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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4:33

오장원 전투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제갈량의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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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5차 북벌, 추풍오장원
2.1. 진서, 송서 천문지의 기록2.2. 최진열 교수가 주장하는 오장원 전투의 오류
3. 대중매체

1. 개요

제갈량의 5차 북벌 중 벌어진 전투이다. 본 문서에서는 5차 북벌 전체를 서술한다.

2. 5차 북벌, 추풍오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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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년, 제갈량은 4차 북벌 이후 국력을 기울여 마지막 북벌을 준비한다. 이때 제갈량의 북벌군의 규모는 약 10만으로 이릉대전 이후 촉이 투사했던 전력 가운데 두 번째로 규모가 거대한 군세였다. 진양추는 이때의 제갈량군에 대해 '제갈량은 군대의 통솔에 뛰어났으며 군령을 엄격하고 분명하게 했다.'라고 적고 있다.

최초 제갈량의 목표는 미현(眉縣)의 위수(渭水) 남쪽까지 진군하고 주둔하며 무공(武功)이란 곳에서 동진하는 것이었다...라고 사마의는 생각했다. 무공은 산악 지대로 지형이 험준한 편이라 산을 끼고 싸우면 촉군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반면 위나라 입장에서는 촉군의 무공산 행에 대하여 좋든 싫든 장안을 방어하기 위해 요격을 나가 공세적 입장을 취해야만 했으니 제갈량이 무공으로 올 경우 당시 수비로만 일관하려던 위나라의 대전략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사마의는 거꾸로 제갈량이 오장원으로 간다면 위의 의도대로 전쟁이 진행된다고 보았다.

이에 사마의는 제갈량이 나가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을 우려하였으며 이 때문에 제갈량이 오장원 근처에 왔을 때 부하 장수들에게 말하길,
제갈량이 만약 용감한 자라면 응당 무공(武功)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할 것이오.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五丈原)에 오른다면 제군(諸軍)이 무사할 것이오.
위씨춘추, 선제기

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갈량은 그의 최후의 출전에서 사마의가 우려하던 상황인 무공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하는 것이 아닌 서로 향해 오장원에 향했다고는 하는데 사마의는 지구전을 의도하고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막혀 오장원으로 강요당했다고 해석도 가능한 부분이다. 당시 무공으로 가는 길목인 양수에 이미 사마의의 수비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사마의의 저 발언은 자신의 군사로 무공을 지키고 있으니 제갈량이 다른 것으로 갈 것이라 확신한 발언인 듯 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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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선제기>와 <곽회전>에 따르면 오장원은 동서남북이 산과 강으로 막혀 있어 제갈량은 먼저 맹염을 시켜 강을 건너서 무공수 동쪽을 점령해 거점을 만드는데 사마의가 이걸 보고 불어난 위수를 넘어와 거점을 만든 촉군의 영채를 1만 기병으로 공격했으나 제갈량이 바로 대나무 다리를 만들면서 무공수 건너편에서 화살[2]을 쏘아 맹염의 영채를 공격하는 사마의의 기병을 공격하였고 다리가 마침내 다 만들어지자 사마의가 그걸 보고 영채 공격을 멈추고 퇴각하였다. 촉한의 쇠뇌병이 사마의의 기병을 격퇴한 것이다.[3] 이는 《 태평어람》, 수경 위수주에 인용된 제갈량 본인의 기록인데 어느 시기의 일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정황상 양군이 맞닥뜨린 이 시점이었을 확률이 높다. 이로써 제갈량은 위수 남쪽의 촉군 영역을 넓혔다.

위군의 거의 모든 장수들은 모두 제갈량이 무공을 건너 결전할 것이라 여겼으나 오직 곽회만이 이를 반대했다. 곽회는 사마의에게 "만약 제갈량이 북원을 노리고 병사들을 북산까지 이어 우리가 농서 가는 길 끊고 백성들과 오랑캐 동요시키면 우리는 진퇴양난의 상태가 될 텐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라고 진언했고 사마의는 곽회의 진언을 받아 그를 북원으로 급파하여 방비케 했고 얼마치 않아 미처 위군이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정말 제갈량의 대군이 서쪽의 북원을 급습하여 점령하려하니 그가 막았다. 즉 제갈량의 당초 의도는 옹양의 길을 끊고 서쪽을 위나라부터 사전에 차단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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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시 제갈량이 서쪽으로 가는 척 하니 역시 다른 장수들은 모두 서쪽을 막아야 한다고 여겼지만 또 곽회가 동쪽의 양수를 노리는 제갈량의 계획을 눈치채고 막아낸다. 한마디로 위의 제장들이 잠깐 다들 어리버리 한 사이에 곽회가 혼자 정신 차리고 제갈량의 계획을 혼자서 동서로 막아버린 것이다. 흔히 추풍오장원을 제갈량 vs 사마의 구도로 생각하지만 알고보면 곽회의 하드캐리나 다름없었다. 다만 모든 제장들이 반대하는 가운데에도 곽회의 의견을 받아들인 사마의 역시 뛰어났다. 다른 사람들과의 의견을 조율하고 뛰어난 부하를 제대로 쓸 줄 아는 것 또한 대장으로서 갖춰야 할 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곤 해도 오장원 초반의 주역이 곽회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단 자치통감에서는 곽회가 북원을 막은 것만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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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회기동이 모두 막힌 제갈량은 이전의 전쟁과는 다르게 오장원에서 병사들로 하여금 둔전을 실행하고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며 병사들과 백성들이 섞여 농사를 지으면서도 백성들은 편안했고 병사들은 사사로움이 없는 군율의 엄정함을 보여 민심을 획득하며 아예 오장원에 눌러앉아 버린다.

