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6:54:54

용감한 형제

용형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용형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제카툰의 등장인물이자 굿즈제작자에 대한 내용은 일하는용형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대한민국의 TV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은 용감한 형사들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 로고.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소속 아티스트 ]
{{{#!wiki style="color:#1D1D1D; margin: -6px -1px -11px"
CEO / PRODUCER
용감한 형제
PRODUCER
차쿤 마부스 레드쿠키 JS
SINGER
파일:다크비 Urban Ride 로고.svg
DKB
파일:Candy Shop(아이돌) Girls Don't Cry 로고.svg
Candy Shop
}}}}}}}}} ||
<colbgcolor=#000><colcolor=#fff> 용감한 형제
Brave Brothers
파일:용형1.jpg
본명 강동철 (Kang Dong-chul)
출생 1979년 6월 7일 ([age(1979-06-07)]세)[1]
서울특별시 도봉구[2]
직업 작곡가, 프로듀서
가족 어머니[3], 형 강흑철(1975년생)[4]
반려견 뺀찌, 골드
학력 서라벌고등학교 (중퇴)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5]
소속사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 (대표, 메인 프로듀서)
별명 용형, 용버지, 용달프[6] / 힙콩즈 아빠[7]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작곡 목록4. 평가
4.1. 작곡가로서의 평가4.2.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로서의 평가
5.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Bravebrother2.jpg

대한민국 작곡가, 프로듀서. 본인이 설립한 연예 기획사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총괄 프로듀서이다.

2. 생애

어린 시절에는 상당한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장남이자 형인 강흑철만 편애하고 자신은 계속 푸대접하는 바람에, 성장하면서 많은 방황을 했다.[8] 학교 일진에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라 고등학생 때 정통파 조폭에 들어가서 활동했다고 하니, 단순한 불량 학생 출신의 연예인들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며 정말 끔찍한 조직 범죄자들의 세계[9]에서 위험하고 거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무릎팍도사에서 유세윤이 첨언하기를, 그가 살던 지역 부근에선 그의 폭력에 대한 공포의 소문으로 유명했다고. 결국 17살에 수갑을 차고 구치소에 수감당했으며, 2달 반 정도 살고 나와서 2년 6개월의 보호관찰을 받았다. 그 당시 폭력 전과 12범에 룸살롱 전무까지 했다고 한다.[10]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관리하던 유흥업소의 DJ하는 동생이 가져온 사이프러스 힐 CD를 듣고 조폭 생활을 청산하고 음악을 하고 싶다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본인이 말하길, "조폭 생활이 너무 끔찍해서 그 시절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작곡을 시작한 이후로 그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다." 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게 음악을 해 보기로 결심하고 뛰쳐나온 그는 바로 다음날 낙원상가로 찾아갔고, 거기서 무작정 어떻게 비트를 찍어야 되냐 물어봐 가며 음악 장비들을 사와[11] 처음 비트를 찍기 시작했다. 정말 생 초짜다 보니 시퀀서에 소리 넣는 법만 2~3주가 걸렸다고. 그렇게 음악을 시작한 후 1998년 현대방송에서 주최한 오디션에서 싱어송라이터 부분 금상을 받기도 하고 모 기획사에 연습생으로도 들어갔는데 자신은 그냥 가수가 아니라 미국의 힙합하는 친구들처럼 되고 싶어서 얼마못가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친형 강흑철[12]과 함께 데뷔를 목표로 6개월 간 골방에서 곡을 만든 뒤 그 중 9곡 정도 추려서 당시 힙합하는 회사 중 가장 큰 회사였던 YG엔터테인먼트 법규를 날리는 손사진과 전화번호만 딱 적은 데모 CD를 던졌고 이를 들은 양현석이 그대로 뻑가서 바로 캐스팅되었다.[13] 그러나 작업한 곡의 가사가 너무 쎄고 적나라하여 수정만 하다가 2년이 훌쩍 지나 어느새 유행과 동떨어진, 철지난 음악이 되어 버렸고 YG 측에서도 이제 좀 힘들 것 같다고 난색을 표해 화가 나서 잠수를 타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절치부심하여 당시 유행하던 클럽튠 음악을 새로 쭉 만들어 가지고 돌아왔는데[14] 이를 들은 양현석이 깜짝 놀라며 "넌 프로듀서로서 재능이 더 있는 것 같다. 다른 가수에게 곡을 주면 어떻겠냐"고 권유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프로듀서로 전향하게 된다. 형 강흑철은 동생이 먼저 프로듀서로 전향한 후에도 Black Soul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데뷔 준비를 하다가, 지금은 동생 회사로 들어가서 일하고 있다.



