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6E7D5><colcolor=#000000> 그리스 왕국 요르요스 1세의 왕비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Ольг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Росси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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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로마노바 (Ольг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Романова) |
출생 | 1851년 9월 3일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블로프스크 궁전 | |
사망 | 1926년 6월 18일 (향년 74세) |
이탈리아 왕국 로마[1] | |
배우자 | 요르요스 1세 (1867년 결혼 / 1913년 사망) |
자녀 | 콘스탄티노스 1세, 요르요스, 알렉산드라, 니콜라오스, 마리아, 올가, 안드레아스[2], 크리스토폴로스 |
아버지 |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
어머니 |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3] |
형제 | 니콜라이, 베라, 콘스탄틴, 드미트리, 뱌체슬라프 |
종교 | 정교회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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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여대공이자 그리스 왕국 요르요스 1세의 왕비.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의 장녀이자 둘째로, 니콜라이 1세의 손녀다. 필립 공의 친할머니이자, 찰스 3세의 친증조할머니이다.2. 작위
<colcolor=#000> 문장 |
-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전하 Her Imperial Highness The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na of Russia (1851년 9월 3일 – 1867년 10월 27일)
- 그리스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Hellenes (1867년 10월 27일 – 1913년 3월 13일)
- 그리스의 올가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Queen Olga of Greece (1913년 3월 13일 – 1926년 6월 18일)
- 그리스의 섭정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Regent of Greece (1920년 11월 17일 – 1920년 12월 19일)
3. 생애
3.1.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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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1861년 |
그녀의 이름인 올가는 아버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작은 누나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4]의 이름을 따 왔다고 한다. 올가는 푸른 눈에 통통한 소녀였으며, 상냥한데다 조용하고 눈물이 많은 성격이었다. 올가는 부모의 자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어머니 알렉산드라 대공비는 딸에 대해 귀여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쁨이자 자랑''이라고 언급했고, 올가의 주변 사람들 중 하나가 그녀를 친절하고 자상하며 기쁨을 준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푸른 눈은 천사같은 올가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형제자매들과도 사이가 좋아 유대관계가 남달라 성인이 되고 나서도 자주 연락하고 가족모임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1862년에 아버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폴란드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바르샤바로 이주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공이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진정시키는 데 실패하고 1월 봉기가 일어나면서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1863년에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그리스 왕국의 요르요스 1세를 만났다. 미래의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올가의 나이는 12살이었다.
3.2. 가족사
올가는 첫째 남동생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과 함께 가족구성원 중 유이하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사람이다. 아버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바람둥이였는데 말년에 발레리나 출신의 정부인 안나 쿠즈네초바랑 새살림을 차리기 위해 냅다 나르는 바람에 아내와의 관계도 파탄났다.오빠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은 할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보석을 훔치다가 걸리고[5], 여동생 베라는 성격이 난폭한 걸로 당대에도 유명했으며[6] 막내남동생 뱌체슬라프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은 요절했다.
3.3. 결혼
1867년 10월 27일, 겨울 궁전에서 요르요스 1세와 결혼했다. 그리스 왕국의 왕비는 정교회 신자여야 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여대공 중에서 왕비 후보를 간추리던 중, 요르요스 1세가 러시아 황태자비가 된 여동생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를 만나기 위해 1867년에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만나서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초 콘스탄틴 대공은 올가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결혼에 동의하기를 꺼렸으나, 알렉산드라 대공비의 지지로 요르요스 1세와의 결혼이 성사되었다.이 결혼은 러시아에게 있어 외교적으로 큰 이득이 되었다. 특히 터키와의 군사적 충돌의 위협에 직면한 당시에 지중해 지역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4. 그리스의 왕비
16살의 나이에 그리스의 왕비가 된 올가는 자신의 의무를 다 하는 데에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7] 한번은 왕비가 보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찾아보니 구석에서 인형을 안고 울고 있었다고 한다. 올가는 빠르게 그리스어를 배우고 전 그리스 왕비였던 올덴부르크의 아말리가 설립한 공공시설들을 이어서 후원했다. 또한 무료 급식소, 각종 교육 시설, 그리고 저렴한 가격으로 의약품을 제공하는 병원을 설립했다.한번은 올가의 활동이 그리스 내에서 큰 소동을 일으켰다. 당시 그리스는 표준어를 제정하면서 코이네 그리스어의 규범에 맞춘 그리스어인 카사레부사를 표준어로 지정했으나, 카사레부사는 구어체 그리스어(디모티키)와는 차이가 컸기 때문에 별도의 학습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초등 교육만 받았을 경우에는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올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구어체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을 출판하게 했다. 의도는 좋았으나 이는 몇몇 신학자들과 보수파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들은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 그리스의 전통적인 가치를 훼손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 번역 논란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동반한 폭동으로 이어졌고, 성경의 번역본은 모두 압수되고 출판이 금지되었다.