이는 처음부터 사마의가 공세로 나오지 않고(위에도 나왔듯 한 번 공격했지만 패했다), 이전처럼 수세로 촉의 북벌군이 제발로 무너지기를 기다릴 것을 예측이라도 한 행동인 듯하다. 제갈량은 이미 해당 통로에 식량 창고를 짓고 장기전으로 나갈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던 것이다. 제갈량전에서 당시의 기록을 보자면 위수 연안에서 촉군 10여만이 현지인들과 함께 뒤섞여 농사를 지었는데, 이때 촉군은 백성들을 해하지 않았고 백성들도 촉군에 반항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진서 노지전에 따르면 천수 부근은 사람이 텅 비어있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고도 하나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조예가 이를 우려하여 정촉호군(征蜀護軍) 진랑을 보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가서 사마의의 지휘를 받게 했는데 장수들이 위수 북쪽에 주둔하며 적에 맞서려 하자 사마의가 백성들이 모두 위수 남쪽에 모여 거주하니 이곳이 필히 다투어야 할 땅이라고 했다.

이는 제갈량이 주둔한 땅에는 백성들이 충분했다는 소리다. 농업 경제의 최대 자원은 노동력이다. 생산량 증대는 고대에는 대체로 토지 면적을 늘리거나 치수 사업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시절이다. 결국 대토지 경작이나 관개 사업은 막대한 노동력이 드는데 당시 천수 부근에 인구가 매우 적었다고 하나 4차 북벌 때도 위군 쪽에서 군량을 각출했다고 하고 관서 부흥책도 있었다 하니 분명 어느 정도 부락을 유지할 정도는 됐을 것이고 제갈량이 데려온 10만의 장병들이 여기 눌러앉아 일부라도, 아니 1~2만 정도라도 꾸준히 둔병한다면 근방 백성들이 노동력 제공에 편승해 토지 경작을 통한 생산량 확보를 공동으로 꾀했을 수 있다. 애당초 이 지역 사람들은 위나라에 그리 호의적이지도 않았고 촉군이 철수해도 경작한 토지나 작물이 남으니 안 도와줄 이유가 없다.

위치상으로 보면 촉이 오장원을 점유함으로써 위수 이남이 촉의 세력 하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오장원이 공격하기 쉬운 지형이냐고 할 수도 없었으니, 오장원에 주둔한 촉군은 위수와 무공수를 통해 도강 중인 적을 요격할 수 있고 도강이 성공해도 오장원은 평지에 불쑥 솟은 150m 지점이라 적을 감제하기도 편하고, 구릉 위의 적을 공격하기도 힘들다. 만약 촉군을 공격하다 패배라도 해서 후퇴해야 한다면? 강이 등 뒤에 있으니 배수진이 되니 후퇴한다 해도 괴멸적인 타격을 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마의가 오장원의 촉군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촉 역시 무조건 공격하기는 힘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지구전으로 가게 되면 보급, 군사수, 화력 측면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공급을 받을 수 있는 위나라 측이 유리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위나라는 오나라와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제갈량이 북벌이 있었던 228년에도 오히려 오나라로 10만 이상의 대군을 파병할 정도였으나, 이 시기가 되면 군부의 1인자로 부상한 사마의가 동생 사마부와 함께 관서 부흥책을 실시하여 대촉 전선을 상당 부분 보강한 상태였다. 다만 이 관서 부흥책이 5차 북벌 당시엔 오히려 역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는데 이 덕분에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버티면서 둔전하기 쉬워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마의가 이후 촉군 퇴각 후 많은 양곡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고. 이렇게 옹주 국경에서 한 줌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벌인 제갈량의 둔전 전략에 위군은 적지않은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때문에 사마의는 촉의 군사 전략과 제갈량의 동태에 계속 신경을 기울이며 수세로 일관했고, 제갈량은 사마의와 싸우기 위해서 여자 옷을 보내며 도발하기도 한다. 때문에 사마의는 이 사신에게 제갈량의 전략은 물어보지 않고, 제갈량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정도만 물어본다. 이때 사신은 제갈량의 유능함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는지 태형 20대 이상은 직접 처리하느니 얘기를 떠벌거렸는데 사마의는 이걸 듣고 제갈량이 너무 자신을 혹사하여 오래 못 살 것이라 예측한 것으로 보인다. 식소사번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자료는 불명이지만) 이 일을 알게 된 제갈량은 조금만 담아도 많은 양처럼 보이는 밥그릇으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이며 기 싸움을 했다고 한다.

종합하면 5차 북벌의 오장원 주둔은 사마의가 버티기로 재미를 봤는데 그걸 역이용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의 방침은 딱 하나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몰아붙이는 것이다. 수년간 내정을 통해 최적화를 마쳤지만 촉군이 불안정한 전력을 가지고 거둘 수 있는 성과는 제한적이다. 모자란 군량, 열세인 기병전력 등 여러 문제를 떠안고 어떻게든 변수를 창출하려고 시도한 게 제갈량이고 그 제갈량에게 기회 자체를 안 주려고 버티던 게 사마의인 만큼 오장원 주둔은 그 카운터로 짜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니 제갈량 전략 자체도 이전 같은 교전의 성과는 없었지만 사마의/사마부 관중 부흥책 싹트려던 와중에 '잿가루 좀 뿌리겠다, 어이구 뭘 이리 많이들 개간했어 우리 좋으라고' 이러며 엉덩이 깔고 앉은...위나라 입장에선 손수건 물어 뜯을 전개. 하여간 이 자체로도 어느 정도 성과라고 자평할 만한 것은 물론 다음을 충분히 노려볼 만한 흐름이었다.

옹양주는 이 시점까지는 아직 위에게 완전히 복속당한 것이 아니었고 당시 위가 옹양을 차지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이전의 북벌에서 천수와 안정, 남안이 흔들린 것처럼, 위는 옹양주에서 민심을 사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 지역은 민심면에서는 촉의 편이었다는 기록이 많은데 여기서 촉이 장기적으로 주변을 천천히 장악하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5차 북벌, 오장원 주둔이다. 오장원의 위치상, 촉이 꼭 장안을 먹지 못했다고 해도, 오장원에서 하던데로 둔전하면서 길게 농성할 수 있다면 이 주변의 군사, 행정력을 촉이 점차 늘려감으로서 위의 관중과 옹양주에 대한 지배력이 크게 흔들리게 되며, 이 지역 이민족과 백성들의 인심을 잡고있던 마초부터 이어지는 마대 일가-강유의 위상을 바탕으로 관중-옹양 겸병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5차 북벌에서 괜히 강유와 마대의 이름이 보이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실제 제갈량이 죽었을 때 그전까지는 싸우려 하지 않았으면서 그제서야 후퇴하는 촉군을 추격하다가 촉군이 기수를 돌려 공격하려 하자 바로 퇴각해 본진에 틀어박힌 사마의를 보고 백성들이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말을 지어 불렀으니 당시 관중 백성들이 촉군과 위군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