빅뱅의 ' 거짓말' 편곡, ' 마지막 인사' 작곡 및 편곡을 맡아 대박을 친 후 독립하여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를 세웠다. 독립 후에도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어쩌다', 손담비의 ' 미쳤어' 등이 성공하며 트렌드 작곡가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특유의 강한 전자음과 후크송이라 불리는 비슷한 곡 전개로 인해, 비판도 많이 받는 것이 사실이다. 정식으로 음악 수업을 받은 적이 없어서 아직도 코드가 뭔지도 잘 모른다고. 그냥 드럼 비트부터 찍은 후 자기 귀에 맞는 코드와 신스를 올리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실제로 용감한 형제의 곡으로 활동한 그룹들은 대부분 히트에 성공했다. 특히 걸그룹이나 여성 솔로 가수와 용형의 조합은 대다수 히트했다. 브라운아이드걸스 손담비, 애프터스쿨, 씨스타, 포미닛, AOA, 선미 등. 오죽했으면 그 당시 대박친 곡들의 대다수는 용감한 형제의 곡들이 다수였다.[15] 반면 남자 가수는 빅뱅과 틴탑 정도를 제외하고, 빅스타 등은 실패했다.

2009년 8월에는 개인 디지털 싱글 <Attitude>를 출시했다. 타이틀 곡은 'Invisible'. 물론 이것도 후크송. 당시 2번 트랙인 Brave Sound가 선공개 되었는데, 전 소속사인 YG를 겨냥한 가사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2010년 8월, 박재범, DJ DOC, 현아, B2K 등이 참여한 새로운 정규 앨범 The Classic을 발매했다.

2011년 무릎팍도사 출연으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 후에는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시즌 3와 달빛 프린스에도 출연했다.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해서 밝힌 바로는 2008년 본격 데뷔 후 당시까지 50억 원을 벌었다고 한다.


2011년 씨스타의 So Cool (쏘쿨)이 멜론 연간 5위를, 2012년 씨스타의 나혼자 (Alone)가 멜론 연간 2위, 2013년 씨스타의 있다 없으니까 (Gone Not Around Any Longer)가 멜론 연간 10위를 하는 초대박을 내며 작곡가의 명성을 더 알리게 되었다.

2013년 삼성전자의 Allshare 광고의 악곡 Allshare star - DJ Spider를 작곡했다. 또한 오랜만에 자신의 프로젝트 곡인 '어이없네'를 공개했는데, 논란이 많다. 아래 비판 부분 참조.

2015년 7월, AOA 차트 성공에 가장 큰 공로자로 평가받고 멤버들이 방송에서 인정도 하면서 다시 한 번 최고의 작곡자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 진출한다. YG를 겨냥한 노골적인 언론플레이를 자주 했는데 공교롭게도 래퍼가 동명의 미국인 YG.

2016년 3월 11일에는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여 소녀 같은 감성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16]

3. 작곡 목록

KBS에 소개된 용감한 형제 작사 & 작곡 노래 모음

상술했듯 초창기엔 YG에서만 곡을 남겼는데, 특히 마스타우 2집의 세련된 곡들 상당수가 용감한 형제의 작품. (galaxy, 서울 등)

본인이 YG소속이었기 때문에 참여곡은 모두 YG로 귀속된다.

목록 [ 펼치기 · 접기 ]
외 다수

4. 평가

4.1. 작곡가로서의 평가

그의 스타일이 확립된 때는 렉시의 하늘위로 rmx 시점이라는 견해가 많다. 팀벌랜드식의 쪼개기에 한국식 '뽕끼'가 섞여, 화성 진행보다 리듬 구성과 신디 음색에 초점을 맞추는 형태는 조영수 류의 소몰이 멜로디에 지친 대중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여기에 당시 빌보드에서 핫한 오토튠을 버무린 편곡과 보이스디렉팅 등 나름 최신 트렌트를 시도하려고 했다.

이러한 스타일은 한참 K-POP 태동기였던 2000년대 후반 상황과 맞물려 크게 인기를 끌었다. 미국 본토에서 유행하던 팀버랜드 비트 + 티페인발 오토튠 보이스를 적절히 한국식으로 변형한 그의 사운드는 퀄리티의 높고 낮음을 떠나 꽤 신선했다. 멜로디보다 리듬과 훅이 주도하고, 사운드의 빈약함을 신디사이저와 오토튠으로 커버하는 이런 스타일은 당시엔 후크송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꽤나 큰 파급력을 보였다. 이 당시 용감한 형제는 거의 분기마다 3~4곡씩 히트곡을 뽑아냈을 정도로 활동량이 왕성했다. 특히 애프터스쿨, 씨스타, AOA의 많은 디스코그래피를 그가 만들어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수준.

그러나 이런 스타일이 2010년 중반까지 계속 반복되다 보니 결국 매너리즘이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애초에 용감한 형제 본인도 기본기보다는 타고난 감각으로 훅을 만드는 데에 강한 편이라, 작업물의 기복이 꽤 있는 편이었다. 거기다 점점 고퀄리티를 추구하던 당시 K-POP 생태계에서는 더 이상 자극적인 훅만 가지고는 살아남기가 힘들어지게 변한 탓도 있었다. 당시 K-POP 업계는 아예 미국, 유럽 현지 작곡가들의 송라이팅 캠프나 작곡가 팀으로부터 노래를 받는 등 좀 더 체계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자연히 용감한 형제의 주먹구구 방식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용형의 작업 방식 자체가 모든 작업을 야마하 모티프 하나로만 했을 정도로 귀차니즘의 소유자였다. 더는 새로운 소리가 안나와서 신디사이저를 샀다고 하니 그나마 요즘은 협업도 많이 해서 조금씩 색깔을 다양하게 꾸려가는 중이다.

