 아민은 자이르에 도착하자마자 자이르 보안군에게 체포되었고, 이 사건이 발각되자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정권을 잃고 몰락했으면 조용히 망명객으로 지낼 것이지, 무슨 짓을 하는거냐?'라며 아민의 사우디 입국을 금지해버렸다. 한편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은 아민을 우간다로 인도하는 대신 세네갈로 추방했지만, 당시 세네갈의 압둘 디우프 대통령도 아민을 거부하여 아민을 다시 자이르로 송환시키면서 아민의 우간다 재장악 미수 사건으로 인해 당시 세네갈과 자이르,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 외교 갈등이 고조됐다.

그러다가 하산 2세 모로코 국왕이 아민에 대한 사우디 입국 금지령을 내렸던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당시 사우디 국왕을 설득시켰고 이에 파흐드 사우디 국왕은 하산 2세 모로코 국왕의 의견을 받아들여 아민에 대한 입국 금지령을 철회하면서 아민의 사우디 입국이 허용되었고, 이후 아민은 앞으로는 어떠한 정치와 군사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우디 정부가 내준 저택에서 살았다.

아민은 방이 15개나 있는 넓은 집에서[4] 한 달에 3만 달러의 연금을 받고 운전사와 하인을 고용한 채 아랍어를 공부하고 가라데 복싱을 배우거나 낚시를 즐기며 조용히 생활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민은 자연의 비아그라라며 하루에 40개 오렌지를 먹었기 때문에 당시 사우디 사람들로부터 붙은 별명이 'Dr. Jaffa'였다.[5]

1999년에 우간다의 '선데이 비전(Sunday Vision)'이라는 잡지가 망명한 아민과 겨우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에서 아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슬람교 알라 신에게 전념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나는 어떤 사람들과도 아무런 문제 없이 생활하고 있다. (중략)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우간다에서 고아가 된 여러 친척들에게 학비를 대주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것 또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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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비아 공군의 Tu-22 블라인더 폭격기가 우간다군을 지원하기 위해 탄자니아를 폭격했지만 중요 시설 파괴에는 실패할 정도로 명중률이 뒤떨어졌으며, 심지어 인접국인 부룬디에 폭탄을 투하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2] 이 사건은 2차대전 이후 한 아프리카 국가가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수도를 점령하고 그 국가의 국가 원수를 몰아낸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한다. [3] 여담으로 장 베델 보카사 모부투 세세 세코. 시아드 바레,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도 정권을 잃고 축출된 후 국민들이 아민의 축출 시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4] 다만 아민의 자식 수를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방 수가 많지는 않다. [5] 여기서 야파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위치한 도시로, 이곳에서 나는 오렌지가 명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