계속되는 제갈량의 도발에 사마의를 제외한 위의 장수들은 격분했는데, 공세로 나간다고 해도 승리의 가능성이 높지 않았고,[4] 혹 패하기라도 하면 차후의 전략을 이끌어 나가는 것에도 애로사항이 꽃피는지라 사마의는 장수들의 불만에도 끝까지 지구전─수세로 일관하였다. 사마의는 멀리서나마 겁먹고 나약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대세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말에게 먹이를 먹이는 동안에도 갑옷을 입고서 항상 집어삼킬 듯한 위세를 보였다. 그러나 장수들의 불만이 계속 고조되자, 결국 사마의는 조예에게 출전 허가를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신비가 사절로 파견, 부절을 가져와서 막았는데, 전장에서는 장수의 재량이 폭넓게 인정되는 점과 사마의의 지구전 중심의 전략을 고려해 보았을 때 사마의의 출전 요청은 오히려 출전하지 않을 명분을 위해서였다고 보는 것이 중론. 실제로 한진춘추와 진서 선제기에도 제갈량(諸葛亮)은 그 일을 두고 <사마의(司馬懿)가 그렇게 했던 것은, 제장(諸將)들을 안정시키고, 동요를 막기 위한 허세(虛勢)였을 뿐이었다.>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마의 역시 제갈량을 도발하는데 통전 150권에 따르면 사마의는 2000여 명에게 영내 동남쪽 모퉁이에서 만세를 부르게 시켰다. 제갈량의 사자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사마의가 말하길 손오의 사자가 와서 항복을 청했다고 했다, 제갈량은 이를 알고 "손오가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마의는 곧 60세가 되는 영감인데, 구태여 이런 속임수를 쓸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했다.[5]

조예는 군의 출진을 불허한다. 이렇게 사마의는 장수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고, 양군의 대치는 유야무야 시간만 흘러간다. 이렇게 백여 일의 대치 끝에 제갈량은 8월에 과로[6]와 병세로 쓰러진다. 위서에 따르면 "군량이 다하고 형세가 어려워지자 제갈량은 근심과 분노로 피를 토하고, 하룻밤에 진영을 불사르고 달아나다 계곡으로 들어섰을 때 도중에 발병하여 죽었다."고 하는데 배송지는 암만봐도 당시 형세가 대등했는데 이건 완전 사기야, 위서에서 '계곡으로 들어간 뒤 죽었다'고 한 것은, 촉인들이 계곡으로 들어간 뒤에야 발상(發喪)했기 때문에[7] 생긴 오해라구라면서 《위서》의 기록을 미친듯이 깠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장원은 옹주의 요충지로 제갈량이 이곳에 계속 자리잡고 앉으면서 백성들의 민심을 얻고 살며 대치하였는데 촉에게 형세가 불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이 곽씨(郭氏)의 오(塢, 촌락의 일종)에서 죽었다. 진양추에 따르면 끝이 뾰족한 붉은 별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흘러 제갈량의 진영에 떨어졌다. 세 번 떨어지고 다시 되돌아가니 올 때는 크고 돌아갈 때는 작았는데 갑자기 제갈량이 죽었다. 제갈량이 사망하고 촉군은 철수한다. 사마의는 촉군이 갑자기 철군하자 추격하나, 후군 퇴각을 맡은 강유가 양의쪽으로 군기를 반대 방향으로 든 다음 진군을 의미하는 북을 울리면서 대응하자 사마의는 추격을 중지하고 군사를 거두어 물러났으며 감히 촉군을 핍박하지 못하여[8] 촉군은 퇴각에 성공한다. 그리고 여기서 백성들이 퍼뜨린 말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다는 이른바 사공명주생중달, 뒤늦게서야 제갈량이 죽고 촉군이 철수한 걸 알게 된 사마의는 제갈량의 영채를 방문하여 제갈량에 대해 '천하의 기재로다'라고 평했으며 위의 말에 대해선 '산 사람이면 몰라도 죽은 사람의 속내는 어찌 알겠냐'며 말했다.

<제갈량전>에 달린 주석 《위서》나 《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촉한군이 퇴각한 후 진영을 불살랐다고 하나 정작 제갈량전 본전에서는 사마의가 제갈량의 영루(營壘)와 처소(處所)를 방문했다고 나오고 진서 선제기에도 영루(營壘)로 가서 그의 남은 흔적(遺事)을 살펴보고 그의 도서(圖書)와 양곡(糧穀)을 매우 많이 노획했다고 나온다. 진영을 불살랐다면 이런 흔적이나 잔여물자가 나올수 없었을 것이니 진영을 불살랐다는 것은 잘못된 기록인 듯 하다.[9] 자치통감에도 진영을 불살랐다는 기록은 없고 사마의가 제갈량의 영루가 있던 곳을 방문했다고 나온다. 또 선제기에 따르면 관중에 남가새가 많다는 말을 듣고 사마의는 군사 2천명에게 부드러운 목재로 된 바닥이 평평한 나무신을 신게 해 앞장서게 하고 질려가 모두 나무신에 박힌 뒤 기병과 보병이 함께 진격했고 적안에 도착해서야 제갈량의 죽음을 확실히 알았다고 한다. 《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의는 곧 추격하여 적안(야곡의 남쪽 입구)에 이르렀지만 촉한군을 따라잡지 못하고 퇴각했다고 한다.