결국 2015년 심쿵해 이후로는 커리어가 완전히 하향세를 타고 있었고, 트렌드에서도 밀려나며 슬럼프에 빠졌다. 여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프로듀싱하던 가수들도 영 성적이 시원찮은 탓에 "프로듀싱은 아닌 것 같다" 와 같은 반응들이 많았다. 게다가 국내에서의 하향세로 용감한 형제 본인도 국내보다는 해외 시장 개척에 좀 더 집중했다보니, 자연히 눈에 보이는 활동량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2019년 박봄의 솔로곡으로 중박을 내며 아직 감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이전에는 안 하던 트로피컬 하우스 시티팝 장르에 도전하는 등 본인도 어느정도 자신의 매너리즘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특히 운전만해 같은 경우는 사실상 이전의 용감한 형제의 테이스트와 완전히 다른 노래로 모르는 사람은 용감한 형제 노래라는 걸 알아채기 힘들 정도.[27] 운전만해는 들어보면 80년대 일본을 강타한 전설의 명곡 타케우치 마리야 Plastic Love와 굉장히 흡사하다 운전만해와 Plastic Love도 식어버린 사랑을 노래하는 것과도 나름 일치한 부분이다.

어찌했건 저찌했건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중후반까지 나름 긴 시간 동안 여러 노래들을 히트시켰다는 점은 분명히 인정받아 마땅한 일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화성학 전공자들조차 대중들을 사로잡는 히트곡을 만들기란 어려운 점인데, 학창시절에 방황하느라 음악을 심도 있게 공부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여러 노래들을 히트시켰다는 점은 작곡가로서 타고난 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만 해도 리스너들 사이에서 뽕끼와 전자음으로 도배되고 화성학적으로 치밀하지 못했던 용감한 형제의 곡을 까는 것이 일종의 '힙'하게 받아들여졌지만, 2010년대에 들며 K-POP이 글로벌화되면서 오히려 용감한형제의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4대 기획사의 규모가 커지며 외국 작곡가로부터 직접 곡을 공수받거나 합작하는 경우가 늘었는데, 빌보드나 유럽의 최신 트렌드를 좇아가는 이른바 '세련된 곡'이 취향이 아닌 사람들에게 용감한형제 특유의 뽕끼가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손담비, 씨스타, 빅뱅, 브아걸의 어쩌다 등을 듣고 자란 이들이 지금 문화 소비를 이끄는 2030이 되어있기도 하고. 대중 음악이라는 것이 개인의 취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오랜 활동으로 결국 자신만의 사운드를 구축한 것은 칭찬받을만 하다.

아이돌 팝으로 전향했지만 힙합에 등장하는 갱스터의 음악인으로서의 전향과 허슬을 실제로 실현한 예. 누구의 도움 없이 순전히 수백 번 미디를 일일이 찍어가며 감각을 익혔고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화성과 코드도 모른다고 하지만 용형이 작곡한 발라드곡의 진행을 봐도, 피아노 루프 위주의 곡들을 봐도 재즈, 클래식 수준의 화성학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지 어느 정도 감으로 구성과 진행은 아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리듬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드럼 질감을 뽑아내는 능력은 기본 이론도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작곡가/프로듀서로 정점을 찍을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능력이다. 과거 인터뷰에서는 Cakewalk DAW와 야마하 모티프 신스만 쓴다고 하였는데 시간이 오래 되어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작업실에도 주노, 크로노스 등 다양한 신디사이저와 모듈을 구비해놓고 있다. 그래도 케이크워크는 지금도 애용하는 듯하다.

화려한 과거와 그 무서운 인상에 묻힌 감이 매우 크지만 생각해보면 작곡가로 유명세를 탄 지 15년이 되었고 이제는 가수들을 키우는 소속사 사장이라는 책임이 막중한 위치에 있음에도 사생활이나 업무 윤리로 인한 구설수가 거의 없는 것도 매우 호평할 만한 일이다.[28] 김창환 소속 가수 폭력, 양현석의 범죄 연루 논란, 박진영의 과한 언플과 주입식 교육, 이수만의 연달은 소속 가수들의 계약 분쟁이나 자살, 그 외에 수많은 작곡가( 방시혁, 신사동호랭이, 조영수 등)들이 겪는 표절 논란 등의 문제가 아직 용감한 형제한테서는 나오지 않았다.[29] 브레이브걸스의 기적적인 성공담에서 그의 장점들이 모두 드러나는데 곡을 역대급으로 뽑았을 뿐만 아니라 멤버들 역시 마이더스의 손 수준[30]으로 고른 것이 결국 늦게나마 빛을 봤다. 그저 띄워주는 능력이 부족했을 뿐 롤린 같은 끝판왕급의 청량함을 자랑하는 노래로 보기 거북한 다크 섹시 컨셉을 해야 했으면 말 다한 거다.[31]

