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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Корса́ков (코르사코프)
영어: Korsakov (코르사코프)
일본어: コルサコフ/大泊 (코르사코후/오도마리)
1. 개요
코르사코프 시의 위치. 남쪽에 일본 땅인 홋카이도가 있다. 서쪽은 연해주. |
코르사코프 Корсаков |
|
설립 | 1853년 |
인구 | 34,023 (2020) |
시간대 | UTC+10 |
2. 역사
문자 기록이 적어 초기 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곳에는 쿠슌코탄(Kushunkotan)이라 불리는 사할린 아이누 어촌이 있었다.[1] 에도 시대였던 1679년 마츠마에 번이 이 일대에 어장을 설치하면서 사할린 섬 최초로 일본인의 진출이 시작하였다. 1790년대부터는 마츠마에가 상인들이 자주 이곳을 찾았을 정도로 꽤나 번성했다.1853년 9월 22일 겐나디 네벨스코이가 이끄는 러시아 원정대가 이곳에 러시아 국기를 게양하고, 동시베리아 총독의 이름을 따 "무라브요프스키 요새"를 세웠다. 이후 1869년 8월에는 "코르사코프스키 요새"로 이름이 바뀌었다.[2] 이미 일본은 17세기부터 이 일대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러일 양국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일본령 시절의 이름은 오도마리(大泊; おおどまり)였다. 이는 아이누어로 "큰 항구"를 뜻하는[3] 포로엔토마리(Poro-en-tomari)의 일부만 "크다"를 의미하는 일본어 어근 '오오'로 번역한 것으로 생각된다. #[4] 러일전쟁 이후 1905년부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까지 사할린 섬을 일본이 통치했던 시절에는 일본 열도 본토에서 사할린으로 들어가는 창구 역할을 했다. 개척 초기에는 유즈노사할린스크보다도 더 큰 도시였지만 20세기 초에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밀리게 되었다.[5]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면서 소련 영토가 되었고, 소련 해군에 의해 비밀도시로 있었다.
3. 교통
홋카이도 왓카나이역에서 이 도시의 오도마리 역까지 철도연락선인 치하쿠 연락선(稚泊連絡線)으로 연결되었다가 소련군이 남사할린을 점령한 이래로 소련과 일본이 적대 관계가 되어 왕래가 끊어졌다.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난 후에는 왓카나이에서 이 도시까지 정기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다. 2015년에 한 번 단항한 적이 있고, 2016년부터는 여름철에만 주 2회 왕복 운항하다가 2019년 다시 끊어졌고 코로나 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연타를 맞아 2020년대 중반까지 복항은 요원하다. 코르사코프 - 왓카나이 간 이동은 인근의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으로 가서 신치토세 공항으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 이후 육로로 이동해야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로는 이러한 항공편마저도 단절되었다.
4. 여담
- 포켓몬스터 DP의 신오지방 파이트에리어가 이 도시를 모티브로 하였다.
- 전쟁이 끝나고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할린에서 죽어갔던 한인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인 "망향의 탑"이 이 도시에 존재한다.
- 인근의 사할린 핵심 도시인 유즈노사할린스크가 1946년에 개명된 이름인 데에 비해[6] 코르사코프는 위 역사에서 보듯 1860년대에 비교적 일찍 오늘날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5. 동음이의어
-
코르사코프 증후군
주로 오랜 기간 알코올 의존증의 결과로 나타나는 뇌 손상이 원인이 되어 유발되는 심각한 기억 장애. 2019년 5월 16일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를 통해 소개된 '28년 만의 모자 상봉' 사연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 문서 참조. -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19세기 러시아의 국민주의 작곡가. 문서 참조.
[1]
이를 일본에서는
久春古丹이라고 표기했다.
#
[2]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1890년도 경)에서는 이 시기에 처음 코르사코프 정착을 시작한 러시아인으로 쉬쉬마료프라는 사람이 언급되는데 체호프는 그가 죽고 나서야 사할린에 당도해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한다. 주변 러시아인들 사이에선 그가 워낙 오래 거주한 나머지 "사할린이 솟아날 때부터
바다사자랑 쉬쉬마료프가 있었다"라는 묘한 사할린 전설까지 돌았다던 모양이다.
[3]
'토마리'가 아이누어로 "항구"를 의미한다.
홋카이도
시리베시 종합진흥국에도 '
토마리무라'라는 지역이 있는데 어원은 "항구"로 동일하다.
[4]
다른 명칭으로 핫카토마리(Hakka-tomari)라고도 했다. 체호프의 "사할린 섬"에서는 '하흐카토마리'(Hahka-tomari)로 나온다.
[5]
초기의 해안 도시 - 이후 확대된 중앙 도시의 관계는
홋카이도의
오타루시-
삿포로시와도 유사하다. 다만 삿포로는 인구 200만 명의 대도시로 인구 40만 명인 유즈노사할린스크보다 규모가 압도적으로 크며, 삿포로는 반대편
토마코마이시 쪽 항구도 활용 중이지만 유즈노사할린스크는 지금도 여전히 코르사코프 외에 비견할 만한
외항을 찾기 어렵다.
[6]
과거의 이름은 '블라디미롭스카'였으며, 일본령 시절에 '토요하라'로 개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