결국 견벽거수로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제갈량이 죽고 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제갈량의 주둔했던 기지에서 많은 도서와 양곡을 노획한다. 하염없이 제갈량의 수명, 식량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견벽거수를 노리던 사마의, 사마부 형제에게는 이 상황이 씁쓸하게 다가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1. 진서, 송서 천문지의 기록

4차 북벌급은 아니나 5차 북벌도 《 진서》 <선제기>는 사마의 띄워주기가 심한데 진서 선제기에서는 5차 북벌의 방비는 마치 사마의가 다한 것처럼 되었고 실제로 직접 나가서 막은 곽회의 활약은 거의 없애버린 꼴이 되었다. 진서 선제기는 제갈량이 처음 오장원에서 주둔하고 며칠간 가만히 있었는데 촉군이 양수를 칠 거라는 예측을 곽회가 아니라 사마의가 한 것처럼 왜곡해 기록했고, 호준과 곽회를 양수로 보냈다고 기록했다. 이때 제갈량이 양수를 치다 실패하고 돌아가는 와중에 긴꼬리별(혜성)이 제갈량의 진영으로 떨어졌고 사마의가 이길 징조라 하여 기각지세로 퇴각하는 제갈량의 뒤를 공격해서 참수 5백명, 생포 천여명, 항복 6백명(태평어람 95권에 끌어다 쓴 것엔 60명이 항복했다고 한다), 총 2천명 이상 피해가 났다고 적었다.

그러나 우선 이 당시 촉군 진영 방향에 나타난 혜성의 등장은 손성이 쓴 진나라의 역사를 다룬 사서 《진양추》에 따르면 '끝이 뾰족한 붉은 별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흘러 제갈량의 진영에 떨어졌다. 세 번 떨어지고 다시 되돌아가니 올 때는 크고 돌아갈 때는 작았다. 갑자기 제갈량이 죽었다.'라는 기록으로 갑자기 (8월에) 제갈량이 죽을 때의 일과 연관되지 제갈량의 패배와 관련된 일이 아니다. 또 촉군 상대로 공세를 펼쳐 그 정도 전과를 올린 사마의가 이후엔 공격 안하고 조예한테 조서받는 쇼를 하면서 웅크려 있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또 제갈량전의 주석에도 이 당시 사마의에게 공격을 유도하는데도 오히려 공격을 안해서 문제지 공격당해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은 없다.[10]

또 진서는 제갈량이 기만 기동으로 이리저리 들쑤시고 북원에 간 건 쏙 빼놓았다. 정작 곽회전엔 북원으로 기동하는 제갈량의 첫 번째 진출, 서쪽으로 가는 척하다가 양수를 공격한 제갈량의 두 번째 진출 모두 곽회가 예측하고 가서 막아내 전부 다 제갈량의 공격을 방비한 것으로 나오지 사마의가 예측해서, 앞뒤로 요격했다는 기록 같은것은 없다. 장엄의 묵기 같은 기록에도 '사마의는 자기 자신의 보전에만 급급할 뿐 적을 깨뜨리지 못하였다'라고 썼으며 자치통감의 경우 선제기의 이런 기록을 아예 빼버리고 이 부분을 정사 삼국지 곽회전의 기록을 따랐는데 제갈량이 오장원에 주둔하자 곽회가 북원에 제갈량이 와 농서로 가는 길을 끊고 백성과 이민족을 동요시키러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미리 가서 교전했다는 내용만 집어넣고 양수에서 교전했다는 부분을 아예 빼버렸다.

또, 《 송서》 23권 천문지(상)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明帝青龍二年二月己未,太白犯熒惑。占曰:「大兵起,有大戰。」是年四月,諸葛亮據渭南,吳亦起兵應之,魏東西奔命。九月,亮卒,軍退,將帥分爭,為魏所破。
명제 청룡 2년 2월 기미, 태백을 형혹성이 범하였다. 점을 쳐 왈: '대병이 일어나 큰 싸움이 있을 것이다.' 동년 4월, 제갈량이 위남에 주둔하고 오 또한 병사를 일으켜 응하였다. 위나라는 동서 임금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매우 분주하였다. 9월, 제갈량이 죽었다, 군대가 퇴각하였고, 장사간에 분쟁이 있었으므로 위나라 군사들로부터 깨뜨림을 당했다.
蜀後主建興十二年,諸葛亮帥大衆伐魏,屯于渭南,有長星赤而芒角,自東北,西南流投亮營,三投再還,往大還小。占曰:「兩軍相當,有大流星來走軍上及墜軍中者,皆破敗之徵也。」九月,亮卒于軍,焚營而退。羣帥交惡,多相誅殘。
촉 후주 건흥 12년, 제갈량이 대군을 거느리고 위나라를 쳐 위남에 주둔했는데, 장성이 붉고 까끄라기가 있어, 동북으로 가니, 서남으로 흘러 (제갈)량의 영에 머물렀고, 세 번 머무르고 두 번 돌아오니 큰 쪽은 가고 작은 쪽은 돌아왔다. 점을 쳐 가로되: "양 군이 서로 비슷한데, 큰 유성이 오면 군의 위는 달아나고 또 군중의 사람들은 떨어지니, 모두 패배의 징조다." 9월, (제갈)량이 군중에서 죽었고, 영을 태우고 돌아왔다. 여러 장수가 서로 싫어하여 서로 죽고 죽인 게 많았다.

위 천문기록은 위서 명제기 청룡 2년 기미일에 태백성 형혹성이 범했다는 기록에서 나온것이고, 아래 기록은 촉서 제갈량전에서 인용된 진양추에 기록되어 있는 혜성의 천문 현상을 기록한 것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기록은 몇가지 오류가 있다.

우선 제갈량이 죽은 것은 234년 9월이 아니라 8월(《 정사 삼국지》 <명제기>, <후주전>, <제갈량전>, 《 화양국지》 <유후주지>, 《 자치통감》)[11]이다. 송서 천문지는 일관적으로 제갈량의 죽음을 9월로 잡는 실수를 하고 있을뿐더러 앞의 기록과 뒤의 기록이 다르다. 앞 기록은 서로 싸우다 위나라군에 격파되었다고 하지만 뒤의 기록은 촉의 장수들끼리 죽고 죽인게 많다고 기록한다. 즉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한 《 정사 삼국지》, 《 진서》 <선제기>, 《 화양국지》, 《 자치통감》에는 해당기록이 없다.