그리고 2019년에 만든 박봄의 '봄'이 상위권에 안착하면서 오랜만에 히트곡을 하나 배출해 냈다.[32] 또 2020년 상반기에는 자신이 이끄는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의 새 보이그룹인 다크비를 공개하는 등 인재 발굴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성과를 냈고, 2020년 하반기에는 숨듣명이 유행하면서 그가 만든 제국의아이들 후유증, 유키스 만만하니 등의 노래가 언급되면서 재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33] 여기에 2021년 3월에는 브레이브걸스 롤린이 대대적으로 역주행하면서 작곡가인 용감한 형제의 능력과 소속사 대표로서의 선견지명 또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물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닌데 씨스타의 '니까짓게', 파이브돌스의 '입술자국', 애프터스쿨 레드의 '밤하늘에', 포미닛의 '물좋아' 같이 거의 똑같은 분위기의 곡들이 많다. 작곡가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창작에는 한계도 있고, 제작자가 기존의 히트곡처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하는 등 여러 이유가 있다. 용감한 형제 이전에는 조영수/ 김도훈/민명기식 소몰이창법 미디엄템포곡들이 이런 식으로 그 노래가 그 노래같다고 까였다. 이 소몰이에서 댄스로 대중가요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댄스곡의 폭발적인 수요가 생기면서 용감한 형제의 폭발적인 수요까지 겹쳐져 특히 이 현상이 심했다. 심지어 유튜브에 마지막 배드 스텝이라는 이름으로 빅뱅의 '마지막 인사', 손담비의 ' Bad Boy', 배틀의 'step by step'을 믹스한 곡이 올려졌는데 마치 원래 한 곡인 듯하다.
마지막 인사+ Bad Boy

노래의 처음 혹은 끝부분에 'Brave Sound'라는 고정된 전자음 시그니처 사운드가 삽입된 것도 반감의 이유. 그래서, 최근에는 고정된 전자음 대신 곡 도입부마다 달리 삽입하는 자연스러운 보컬이나 랩으로 형식을 바꾸게 된다. '누구누구 & 브레이브 사운드'[34]

2010년 9월에 발표한 첫 번째 정규 앨범 3번째 티져 돌아돌아에서는 박진영, 방시혁, 조영수, 신사동호랭이를 디스해 물의를 빚었다. 사실 가사를 보면 쌍욕이 들어가긴 하는데, 열거한 작곡가들에게 하는 말이라기 보단 자신의 음악을 낮잡아보는 이들에게 하는 욕설과 디스에 가깝다. 어그로를 끌기 위해 별 상관없는 유명한 작곡가들 이름을 넣어 소위 '머리채를 잡은' 경우인데, 당연히 뜬금포로 디스당한 작곡가들이 유쾌할린 없다. 내용은 대충 '내 음악 욕하는 놈들 좆까라, 박진영/방시혁/조영수/신사동호랭이도 이젠(아직) 내 상대가 아니다, 내가 최고다'식이다.

이에 당시 연습생 신분이던 RM Supreme Boi, 아이언이 방시혁을 대신해 방탄소년단[35]이란 이름으로 <훅가요>라는 곡을 통해 맞디스했다. 펀치라인이나 곡 자체를 놓고 봐도 방탄소년단의 판정승. 반면 신사동호랭이는 izm 인터뷰에서 ' 상업적 노림수가 있다면 반대지만, 그게 아니라면 멋있는 거 같아요'라면서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용감한형제 본인은 "박진영, 방시혁 형은 불쾌해하셨고 조영수 형은 그냥 허허 웃으셨고, 신사동호랭이는 무서워 했다더라'라고 언급하며, '그냥 욕을 한 건 아니다. 곡 전체를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작곡가로써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모조리 다 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야 어그로 끌려고 상관없는 내용에 안 넣었어도 될 '박진영/방시혁/조영수 퇴물됐다'는 가⁸사를 썼으니, 아주 직접 저격해 까내린 내용은 아니라 뭐라 하기도 그런 상황이었다. 이 이후로도 5년여간은 용감한형제가 히트곡을 줄줄이 뽑아냈기 때문에 크게 비판받지는 않았는데, 2017년경부터 방탄소년단이 해외에서 크게 성공하면서 RM과의 디스전이 재발굴되고 마침 용형도 전성기가 지나 예전만 못한 실적을 보여주고 있어서 호되게 까이고 있다.