비록 논란의 중심이 된 적도 있었지만 자선 사업에 힘쓰고, 성실히 공무를 수행하면서 올가는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민심을 고려하는 등, 적절하게 처신했다. 올가는 친정인 러시아를 자주 방문했는데 단순히 고향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당시 그리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고 선거를 자주 치렀으며, 요르요스 1세 부부와 자녀들은 선거 철이 되면 선거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외국으로 친척들을 방문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올가는 후에 그리스에서 군주제가 폐지된 후 연금을 받는 유일한 그리스 왕족이 되었다.
요르요스 1세-올가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으며, 아이들에게 다정했다고 한다. 요르요스 1세는 비록 아이들에게 엄격한 아버지였으나 자녀들의 놀이에 참가했다고 한다. 또한 요르요스 1세와 올가는 친척들과의 연결을 매우 중요시 했는데 당대 왕족과 달리, 요르요스의 친정인 덴마크 왕실 가족들과 매우 다정하고 친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올가의 시부모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와 루이제 왕비는 손주들이 자신한테 찾아오는 것을 좋아했고, 올가의 시누이들인 알렉산드라 왕비와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도 자주 덴마크를 찾아갔다.[8] 이런 친밀한 관계는 그리스 왕실 가족들이 영국, 하노버 왕실, 러시아 황실 가족들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3.5. 망명 생활
1913년에 요르요스 1세가 총에 맞아서 암살당했다. 큰 충격을 받은 올가는 러시아로 돌아갔다. 파블로프스크 궁전에서 군인들을 돌보던 중에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많은 친척들이 전사하거나 살해당했고[9] 올가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한편 올가의 장남 콘스탄티노스 1세는 총리대신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압력에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망명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있었다. 올가는 아들 가족들과 합류해 함께 스위스로 망명했다. [10]1920년에 올가와 가족들은 그리스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가 패혈증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는 망명 중인 왕족들이 돌아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에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올가만이 입국 허가를 받았다. 올가가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사망했고, 국민투표로 재즉위하게 된 콘스탄티노스 1세가 돌아올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1922년에 콘스탄티노스 1세는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서 그리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다시 왕위에서 물러나 망명길에 올랐다. 올가는 아들과 함께 유럽을 떠돌다가 1926년에 숨을 거두었다. 1936년에 왕정 복고로 왕위에 오른 손자 요르요스 2세가 망명 중에 사망한 왕족들의 유해를 왕실 묘지에 이장하면서 올가의 유해는 타토이 궁에 안장되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na of Rus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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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Constantine Nikolaevich of Rus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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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 (Nicholas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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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1세 (Paul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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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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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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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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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여공작 (Duchess Luise of Mecklenburg-Strel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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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of Saxe-Alt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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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알텐부르크 공작 요제프 (Joseph, Duke of Saxe-Alt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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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Frederick, Duke of Saxe-Alt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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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게오르기네 여공작 (Duchess Charlotte Georgine of Mecklenburg-Strel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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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템베르크의 아말리 여공작 (Duchess Amalie of Württe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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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템베르크 공작 루트비히 (Duke Louis of Württe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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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테 공녀 (Princess Henriette of Nassau-Weilburg)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콘스탄티노스 1세 (Constantine I) |
1868년 8월 2일 | 1923년 1월 11일 |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 슬하 3남 3녀[11] |
2남 |
요르요스 왕자 (Prince George) |
1869년 6월 24일 | 1957년 11월 25일 |
마리 보나파르트 공녀[12] 슬하 1남 1녀 |
1녀 |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 (Grand Duchess Alexandra Georgievna of Russia) |
1870년 8월 30일 | 1891년 9월 24일 |
러시아의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13] 슬하 1남 1녀 |
3남 |
니콜라오스 왕자 (Prince Nicholas) |
1872년 1월 22일 | 1938년 2월 8일 |
러시아의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14] 슬하 3녀[15] |
2녀 |
러시아의 마리야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 (Grand Duchess Maria Georgievna of Russia) |
1876년 3월 3일 | 1940년 12월 14일 |
러시아의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16] 슬하 2녀 |
페리클레스 이오아니디스 제독[17] | ||||
3녀 |
올가 공주 (Princess Olga) |
1880년 | 1880년 | |
4남 |
안드레아스 왕자 (Prince Andrew) |
1882년 2월 2일 | 1944년 12월 3일 |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슬하 1남 4녀[18] |
5남 |
크리스토폴로스 왕자 (Prince Christopher) |
1888년 8월 10일 | 1940년 1월 21일 | 낸시 스튜어트 워싱턴 리즈[19] |
오를레앙의 공녀 프랑수아즈[20] 슬하 1남[21] |
남편 요르요스 1세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5남 3녀를 낳았다. 형제자매 중에서는 자녀 수가 두번째로 많다. 자녀 수가 가장 많은 사람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차남이자 올가의 첫째 남동생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으로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다.