진서 선제기는 사마의의 기록이 왜곡되어 그에게 유리하게 적혀 있는 사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위나라 총사인 사마의가 퇴각하는 촉군을 쳐서 깨뜨렸다고 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관중에 마름쇠가 많다는 말을 듣고 사마의는 군사 2천 명에게 부드러운 목재로 된 바닥이 평평한 나무신을 신게 해 앞장서게 하고 질려가 모두 나무신에 박힌 뒤 기병과 보병이 함께 진격했다. 추격하여 적안(赤岸)에 도착한 뒤 제갈량이 죽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선제기는 이후 위연과 양의의 분쟁을 틈 타 사마의가 진군하려다가 (위명제 조예의) 조서를 받아 진군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위연이 남곡구(야곡의 남쪽 입구)를 점거하고 양의를 기다렸다가 양의의 선봉 왕평의 호통에 위연의 군세가 흩어지고 위연이 바로 한중으로 도망갔기에 상황이 일찍 종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마의는 적안(야곡의 남쪽에 위치)까지 추격하면서 촉군 내부의 분쟁을 알지 못했거나 알았어도 이미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제갈량이 말했듯이 '현지 사령관이 수천리 떨어진 황제의 명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나오는 판에 그런 조서 없이 잘 추격해 놓고선 갑자기 이제와서 진서에서처럼 적안에 도착하고나서 사마의가 눈앞에서 위연, 양의가 싸우는데 조서를 받을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서를 받고 눈앞의 적을 두고 후퇴했다는 건 신빙성이 떨어진다.조서 받고 어쩌고 할 그전에 싸움이 끝났을 듯 이는 진서 선제기 특유의 왜곡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치통감은 사마의가 적안까지 추격한 것만 기록하였다.

자치통감》과 《 정사 삼국지》 <제갈량전>도 8월에 제갈량이 군중에서 죽었다고 하고 제갈량전 주석 《한진춘추》와 《자치통감》에서도 제갈량이 군중에서 죽자 장사 양의가 군사를 정돈해 출발했으며(나갔으며) 사마의가 추격하자 강유가 양의에게 정기를 돌리고 북을 울리면서 마치 곧 사마의를 향해 나아갈 것처럼 하게하니 사마의는 이내 물러나 감히 핍박하지 못했고 이에 양의는 진형을 짠 채 물러나고 계곡으로 들어간 뒤 발상(發喪)했다[12]고 한다. 또 정사 삼국지 명제기에서도 퇴각하는 군대를 격파했다는 얘기는 없고 '때마침 제갈량이 질병으로 죽자, 촉나라 군대는 후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고만 되어 있다. 여기에 《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의는 곧 추격하여 적안(야곡의 남쪽 입구)에 이르렀지만 촉한군을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자치통감은 위연과 양의의 기사가 나오고 제갈량에 대한 평가, 종예의 오나라 파견이 나온다음 234년 8월에 있었던 제갈각의 산월정벌 기사로 넘어가고 있으며 이후 기사는 11월 기사이다. 자치통감은 234년 8월에 제갈량의 죽음과 촉군의 퇴각, 제갈각의 산월정벌이 같이 벌어진 것으로 봤다는 말이다.

또한 《촉서》 <후주전>에 위연 양의가 불화해 권력을 다투어 서로 군사를 이끌고 싸웠다고는 하나 《촉서》 <위연전>과 《 자치통감》에서는 (제갈량이 가을, 8월에 죽었는데) 제갈량이 자신이 죽고 나서 위연에게 뒤를 끊게 하고 강유에게 그 다음에 있게 하며 혹 위연이 명을 따르지 않더라도 군이 곧바로 출발하도록 했다고 하며 촉한군이 제갈량의 규범, 규정에 따라 여러 군영들이 차례로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고 나오니 제갈량이 8월에 죽자마자 바로 촉군이 퇴각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위연의 군대가 선봉 왕평의 호통 한 번에 무너져 사졸들이 위연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나와 있으므로 위연과 양의의 분쟁으로 촉군이 상하지도 않았으며, 《 화양국지》 <유후주지>에도 양의가 제군들을 이끌고 성도로 귀환했다고 나오고, 자치통감에도 여러 군대들이 성도로 돌아왔다고 나온다. 또 《촉서》 <양의전>에 양의는 군을 이끌고 되돌아오고 또한 위연을 토벌하니 스스로 공훈이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군대가 위연의 난리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분란을 일으킨 최전방 위연의 군대도 위군에게 공격받은 손실없이 먼저 야곡으로 들어갔고 화양국지에 따르면 한중 남정으로 귀환하여 병력을 보존했으니 이들도 위나라 군대의 추격으로 격파되지도 않은걸 알 수 있다.

또 《 진서》 12권 천문지 중(中)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明帝太和四年七月壬戌,太白犯歲星。占曰;「太白犯五星,有大兵。」五年三月,諸葛亮以大眾寇天水。時宣帝為大將軍,距退之。
위명제 태화 4년 7월 임술일, 태백성을 세성이 범하였다. 점을 쳐 가로되 '태백을 오성이 범하니 대병이 있을 징조입니다.' 5년 3월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고 천수를 침공하니 사마의가 대장군으로서 막아 후퇴시켰다.
青龍二年二月己未,太白犯熒惑。占曰:「大兵起,有大戰。」是年四月,諸葛亮據渭南,吳亦起兵應之,魏東西奔命。
청룡 2년 2월 기미, 태백성을 형혹성이 범하였다. 점을 쳐서 가로되 '대병이 일어나 대전쟁이 있을 징조입니다.' 동년 4월 위남에 제갈량이 거했고 오 또한 병력을 일으켜 응해 위나라는 동서로 바쁘게 오갔다.