4.2.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로서의 평가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
,
,
,
,
,

작곡가로서의 용감한 형제만이었다면 비록 음악 스타일에 호불호가 갈릴 지언정 작곡 능력 하나만은 뛰어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었겠지만 대표이사 용감한 형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아래에 후술할 문제점들 때문에 한동안 피어레스 팬덤과 브레이브걸스 마이너 갤러리 유저들에게 용감한 형제는 사실상 과거의 안좋았던 일들과 엮어서 용가놈, 졸렬한 형제, 비겁한 형제, 닉값 못하는 놈, 용버러지, 양아치 근성, 가오충이라는 조롱성 별명, 소위 말하자면 멸칭이 더 많이 불려지고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으로 많아질 만큼 대표이사로서의 용감한 형제는 이미지가 상당히 나쁘다.[36] 즉,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도 DSP미디어, FNC엔터테인먼트와 비슷한 수준의 3류 기획사란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인 셈이다.

사실 용감한 형제 본인도 회사를 경영하고 조직을 굴리는 과정은 배우고 있는 단계라고 2016년 나 혼자 산다에서 언급한 바 있긴 했으나 2021년 중반까지도 나아진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특히 팬들이 문제시하는 점은 이 소속사가 용감한 형제의 지인, 인맥 위주로 돌아가는 가족 경영으로 꾸려나가고 있다는 점에 있는데 회사가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선 제아무리 지인일지라도 능력이 없으면 눈물을 머금고 구조 조정을 감행하든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어떻게든 가능성이 엿보일텐데 그러지 못하고 오랫동안 제 식구 감싸기, 돌려막기 식으로 운영하다보니 이곳저곳에서 구멍이 숭숭 뚫려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이게 가장 잘 드러난 일이 바로 2021년 7월 15일, 브레이브걸스의 광고 촬영 현장에 들어온 특정 유튜버 관련 사건인데 이 사건은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있다. 어쨌든 이 사건에 대하여 소속사 측에서 잘못을 했으면 대표라도 나와서 한 마디를 거들든가 사후 조치를 취하든지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침묵만 꾹 유지하는 모습에 팬들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이걸로도 모자라서 브레이브걸스의 팬매니저가 팬들을 상대로 갑질을 시전했단 제보까지 나오자 팬덤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이 사건 이전에도 회사를 이런 식으로 운영해도 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소속 가수와의 소통이 정말 부실하고, 굿즈나 SNS 및 유튜브 관련 처리도 미흡한 데다 마케팅 전략도 심각한 수준이라 브레이브걸스가 무명 가수 생활을 오랫동안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간다라는 반응도 매우 많다. 특히 다크비 브레이브걸스와의 대우 수준이 천지차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브레이브걸스 팬덤 사이에선 분노가 폭발하였으며, '사실 브레이브걸스가 롤린/역주행으로 인기가 빵 터지니까 그제서야 관심 주는 척 이미지 메이킹 한 거 아니었냐?' 란 반응까지 나왔다.

브레이브걸스뿐만이 아니라 빅스타나 조하 등 다른 가수들에게도 비슷한 수준의 대우와 부실한 능력을 보여줬기에, 오죽했으면 사무엘(가수)이 용형을 상대로 사기죄로 고소하겠단 말이 나왔겠냐는 동정 여론도 생기고 있는 마당이다.

이 와중에 2019년 브레이브걸스의 전 멤버 예진이 밝힌 탈퇴 이유가 다시금 팬덤 사이에서 떠오른 적이 있었는데, 당시 로드매니저의 위험천만한 운전습관 때문에 이를 알게된 예진의 집에서 항의를 했으나, 회사의 경영 방식에 신경을 끄라는 식의 대응을 했었다. 이에 예진은 브레이브걸스를 탈퇴했다고 한다.[37]

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용감한 형제는 침묵을 유지했었으며, 나중에 브레이브걸스가 소속사를 대신해서 사과 발표 및 CGV 팬미팅 홍보에만 신경쓰게끔 하는 것으로 보이는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시켰다는 의혹까지 나오면서 팬덤과 용감한 형제와의 갈등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2021년 7월 23일, 소속사의 부사장이 직접 그동안 있었던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발표한 후 갑질한 팬매니저 해고 및 새로운 팬매니저를 고용해서 브레이브걸스 공식 유튜브 컨텐츠도 자주 업로드시키고 용감한 형제 본인도 브레이브걸스의 후속 리패키지 앨범인 After 'We Ride'의 새 타이틀 곡 작업과 나머지 곡의 편곡 작업을 했다는 발표를 하는 등 이전보다 훨씬 나아진 소속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난 후엔 용감한 형제에 대한 조롱성 발언은 거의 없어졌으나 이미지는 여전히 '용가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정적인 평가만 있는 건 아니다. 2011년에 데뷔한 브레이브걸스가 유명해지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탈퇴와 교체가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룹을 해체하는 일 한번도 없이 10년 가까이 숙식을 ⁷ㅑ전부 제공해주고, 멤버들이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걸 알고 1년 동안 개인 돈으로 용돈을 지급해주면서 앨범까지 만들어줬다는 게 밝혀지면서 감동을 받은 팬들이 많아졌다.

