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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7:01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미수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colcolor=#fff>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미수 사건
Attempted assassination of Pope John Paul II
파일:Pope_John_Paul_II_after_shooted.jpg
▲ 총을 맞은 직후의 요한 바오로 2세
▲ 사건 발생 위치
<colbgcolor=#bc002d> 발생일 1981년 5월 13일 오후 5시 17분
발생 위치

[[바티칸|]][[틀:국기|]][[틀:국기|]]
유형 살인미수
가해자 메흐메트 알리 아으자
범행 동기 가해자의 이슬람 극단주의 신봉
피해자 <colbgcolor=#bc002d> 부상 요한 바오로 2세 / 제264대 교황
앤 오드레이 / 구경꾼[1]
로즈 할 / 구경꾼[2]
1. 개요2. 전개3. 만약 암살에 성공했다면?4. 사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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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1.bp.blogspot.com/225256_208983982467156_100000666687949_638468_3721591_n.jpg 파일:external/4.bp.blogspot.com/popewithmehmet2.jpg
저격 순간[3] 저격범을 용서하는 요한 바오로 2세

1981년 5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메흐메트 알리 아으자[4]가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

2. 전개

1981년 5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무개차를 타고 일반 알현을 하던 교황을 향해 총성이 울렸다. 교황은 튀르키예인 메흐메트 알리 아으자가 난사한 4발의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다. 동시에 근처에서 교황의 알현을 구경하던 앤 오드레이, 로즈 할이라는 인물들도 총격에 휘말려 부상을 입었다.

아으자는 이슬람 광신자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 그레이 울프'의 회원이었으며 이미 튀르키예에서도 겨우 19세였던 1979년 2월 1일에 진보 성향의 기자이자 밀리예트지의 편집장인 아브디 이페키를 살해하여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는데 교황의 튀르키예 방문 계획 발표에 분노하여 재판받던 중인 11월 23일 탈출해 동년 11월 26일 이스탄불의 신문 밀리예트지에 "교황의 튀르키예 방문은 서구 침략자들이 튀르키예와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한 것이며, 이 방문을 취소하지 않으면 교황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편지를 보냈다. 튀르키예 법정은 1980년 4월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81년 1월 로마에 도착한 아으자는 2월에 스위스 오스트리아에서 지냈고 다시 4월 초에 로마로 돌아와서 대학생으로 위장하였으며[5] 밀라노 마요르카를 다녀오면서 순례객으로 위장하고 로마 답사도 끝낸 순간 이미 준비가 끝나 있었다. 이후 인터뷰에서 테러범이었던 아으자는 사건 당시 자신은 흥분한 상태가 아니라 굉장히 이성적이고 침착한 상태였는데 당시 총을 쏘다가 중간에 총탄이 걸려서 더 쏘지 못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가 쏘았던 권총을 회수하여 확인한 결과 총 4발 중 일부는 총에서 발사되었지만 일부는 탄이 걸려서 발사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아으자 본인은 이 점에 대해 당시 총탄이 걸렸던 것도, 결국 교황이 살아난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며 그가 목숨을 건졌다는 것을 알고 크게 안도했다고 말했다.

병원으로 실려간 교황은 일요일 아침에 녹음 테이프를 통해서 신도들에게 아으자를 자신의 형제라고 부르면서 자신은 그를 용서했으니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완치 후 퇴원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으자가 수감된 교도소로 직접 가서 용서해 주었는데 아으자는 감격했다.