이는 사실에 부합하고 있는데 정작 13권 천문지 하(下)에는 제갈량이 죽은 청룡 3년(235년)에 제갈량이 위남에 주둔했다고 하질 않나(青龍三年三月辛卯(중략) 其五月丁亥,太白晝見,積三十餘日。以晷度推之,非秦魏,則楚也。是時,諸葛亮據渭南,宣帝與相持;孫權寇合肥,又遣陛議、孫韶等人淮沔,天子親東征。蜀本秦地,則為秦魏及楚兵悉起矣。), 역시 제갈량이 죽은 촉한 후주 건흥 13년(235년)에 장성이 제갈량의 진영에 떨어지고 9월에 제갈량이 죽은 다음 둔영을 불사르고 서로 미워하여 죽인게 많았다(蜀後主建興十三年,諸葛亮帥大眾伐魏,屯于渭南。有長星赤而芒角,自東北西南流,投亮營,三投再還,往大還小。占曰:「兩軍相當,有大流星來走軍上及墜軍中者,皆破敗之征也。」九月,亮卒於軍,焚營而退,群帥交怨,多相誅殘。)고 잘못 기록하고 있다.

진서 천문지와 송서 천문지의 이 내용들은 실제 사실과 어그러짐이 많고 같은 지(志) 내에서도 모순되는 점이 많으니 믿을 수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천문지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 별 피해 없었던 5차북벌의 후퇴와 그 과정에서 역시 별 피해 없이 진압된 위연의 난이 뻥튀기되어 전승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2.2. 최진열 교수가 주장하는 오장원 전투의 오류

최진열 교수[13] 동북아역사재단[14] 기록한 기록에 따르면 기록에 고의적인 오류가 있다고 한다. 여러 기록을 검토하면 오장원은 전군(前軍)의 주둔지다. 다시말해서 선봉대만 주둔했다는 의미다. 오장원 이외에도 촉군은 주둔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기록의 오류가 많은 것은 진수가 사마씨들의 압력으로 제갈량의 북벌을 축소했다고 주장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출저인 있는 최진열 교수의 논문

그리고 최진열은 자신의 역사 삼국지라는 책에서 이런 주장의 추가 설명을 했는데 사마의가 제갈량의 진군로를 완벽하게 예측하지 않았으며 진수가 과장을 했다고 했다. 지리적인 문제로 오장원에만 주둔하면 퇴로 확보가 어렵고 군량 운송로가 습격 당하기 쉽다고 한다. 그렇기에 미현과 무공현에도 주둔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오류가 많이 발생하는 원인을 진수가 사마의의 군공을 부풀리기 위한 편향 서술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3. 대중매체

3.1. 삼국지연의

제갈량은 다시금 기산으로 출진하지만 이번엔 사마의에게 간파되어 공격을 당해 참패한다. 이전까지 사마의를 압도하던 장면을 생각하면 제갈량의 북벌이 험난해졌음을 보여주는 장면.

연의의 묘사에서 제갈량 본인이 사마의에게 깨끗하게 당하는 건 이 경우가 유일하며, 실제로 촉군의 북원 공격을 막아낸 주역은 곽회였다. 다만 정사의 뉘앙스를 볼 때, 곽회의 간언으로 허겁지겁 북원과 양수에서 위군이 간신히 방어 준비를 한 다음 촉군이 들어쳤다가 소득없이 물러난 것이 확실하고 연의처럼 제갈량이 참담한 패배를 겪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갈량을 띄워주던 연의가 정작 여기선 왜 제갈량이 참패하는 것으로 묘사했는지는 미스테리다.

호로곡 전투에서 제갈량은 사마의를 거의 죽일 뻔하고 위나라 병사의 태반을 상하게 하는 대승을 거두는 것으로 균형을 잡으려고 한 것으로 보이는데, 호로곡 전투와 동시 진행된 기산의 촉군 공격 작전에 참가한 위군의 8~9할 병사가 박살이 난 대참패로 묘사되고 이 작전을 통해 제갈량이 사마의의 위수 남쪽 진채를 빼앗았다고 묘사하기 때문이다. 실제 정사상으로는 맹염이 이끄는 촉군이 위수 남쪽으로 진출하자 사마의의 기병이 공격했는데 제갈량 본대가 강 건너편에서 활을 쏘면서 공격하고 동시에 다리를 놓아 도하 준비를 하니 퇴각했다는 걸 각색한 것.

제갈량은 호로곡의 대승을 거두지만 큰 비로 인해 원 목적인 사마의를 태워죽이는 데는 실패하는데, 실제로는 삼국시대 당시에는 호로곡이라는 지명이 없었다고 한다. 제갈량은 사마의를 죽이는 목표가 실패함을 아쉬워하며 모사재인 성사재천을 외치는데 일은 사람이 하나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는 것이다.[15] 이는 이후 제갈량이 수명이 다했을 때 별에 기도를 하여 수명을 늘리려는 시도가 '반골' 위연에게 의해 방해되어 실패하는 장면과도 합치된다. 독자들은 사마의를 잡지 못해 대한의 부활이 무산되고 모욕을 당하고도 사마의가 더이상 나가 싸우지 않으며 제갈량의 병이 깊어져 더이상 북벌을 진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제갈량이 오장원에 오는 것이 상방곡 전투 이후로 나오고 사마의가 정사에서와는 달리 오히려 기뻐하는 묘사가 들어간다.

3.2. 삼국지 조조전

가상 모드 4장의 끝에 오장원 전투 1~2가 있다. 허나 가상모드는 조조전 고유의 서사이므로 정사나 연의에 있었던 그 오장원 전투와 다르다. 오장원 전투 1편(五丈原の戦い)은 개활지에서 진행되므로 기마책사계 사마의의 모래폭풍이 결전병기이다. 강유를 죽이는 게 승리조건이다.