사실상 적자나 다름없는 수입을 받는 군 부대 위문공연도 군인들이 브레이브걸스를 추켜세워주며 열광하고 멤버들도 그 때문에 행복해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위문열차 스케줄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내보내주기도 했다. 자신 역시 군 부대 공연에서 즐거워하는 브레이브걸스의 모습을 계속 보고 싶어하기도 했었고, 또한, 브레이브걸스에게 어떻게든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시켜보겠다고 용형 자신이 직접 방송국을 찾아가 5~6시간 기다린 끝에 PD를 만나 음료수 돌리면서까지 사정사정 얘기했다고 밝힌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서 속터지고 운 적도 많았다고. 용형이 PD를 오라가라 할 클래스까진 아니어도, 브브걸만 아니었으면 본인이 저렇게 장시간 기다려가며 아쉬워할 이유도 없는 사람이다.

다른 소속사들이 대세 아이돌 그룹이나 솔로 가수한테도 앨범을 제때 발매해주지 않는다든지 13년 계약으로 가수를 혹사시키거나 정산도 잘 안해주고, 심지어 정상적으로 활동 중인 아이돌 그룹을 사실상 아무런 이유없이 계약 해지 통보를 때리는 등의 행보를 보여줬던 것과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모습이며, 무명이었던 가수들에게 이 정도의 여건을 계속 마련해준 용감한 형제의 행동은 말 그대로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혼자 산다에서 브레이브걸스에게 식단 관리에 대해서 한 소리를 할 때도 '나는 상관없어, 너네들은 항상 예쁘니까. 내 새끼들이니까. 활동할 때까지만이라도 조금만 참고 나중에 많이 먹어. (그땐) 아예 내가 연습실에다가 먹을 거로 가득 채워줄게.'라고 말했고, 민영이나 유나가 그룹을 해체하고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는 얘기를 용감한 형제에게 편지 등으로 전달했을 때도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으니까 브레이브걸스 니네들을 데리고 온 건데 어떻게 너희한테 다른 일을 하라고 말할 수 있겠냐.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며 일부러 읽씹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소속 가수들을 평상시에 어떤 마인드로 대했는 지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 브레이브걸스 역시 자신들을 끝까지 믿고 버텨준 용감한 형제 사장님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어버이날에 카네이션 꽃다발을 전해주기도 했다. 비단 브레이브걸스만이 아니라 사무엘도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꾸준히 케어해줬으며, 다크비 또한 사소한 부분까지 모니터링을 많이 해준다고 한다. 실제로, 중소 기획사 출신 전 아이돌들은 브레이브걸스의 성공 요인에 대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준 제작자가 있었다는 점부터 지적할 정도. 제작자들이 자신이 프로듀싱한 가수를 자식같이 여긴다고는 하지만, 용감한형제 정도로 끝까지 믿고 음반을 내주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물론 용형 본인이 부유한 프로듀서이기에 그럴만한 경제적 여력이 있었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다고 그룹 유지비가 한두푼 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응이 없으면 나이는 먹어가지, 수입은 없는 아이돌 본인들이 먼저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제작자 입장에서도 유지비만 들 바에야 차라리 어리고 젊은 아이돌을 새로 데뷔시키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브레이브걸스가 그룹을 유지하며 성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던 배경에는 용형 본인의 박애에 가까운 애정이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장점과 단점은 공통적으로 과하게 온정주의적인 성격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각종 사고 친 직원을 처벌하지 않는 것, 낮은 성과를 보여준 내부 인원/대행사들과 끝까지 같이 가는 것은 손익계산, 사업 수완이 필요한 대표로서는 냉정함과 단호함이 부족한 미흡한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점 때문에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성과를 내지 못한 걸그룹을 해체하지 않고 안고 가서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탄생시켰다는 점도 아이러니하다. 결국 용감한 형제의 온정주의적인 성격은 양날의 검과도 같으며, 그동안 겪었던 불황과 브레이브걸스의 기적적인 역주행 모두 다 그의 지분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5. 여담