그러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의 아들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으로 자녀들이 전사하거나 사형당했다. 그래서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의 아들 6명 중 현재 남아있는 남계 후손이 없다. 그에 비해 올가 쪽도 아들 5명 중 3명이 대가 끊기고 친손자 6명중에서 4명이 대가 끊기는 등 하마터면 단절될 뻔했지만 나머지 손자 2명이 아들을 낳아서 계속 대가 이어지는 중.
루마니아의 왕대비 엘레니, 파블로스,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왕자비,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등 유럽의 여러 왕족들의 할머니이자 영국의 현 국왕인 찰스 3세와 스페인의 왕대비 소피아의 친증조할머니다.
크리스티안 10세와 호콘 7세의 작은어머니이자 영국의 조지 5세와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의 작은 외숙모이다.[22]
현재 영국의 군주인 찰스 3세는 올가의 친증손자이며, 윌리엄 왕세자는 친현손자, 조지 왕세손은 6대손이다.
5. 여담
-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으며 하느님의 뜻을 의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23] 이는 올가 왕비의 자녀들이 독실한 정교회 신자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미쳤으며, 올가의 차녀인 마리아 공주도 올가 왕비가 매우 신실한 신자였다고 언급했다.
- 1851년에 태어났는데 공교롭게도 올가의 윗동서이자 프레데리크 8세의 왕비인 스웨덴의 로비사 공주와 서로 동갑이다. 생일은 올가가 한 달 정도 빠르다.[24] 심지어 두 사람의 사망한 년도도 1926년으로 똑같다. 먼저 로비사 공주가 1926년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났고, 6월 18일에 올가가 세상을 떠났다.
- 또한 올가 본인과 윗 동서인 로비사 공주, 올가의 맏며느리인 프로이센의 조피는 모두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증손으로 6촌 자매간이다. 올가의 경우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장녀 샤를로테의 손녀이고, 로비사의 경우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4녀 루이제의 외손녀, 조피의 경우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차남 빌헬름 1세의 손녀이다.
- 조카며느리 조지 5세의 왕비 테크의 메리와 6촌간이다. 메리 왕비의 아버지인 프란츠 폰 테크가 올가의 어머니 알렉산드라의 외사촌이기 때문. 또한 룩셈부르크 대공 기욤 4세, 바이에른 왕국의 왕 루트비히 2세와 그 사촌인 마지막 왕 루트비히 3세와도 6촌간이다.[25] 뿐만 아니라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기준으로 8촌이다. 올가의 경우 프리드리히의 장녀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의 증손녀, 메리는 프리드리히의 차남 루트비히의 증손녀.
- 소녀 감성이 있어 그리스로 시집가기 전에 인형들을 챙기고 러시아를 떠났다고 한다.
- 영국의 국왕이자 시조카였던 조지 5세가[26] 제일 좋아했던 친척이었다. 조지 5세는 성품이 다정한 외숙모인 올가를 많이 따랐고 올가도 아버지 콘스탄틴 대공의 영향을 받아, 해군에 관심이 많았는데 똑같이 해군에 복무하며 자신을 따르는 조지 5세를 다정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올가의 친손자가 조지 5세의 손녀와 결혼해서 영국 왕위를 가져가고... 물론 둘 다 사망하고 한참 뒤의 일이다.
- 올가는 남편을 매우 사랑했지만 결혼하면 러시아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리스에서 올가는 러시아 선박이 당도하면 찾아가거나, 러시아인 선원을 궁에 불러 이야기를 듣는 등, 러시아를 계속 그리워했다.
- 남편 요르요스 1세와 단 둘이서 대화할 때는 독일어로 대화했다. 연애했을 당시에 둘이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독일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둘 다 진짜 그리스인도 아니고 독일인이다.[27]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는 가정에서 영어를 사용했으며[28]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말할 때 그리스어를 쓰도록 했다고 한다.(...)
[1]
프랑스에서 사망했다는 말도 있는 등 사망지가 분명하지 않다.
[2]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의 아버지다.
[3]
작센알텐부르크 공국의 2대 공작
요제프의 5녀.
하노버의 마리 왕비,
올덴부르크 대공비 엘리자베트의 여동생이다.
[4]
올가의 둘째 고모인 올가 니콜라예브나는
뷔르템베르크의 왕비가 되었다. 올가의 여동생이자 성격이 난폭하고 신경질적이었던 베라를 뷔르템베르크로 보내 친자녀처럼 키운 걸로 알려져 있다.