오장원 전투 2편(五丈原の戦い 弐)은 최종전으로서 오장원 지하의 함정을 뚫고 제갈량 마왕을 쓰러뜨리는 게 승리 조건이다. 예토전생한 여덟 귀신들은 북쪽 방에서 인형류처럼 4턴마다 부활한다. 서쪽 방에 두 명이 들어가면 문이 닫히면서 귀신 유비 및 장비가 등장한다. 2대2로 싸워야 한다. 장비는 소리를 지르고 서문 밖 인원들은 혼란에 걸린다. 미리 인원들을 한 곳에 모으고 무희계 초선을 가운데에 배치하여 주변에 있는 아군들의 상태 이상을 즉시 치료하는 게 좋다. 서쪽에 들어간 두 명이 체력이 다 하여 퇴각하면, 닫혀있던 서문이 다시 열린다. 그러나 어복포 전투에서처럼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인원을 배치시킨다면, 문이 닫히지 않는다.
지역 지형 등장
동쪽 여울 노숙, 여몽, 주유 및 나무인형
남쪽 황무지 손견, 손책, 손권 및 흙인형
서쪽 평지 유비 및 장비
북쪽 성내 제갈량 마왕 및 여덟 귀신들
(전장에 진입)
조조: 수상한 지하 통로다. 어복포와 비슷한 분위기로군.
사마의: 네 개의 방이 있는 것 같군요. 문은 닫혀 있는 것 같습니다만, 공명은 어디에 있는지.
하후연: 오른쪽으로의 길은 문이 닫혀 있지 않군.
조조: 좋다, 우선 오른쪽 방의 상태를 보자. 몇 명 따라와라. (6명 오른쪽으로 감)
허저: 안에 누가 있는 것 같군.
전위: 저것은 주유가 아닌가!?
서황: 여기에서 보니 습지인 것 같군요. 불길한.
조조: 주유가 어째서 여기에!? 그들은 죽었을 텐데. 이 지하 제단은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힘이 있는 것인가?

노숙: 으아아아, 머리가 아프다. 몸이 아프다. 여기는 어디지. 내가 어째서 여기에 있지.
여몽: 저기에 있는 것은 조조가 아닌가. 그렇다면 여기는 싸움터인가?
주유: 조조? 조조? 생각났다. 맞다. 오를 위해서라도 조조는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나무인형들이여, 조조를 쓰러뜨려라.
(게임 시작)

(대화: 초선과 노숙)
노숙: 우와아, 가까이 오지 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괴롭다, 누가 도와 다오.
초선: 가엽게도. 공명도 이렇게 심한. 곧 편안히 해 드리지요.

(대화: 정욱과 여몽)
여몽: 「궈, 권, 토중 중」으으으,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정욱: 「권토중래」가 말하고 싶은 것이군.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가엾게도. 공명 용서할 수 없다.

(대화: 곽가와 주유)
곽가: 주유, 세상에서 드문 천재 군사도 이렇게 되니 가여운 존재로군.
주유: 천하는 오가 통치한다. 아무라도 방해하지 못하게 하겠다.
곽가: 오는 이미 멸망했다. 생각해 내라, 주유.
주유: 아아, 머리가 아프다. 눈에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 귀에 들리는 것은 황량한 바람, 아아.
곽가: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군.

(퇴각)
노숙: 후우우우, 겨우 잘 수 있겠군. 고맙다.
주유: 의식이 확실해지는 것도 희미해지는 것도 같은 이상한 느낌이다. 공명을... 반드시 쓰러뜨...
여몽: 전부 확실해진다. 난 죽는 거로군. 두 번 죽는 것도 재미있겠군.

(오른 쪽 책사들을 꺾은 후)
조조: 여하튼 쓰러뜨렸다. 공명은 여기에 없는 듯 하군.
초선: 다른 방을 찾아봅시다.
가후: 어딘가에 공명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조조: 중앙으로 돌아가자.

(아래쪽 문이 열림)
하후돈: 응? 뭐지.
순욱: 밑쪽의 방문이 열린 것 같습니다.
조조: 문이 열렸군. 아무래도 방의 적을 모두 쓰러뜨리면 다음 방문이 열리는 것 같군.

(손씨 집안 등장)
손견: 난 누구지. 모든 것이 텅 비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손책: 아버님! 손권! 여기는 대체.
손권: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조조의 냄새가 납니다. 조조는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손견: 그런가, 조조를 쓰러뜨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가. 그렇다는 조조는 어디냐! 어디에 있지.

조비: 아무래도 소생한 것은 손권들인 것 같군. 후훗, 조씨 집안 대 손씨 집안의 대결인가. 재미있군.
조조: 좋다, 손권을 쓰러뜨리러 가자. 이 세상의 미련과 함께 매장해 버려라!
조창: 손책이라면 태사자와 일기토를 겨룬 소문난 맹장. 겨루고 싶군.

(대화: 하후돈과 손견)
하후돈: 난 하후돈이다, 사수관에서 만났지. 기억하고 있느냐?
손견: 아무것도 기억에 없다. 넌 누구냐, 왜 방해를 하지.
하후돈: 불쌍하게도. 내가 지금 저 세상으로 보내 주겠다.

(대화: 조창과 손책)
조창: 손책님, 나와 승부를 겨루시오.
손책: 조조는 어디에 이느냐. 방해하는 자는 모두 처치하겠다. 어디냐, 조조!
조창: 으, 들리지 않는가?

(대화: 장료와 손권)
장료: 손권, 나를 기억하느냐.
손권: 으으, 기억하고 있다, 하비에서의 굴욕은 잊지 않고 있다.
장료: 너는 공명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얌전히 저 세상으로 돌아가거라.
손권: 난 조종당하고 있는 건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너도 쓰러뜨리겠다.
장료: 손권님. 곧 해방시켜 주겠소.

(퇴각)
손견: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생각하는 것도 성가시군. 잠들도록 하자.
손책: 후우, 그럼.
손권: 모든 생각이 없어진다. 이것으로 편안히 잠들 수 있겠군.

(손씨 집안을 꺾고 왼쪽 문이 열림)
조조: 아무래도 다음 문이 열린 것 같군.
조인: 다음 방에서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조홍: 남은 방은 두 개. 공명놈, 기다리고 있어라.
악진: 주공, 다음으로 갑시다. 공명을 발견하지 않으면.
우금: 무슨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신중하게 갑시다.

(왼쪽 방에 두 명 진입)
조조: 아무도 없나?
조인: 이상하군요?
방덕: 방심은 금물입니다.
곽가: 상대는 공명입니다. 반드시 뭔가 있습니다.