[1] 음력 1979년 5월 13일, 네이버 인물 다음 인물, 인스타그램 2021년 6월 22일은 음력 5월 13일 [2] 서울특별시 노원구 [3] 아버지는 2021년 5월 26일에 별세하였다. [4] 원래는 이 친형과 같이 용감한 형제로 활동했다. "용감한 형제"라는 이름 자체가 두 사람이 팀이라서 그렇게 지은 것. [5] # # 강남구 선정릉역 인근 현대교회에서 형과 함께 집사로 재직하고 있다. 2021년에 나 혼자 산다에 출연했을 때도 어머니와 함께 본가 인근의 상봉장로교회로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는 장면이 나왔다. # [6] 롤린/역주행 직후 방송 상에서 브레이브걸스나 다른 연예인들이 용감한 형제에 대한 미담을 얘기하면서 생긴 긍정적인 반응으로 얻은 별명. 최근의 사태로 브레이브걸스 마이너 갤러리 유저들이 용감한 형제를 더 이상 용버지라 부르지 않고 있는 상황과는 다르게, 저 소식을 자세히 모르는 나머지 대중들의 인식에는 여전히 용버지의 이미지가 자리잡은 상태며, 브레이브걸스 멤버들도 자기 사장님이 회사가 안 좋은 상황에서 어쨌든 자신들을 지원해주고자 여러번 애를 써줬던 것은 사실이라서 개인적인 호감에 관계없이 여전히 사장님을 <제2의 아버지> 같은 인물이라 보고 있는 편이다. [7] 2021년 7월 15일 사건이 터진 이후 미흡한 대처 방식 및 이제까지 드러났던 미숙한 회사 운영 방식을 두고 브레이브걸스 마이너 갤러리를 중심으로 용감한 형제를 한동안 조롱하며 빗댔었던 말. 7월 23일에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의 부사장이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후속 조치를 밟고 있는 이후엔 이러한 조롱성 발언은 거의 없어졌으나 아직까지는 용감한 형제에 대해서 호감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더 악랄한 멸칭으로는 조폭, 양아치, 전과12범, 깡패 등이 있다. [8] 형 강흑철은 이에 대해서 어릴 때 자신만 사랑받고 자란 것 같아서 지금까지도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강동철 본인은 철이 없던 시절에는 형을 싫어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무명 생활 때 형이 아르바이트나 집안생활을 도맡아 본인이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준 형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9] 방송에서도 그 시절은 지금 돌이켜 봐도 너무 끔찍해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10] 활동 초창기에는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려해 클럽 DJ라고 말했으나 KBS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나와 다른 어두운 과거와 함께 고백했다. [11] 당시에 아무것도 몰라서 사기도 많이 당했다고 한다. [12] 원래는 형이 (간단히 드럼만 찍는 수준이었지만) 먼저 비트를 찍었는데 입대를 하게 되어 결국 본인이 맨땅에 헤딩 식으로 배워 비트를 찍고 이후 형은 작사를 담당했다고 한다. [13] 처음 연락이 왔을 때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하여 "외모 보고 뽑으려는 거면 안 할래요"하고 그냥 끊었다고 한다. 근데 다시 연락이 와서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아야 될 거 아니냐, 양사장님이 궁금해 하니 아무렇게나 찍어달라"고 설득하여 공원 앞에서 대충 찍어서 보냈는데 양현석한테서 직접 만나자고 연락이 왔고 다음 날 가서 바로 계약을 했다고 한다. [14] 이때 만든 곡 중 하나가 렉시눈물 씻고 화장하고이다. [15] 나머지는 신사동 호랭이, 이단옆차기 등이 차지했다. [16] 소속 가수인 브레이브걸스나 다른 연예인 지인들도 실제로 눈물 많고 감성이 매우 여리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17] 섹시 댄스로 데뷔 후에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었고 이내 밴드 컨셉으로 도전했다가 또 실패했던 무명 그룹 AOA가 '흔들려'로 다시 댄스 그룹으로 전환한 후 조금씩 아는 사람만 아는 그룹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저 곡들로 한순간에 인기 아이돌의 반열에 들어섰다. 이 덕택에 2016년 초반까지 전성기를 맞이했던 것을 생각하면, 소속사만 달랐을 뿐 AOA는 사실상 용감한 형제가 멱살잡고 하드캐리했다고 볼 수 있는 그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 용감한 형제의 기념비적인 첫 작품이다. [19] 나 혼자 산다에서 용감한 형제 曰, "사람들이 '다른 가수들은 좋은 곡 내줘서 히트치게 만들었는데, 왜 자기네 소속 가수들은 이런 곡을 내줬느냐' 라고 얘기들 하시는데, 저는 단 한 번도 제 자식들에게 안 좋은 곡 내준 적이 없어요."라고 했는데, 그의 말마따나 브레이브걸스의 곡들 중에는 숨듣명 소리를 들을 정도로 퀄리티 좋은 음악들이 다수 존재하였으며 롤린/역주행 이후에는 운전만해 하이일도 발굴되면서 더더욱 평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20] JYP엔터테인먼트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의 콜라보레이션 작품이란 것도 대단한데 이 곡을 용감한 형제가 모두 작사&작곡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의외라는 반응이 많은 곡이기도 하다. 선미가 이 곡을 통해 솔로 활동으로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짐승(...)처럼 생겼고 문신 많은 이 남자에게서 어떻게 이런 소녀 감성에 딱 맞는 곡을 써내렸고, 그걸 선미한테 줄 생각을 했을까'라는 의견이 공통적으로 많은 편. 