사건 발생 직후 미국에서 아으자의 배후에 KGB가 있고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이 교황을 암살하려고 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지만 아으자는 이를 부인했다. 톰 클랜시는 이 가설을 바탕으로 <레드 래빗>이라는 소설을 썼다. 모사드의 첩보 활동을 담은 책 <기드온의 스파이>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가 이란 호메이니라고 적시했다. 모사드가 교황청의 호감을 사기 위해 아으자[6]의 배후를 밝혀서 정보를 넘겼다.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마르코 인살도와 튀르키예 저널리스트 야세민 탁신은 20년 간의 취재를 통해 공저한 책 "Kill the Pope: The Truth about the Assassination Attempt on Pope John Paul II"에서 불가리아 혹은 KGB가 아으자의 배후에 있다는 주장은 CIA 소련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기 위해 음해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 하지만 당시 수사를 맡았던 이탈리아 판사 페르디난도 임포시마토는 인터뷰를 통해 소련이 연루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개소리에 불과하다고 강력히 반발하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때 맞았던 탄환을 포르투갈 파티마 성지의 성모 마리아상 왕관에 봉헌하여 자신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참고로 이것이 바로 파티마의 성모가 전한 세 번째 예언의 내용이며 오상의 성 비오 신부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신부 시절에 귀띔해준 예언의 실현이라고 하지만 이 예언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파티마의 성모 문서 참조.

성 베드로 광장의 사건의 현장이었던 바닥에는 이 사건의 현장이었음을 가리키는 표지석( #1, #2)이 남아 있다.

3. 만약 암살에 성공했다면?

만약 암살이 성공했다면 (심지어 공산주의자들의 수장의 사주를 받았을지 모르는) 무슬림에게 가톨릭의 수위권자가 암살당한 게 되며 최악의 경우 제3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제2의 사라예보 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전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가톨릭 이슬람 사이에서 씻을 수 없는 엄청난 분쟁과 증오의 씨앗이 되었을 게 분명하며 요한 바오로 2세가 추구하던 종교의 화합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되었을 건 덤이다.

더군다나 요한 바오로 2세는 공공연히 슈퍼스타라고 불릴 정도로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던 교황이었으며 고국 폴란드를 비롯해 전 세계 폴란드계에게는 아예 정신적 지주가 된 상태였다. 교황이 저격당해 쓰러진 후 성 베드로 광장은 아비규환이 되어 통곡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이 소식이 전 세계로 전해지자 교황의 모국인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아예 국가적인 마비를 겪어 국가 무신론을 주장하는 폴란드 통일노동당조차도 교황의 쾌유를 비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전달해야 했다. 만약 요한 바오로 2세가 정말 사망했고 심지어 이것이 소련의 사주로 밝혀졌다면 적어도 폴란드는 민중봉기로 끝장났을 것이고 그러면 아마도 높은 확률로 소련은 개입했을 것이며 서방권 국가들도 한동안 대소 유화정책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상기한 대로 안드로포프와 KGB는 교황을 무척이나 적대시했지만 암살을 소련이 지시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도 발굴되지 않았다.

4. 사건 이후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치는 기색을 보였던 아으자는 사건으로부터 19년 만인 2000년 이탈리아에서 석방되어 고국인 튀르키예로 돌아갔으나 교황 암살 이전에 저지른 기자 살인죄로 튀르키예에서 재수감되었다가 2011년 1월에 감옥 생활 19년+11년을 채우고 석방되었다. 3년 뒤인 2014년에 요한 바오로 2세의 무덤을 참배했으며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2016년에는 가톨릭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밝히기까지 했다. 2020년에는 완전히 갱생하여 길에 유기된 동물들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 용서와 포용이 가지는 힘을 잘 알 수 있다. 살인자가 죄를 뉘우치고 40년 후 이제는 동물을 구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당연한 수순으로 교황의 의전차는 방탄차를 사용한다. 다만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어리 깡통 안에서는 대화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며 방탄차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소설가 이승우는 이 사건에서 느낀 감상 등을 바탕으로 '에리직톤의 초상'을 써 등단하게 된다.

[1] Anne Odre(영어는 맨 끝에 'e'가 오면 '에이'로 발음한다.), 뉴욕주 버팔로 출신. [2] Rose Hall, 서독 프랑크푸르트 출신. [3] 왼쪽에서 교황을 안고 있는 사람은 교황의 비서인 몬시뇰 스타니스와프 지비시다. [4] Mehmet ali ağca. 튀르키예어에서 c는 ㅈ 소리가 난다. [5] 실제로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듣기도 하였다. [6] 책에서는 '아그카'라고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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