(유비, 장비 등장)
유비: 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장비: 조조군이 있다. 그렇군. 이것은 너희들 탓이다. 조조를 쓰러뜨리면 되는군.
관우: 형님! 장비! 공명놈, 형님의 혼을 농락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장비: 조조는 어디에 있느냐아아아아아! (장비의 고함)

조조: 이렇게 큰 소리를 지르다니. 고막이 찢어지겠다. 지하 동굴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참을 수가 없군.
이전: 뭐지, 뭐지!
유엽: 사람 소리인가, 이것은.
만총: 뭐지, 공명의 함정입니까?
조조: 진정해라, 제길! 수습할 수가 없군! (단체 혼란)

(두 명이 왼쪽 방에 진입하여, 문 닫힘)
조조: 제길! 통로 내에도 함정이 있는 듯 하군.
순유: 으, 공명의 함정에 빠졌는가.

(대화: 조조와 유비)
조조: 유비, 정신 차려라.
유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느낄 수 없다. 조조, 너만이 보인다.

(대화: 관우와 장비)
관우: 장비,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의식은 있는가, 장비!
장비: 관우 형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난 무엇을 하고 있소. 관우 형님, 난 어찌하면 좋소.
관우: 장비. 적어도 내 손으로 안식을 주겠다.

(퇴각)
장비: 만족한다.
유비: 죽어가는데도 마음은 편안하군. 그럼.

(유비, 장비를 꺾고 윗 문이 열림)
조조: 아무래도 마지막 문이 열린 것 같군. 자, 전군 돌입해라! 공명을 토벌해라!
정욱: 나머지는 공명을 쓰러뜨리는 일뿐.

제갈양: 드디어 여기까지 왔느냐. 앞으로 조금이었는데. 너희들에게 다시 일을 부탁해야겠다!
유비: 으, 아아.
장비: 으으으, 아아아.
제갈양: 과연 두 번 죽으면 사람의 마음도 없어지고 마는가. 하지만 이 편이 조작하기 쉽다. (나머지 원혼 등장) 조조가 죽기만 한다면 너희들도 해방시켜주겠다. 자, 녀석들을 저지해라!

(귀신 재등장 후 다음 턴)
제갈양: 하하하. 끝났다, 드디어 마지막 기도도 끝났다! 천 년의 때를 얻어 드디어 여기에 소생하는 것이다. 봐라, 마왕 부활의 그 때를! 네 문의 힘을 빌려 마왕에게 봉해진 내 힘을 이 세상에 풀어 놓겠다. 청룡, 주작, 백호, 현무여! 마왕의 세계로부터 길잡이가 되어 이 세상에 마왕을 강림시켜라. ...? 왜 그러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째서 청룡은 대답하지 않느냐!?
조조: 하하하. 유감이군. 허도의 제단도, 기도도 가짜다.
제갈양: 하지만, 동쪽에서 확실히 청룡의 낌새가.
조조: 서서가 만든 가짜 낌새. 봉인을 푸는 제단 따위 만들지 않았다.
제갈양: 서서놈, 나를 속이다니. 으, 그렇다면 너를 쓰러뜨려 허도로 들어갈 뿐이다. 망령들이여, 조조를 쓰러뜨려라! 이 지하에서 살려 보내지 마라!
장합: 허도로 가지 못하게 하겠다. 모든 사람의 원대로 너를 토벌하겠다.
순유: 위, 오, 촉의 사람들이 모두 평화를 구하며 죽어갔다.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는 않겠습니다.
장료: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이 세상을 네 맘대로 움직이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쓰러뜨리겠다!

(대화: 조조와 제갈양)
조조: 도망칠 곳이 없는 지하로 들어간 것이 네가 패한 원인이다. 너도 여기까지로군.
제갈양: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다. 당신을 쓰러뜨린다면 위, 오, 촉은 괴멸. 위는 내 것이 됩니다.

(퇴각)
제갈양: 고작 인간에게. 으악! (전투 종료)


[1] 이 때문에 호삼성은 사마의의 오장원 점거 예측은 맞는데 이를 힘으로 제압하기 어려워 제장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게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2] 제갈량의 원융노였을 것이다. [3] 촉한의 경우 기병전력이 위나라보다 열세였을것으로 추정되고 따라서 막 도강한 제갈량의 군대를 기병전력의 우세를 앞세워 사마의가 촉군을 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엄두도 못내고 후퇴했다는 거 자체가 이 당시 야전에서 위나라가 전술적으로 촉한군에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4] 우선 상대가 그 제갈량이었고, 오장원 역시 공성에 유리한 지형은 아니었다. [5] 통전 이편의 마지막에서 이르길 '공명이 오나라가 항복하지 않음을 헤아리는건 밝음이요, 사마의가 제갈량의 죽음을 헤아리지 못한건 어두운 것'이라 하였다.(孔明料吳不降,明矣。司馬不料亮死,暗矣) [6] 사실은 제갈량은 비의로부터 전해져온 오와 위의 2차전의 결과(오의 패배)소식을 전해듣고 쓰러졌다고 할 수 있다. [7] 한진춘추의 기록. [8]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猶恐亮未死也'(오직 제갈량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9] 마침 제갈량전 주석 위서는 배송지가 비판했기도 하고. 제갈량이 자신이 죽은 후 위연이 뒤를 막도록 하고 위연이 말을 듣지 않으면 곧바로 출발하라고 명을 내렸기에 제갈량이 죽은 이후 바로 비의가 위연이 말을 듣지 않는걸 확인하자마자 영을 태울 시간도 없이 곧장 출발했을 것이다. [10] 오히려 제갈량전에는 안 나오지만 제갈량이 직접 쓴 기록에 따르면 처음 위수에 도착했을때 사마의의 1만 기병을 퇴각시킨 기록이 있다. [11] 애당초 자치통감 등의 기록에서 제갈량과 사마의가 4월부터 몇번 부딪친 이후 대치한지 100여 일 지났다고 했으므로 4월부터 8월까지 대치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12] 자치통감에 따르면 야곡에 들어간 후 제갈량의 상사를 발표했다고 한다. [13]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연구 교수로 위진남북조시대 전문의 동양사학자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전공 시대에서 알 수 있듯이 '호한체제론'으로 유명한 박한제 교수의 제자이다.) 교수로 재직중이다. 수많은 역사책을 출판했는데 2008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올해의 청소년 도서와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14] 동북아 역사재단은 대한민국 사학계에서 위상이 높다. [15]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과도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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