용감한 형제의 여린 감성이 잘 두드러진 곡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여담으로 용감한 형제는 이 곡을 쓸 때 박진영에게서 일일이 컨셉과 곡에 수정 요청을 받는 바람에 농담삼아 JYP와의 작업은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21] 특히 미쳤어, 토요일 밤에, AMOLED는 손담비가 가수로 활동했을 시절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했던 곡들이다. [22] 초반부 가사 'push push baby 마음을 받아줘~'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기간에 나온 홈플러스 광고음 '겨울 오길 기다렸죠~'와 유사하다고 까인 곡. [23] 참고로 '나 혼자'는 원래 브레이브걸스/1기에게 줄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멤버들이 이 노래를 알맞게 소화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보니 어쩔 수 없이 씨스타에게 넘겨줬다는 것. 사람들도 '나 혼자'는 효린이나 소유 외에 이 곡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다른 가수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평가다. [24] 위의 '보름달'과 함께 '이 곡을 용감한 형제가 썼다고?'라는 의외의 반응이 나온 곡들 중 하나다. 어느 정도였나면 용감한 형제 소속사에 있는 브레이브걸스 멤버들조차 자기 사장님이 이런 곡을 작사/작곡했다는 사실에 엄청 놀라워했을 정도다. [25]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 시리즈가 2020년 경 유튜브 차단이 풀리면서 여기에 있었던 후유증도 2020년 역주행 했다. [26] 너무 병맛스러운 제목과 가사 때문인지, 헬로비너스의 몰락의 시작이자 악연이 있었다. 하지만 여성 BJ의 리액션 댄스곡으로는 히트곡이 되었으며, 2021년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27] 다만 롤린과 운전만해는 용형이 편곡한 것이 아니라서 그런 면도 있다. [28] 예외적으로 사무엘이 용감한 형제의 개인 사업에 이용당했다며 갑작스레 용감한 형제와의 협의 없이 단독 행동을 하긴 했지만 이는 사무엘과 어머니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며, (사무엘은 단독 행동을 선언한 시점에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법정대리인인 모친이 소속사와 협상했다.) #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의 공식 홈페이지에도 사무엘의 이름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용감한 형제 입장에서도 사무엘과의 오해를 풀고 계속 키워보려는 의지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나 결국 갈등을 봉합하지 못했는지 사무엘과는 결별했다. [29] 물론 용형도 자가복제로는 많이 까이지만, 자가복제는 자기 작품을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것일 뿐 타인의 작품을 멋대로 응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태도의 문제라면 몰라도 최소한 윤리 문제는 아니다. [30] 브레이브걸스 멤버들은 하나같이 고른 개성을 가지고 있어 묻히는 멤버가 없고 전원 훌륭한 프로 의식과 인성을 갖췄다는 점에서 많이 호평을 받고 있다. [31] 본인도 이를 인지한 것인지 역주행으로 컴백한 후에는 앨범 표지와 무대의상을 노래에 어울리는 청량한 컨셉으로 바꾸는 등 좀 더 감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32] 용형에 의하면 원래 YG에 있던 시절인 2007년에 어느 정도 완성된 곡이고 박봄 솔로 또는 2NE1 앨범에 실릴 뻔하다가 무산된 곡이라고 한다. [33] 이 두 노래는 다른 부분으로 인해 망가진거지 노래 자체는 숨듣명이라고 불리는 노래들 중 최고의 명곡이라는 평이 많다. [34] 헬로비너스의 난 예술이야 인트로를 들어보면 헬로비너스 X3 후 'Brave sound Drop that shit'이 나온다. AOA 심쿵해에서도 자연스러운 보컬로 바뀌었다. 4minute의 《이름이 뭐예요?》는 4minute.. It's Brave Sound! 랄라라라라라 이름이 뭐예요로 시작한다. [35] 2010년이기 때문에 지금과 멤버구성도 다르지만 이미 방탄소년단이란 이름을 쓰고 있었다. [36] 그래서 팬들은 '용감한 형제가 그냥 작곡가로 작사작곡만 하고 지냈다면 이렇게까지 욕처먹을 일은 없었을 텐데'란 안타까운 반응도 보인다. [37] 이 사실은 브레이브걸스 2기가 롤린의 역주행으로 뜬 뒤에 알려졌는데, 이에 많은 팬들이 '설마 그 로드매니저가 아직도 운전을 담당하고 있느냐?' 라고 항의를 했다. 이에 용감한 형제는 '그 로드매니저는 직후에 교체되었고, 지금의 로드매니저는 작년에 들어왔다' 고 해명했다. [38] 위에서 말했듯이 독립 후에도 본인이 참여한 모든 곡들은 YG로 넘어간다. [39] 현재는 프로필 사진이 바뀐 상태다. 기존 프로필 사진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40] 강남구청역 인근, 망우역 인근 [41] 다른 소속사 산하의 온라인 샵에서는 보통 가수들의 음반, 굿즈나 화장품, 액세서리 정도만 판매하지 식품까지 주문 제작해서 배달하는 경우는 없다. [42] 이 소식을 접한 브레이브걸스 마이너 갤러리 유저들은 이를 보고 '이 정도면 용감한 형제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라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의뢰해서 백종원한테 조리법이랑 경영 솔루션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라든지, '엔터테인먼트 사업보다 요식업을 더 잘하는 소속사가 있다?', '용가놈/용형은 돈가스 원툴'이라며 이렇게 된 거 엔터테인먼트 사업 대신 요식업으로 업종을 변경하고 소속사 건물을 식재료 납품용 대형 창고로 바꾸면 돈 훨씬 잘 벌 것 같다는 드립 섞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43] 미치겠어, To You, 긴 생머리 그녀, 장난아냐 등 대부분의 히트곡이 용형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