[5]
자신의 미국인 애인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어머니
알렉산드라 대공비가 니콜라이 1세에게 결혼선물로 받은 다이아몬드를 훔치다 걸려서
타슈켄트로 유배형에 처했다. 이후 여생을 유배지에서 살다가
10월 혁명 직후인 1918년 1월에 만 67세로 병사했다.
[6]
그나마 베라는 둘째 고모
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에게 맡겨져 올가와
카를 1세 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난폭한 성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7]
올가가 1867년에 왕비가 된 이후 임신을 하게 되어 17세도 되기 전인 1868년 8월에 장남
콘스탄티노스를 출산한 터라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8]
요르요스 1세는 누이들인 알렉산드라 왕비와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와 각별한 사이라, 올가도 덩달아 시누이들과 친해져서 시조카들 중 하나인
조지 5세를 매우 예뻐하였다고 한다.
[9]
특히 올가의 첫째 남동생 콘스탄틴의 자녀들이 많이 죽었다.
[10]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사실상 억류되어 있다가 덴마크의 도움으로 1919년 초 겨우 러시아를 떠날수 있었다.
[11]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루마니아의 왕대비 엘레니,
파블로스 등.
[1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남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
[13]
알렉산드르 2세의 6남이다.
[14]
알렉산드르 2세의 손녀(3남 블라디미르 대공(1847~1909)의 막내이자 외동딸)이다.
[15]
유고슬라비아의 파블레 왕자비 올가,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공주 등
[16]
니콜라이 1세의 손자(4남 미하일의 3남)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함.
[17]
1887~1965,
그리스
해군 장교.
[18]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비 마르가리타,
바덴 변경백비 테오도라,
헤센의 대공세자비 체칠리아,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비 소피아,
에든버러 공작 필립 왕자.
[19]
사별 / 1878~1923,
미국 출신 상속녀로 낸시에게는 크리스토폴로스 왕자와의 결혼이 세번째 결혼이었다. 1920년에 크리스토폴로스 왕자와 결혼할 때 그리스의 아나스타샤 공주 칭호를 받았으나 3년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20]
1902~1953,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방계인 오를레앙 가문 출신으로
루이필리프 1세의 고손녀이다. 크리스토폴로스의 작은어머니인 오를레앙의 공녀 마리(
크리스티안 9세의 3남 발데마르의 부인)의 조카이고, 프랑수아즈의 여동생 안은 크리스토폴로스의 조카인 이리니 공주의 동서(이리니의 남편 아이모네의 형인 3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와 결혼)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폴로스 왕자와는 1929년에 결혼하였다.
[21]
미하일 왕자(1939~2024). 옛 그리스 왕가에서 거의 유이하게(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로스) (민족적, 혈통적인)
그리스인과 결혼했다. 그리스 예술가인 마리나 카렐라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는데, 그 중 둘째 딸 올가는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조의 방계이자 자신의 친척인(요르요스 1세 기준으로 하면 7촌 조카, 오를레앙 가문의 기즈 공작 장 기준으로 하면 6촌 오빠이다)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아이모네와 결혼했다.
[22]
니콜라이 2세에겐 둘째 외삼촌
요르요스 1세의 아내로 작은 외숙모임과 동시에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친사촌이기에 오촌 고모가 된다.
[23]
남편 요르요스 1세가 총을 맞아 승하한 뒤 남편의 시신 옆에 무릎 꿇어 오랫동안 기도하기도 했다.
[24]
스웨덴의 로비사 공주의 생일은 1851년 10월 31일이다.
[25]
기욤 4세의 할머니인 루이제와,
루트비히 2세,
루트비히 3세의 할머니인 테레제 왕비가 올가의 외할아버지인 작센알텐부르크 공작 요제프의 여동생이다. 기욤 4세도 루트비히 2세, 루트비히 3세와 6촌간이지만,
테크의 메리는 이 셋과는 6촌이 아니다.
[26]
올가의 시누이
알렉산드라 왕비의 차남이다.
[27]
남편 요르요스 1세의 부모인
크리스티안 9세와
헤센카셀의 루이제는 모두 독일 왕공족 출신이고, 올가의 어머니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와 할머니
프로이센의 샤를로테도 독일 출신이여서 독일어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애초에
홀슈타인고토르프 로마노프 왕조의
직계 조상부터가 독일인이었고, 러시아 황실에는 대대로 독일의 왕녀 및 공녀들이 황후나 대공비로 자주 시집왔다. 이는 과거부터 러시아와 독일의 교류가 잦았던데다
귀천상혼을 피하기 위해 독일의 왕공족 출신의 영애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
[28]
요르요스-올가 부부는 자녀들의 보모를 영국인으로 고용했는데 이는 당대 유럽 왕실에 큰 유행인데다, 큰 시누이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가
영국의 왕태자비였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29]
1925년 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