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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5:06:42

예밍헌 전투

파일:헤밍헨 전투.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스페인군3.2. 네덜란드 반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68년 7월 21일 동프리슬란트의 예밍헌(오늘날의 독일 니더작센주 옘굼/Jemgum)에서 로데베이크 판나사우가 이끄는 네덜란드 반군과 알바 공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맞붙은 전투. 네덜란드 반군은 이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2. 배경

1568년 5월 23일, 빌럼 판오라녀의 동생 로데베이크 판나사우가 이끄는 네덜란드 반군은 흐로닝언의 헤일리헤를레이에서 아렌베르크 공작 얀 판리뉴가 이끄는 스페인군을 격파했다.[1] 그 후 로데베이크는 흐로닝언시에 사람을 보내 알바 공의 폭정에 맞서 싸우자고 권고했다. 그러나 흐로닝언시가 거절하자, 로데베이크는 도시를 포위했다.

당시 네덜란드 북부 일대를 돌며 자원병을 모집하던 빌럼은 알바 공이 친히 진압군을 이끌고 올 것을 염려해 동생에게 델프제일로 철수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로데베이크는 거절하고 흐로닝언시를 계속 포위했다. 그러나 몇 차례에 걸친 공성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사이 알바 공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흐로닝언으로 진격했다. 이윽고 스페인군이 인근에 이르렀다는 급보를 접한 로데베이크는 도시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하지만 스페인군의 추격 속도는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양측은 7월 21일 예밍헌에서 조우했다. 이리하여 예밍헌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스페인군

3.2. 네덜란드 반군

4. 전투 경과

로데베이크는 적군의 추격이 예상보다 빨라서 곧 따라잡힐 걸 알게 되자 예밍헌의 엠스 강둑 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우익의 측면은 늪지대로 보호되었고, 좌익은 예밍헌 마을에 주둔했다. 또한 로데베이크는 전면에 세워진 제방을 보루로 삼았고, 각각 5,000명으로 구성된 2개 여단을 도랑 뒤편에 배치했다. 그 뒤에는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대포 16문이 후방에 설치되었다. 그는 이 정도 방비라면 적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얼마 후 전장에 도착한 알바 공은 반란군이 제방을 전면에 내세우고 버티고 있는 걸 보고, 정면 공격은 실패하리라 봤다. 그는 계책으로 공략하기로 하고, 3개의 아퀘버스 부대(1,500명)와 300명의 기병들을 전방에 내세워 적의 시선을 잡아끌게 했다. 그 후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적이 포진한 강둑 주변에 포진했는데, 숲에 몸을 숨겨서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스페인 전위 부대는 3시간 동안 반란군 전선을 조심스럽게 공격했고, 네덜란드 반군은 손쉽게 격퇴했다.

이후 정찰병들이 인근에 스페인군이 없다고 보고하자, 로데베이크는 전방에서 설치고 있는 소규모 스페인군을 섬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진격 명령을 내리자, 반란군은 즉시 출격했다. 스페인 전위 부대는 곧바로 후퇴했고, 반란군은 추격했다. 그러나 몇백 미터 추격했을 때 숨어있던 스페인군이 맹렬한 사격을 가했고, 뒤이어 보병대와 기병대가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반란군 장병들은 적의 갑작스런 습격으로 패닉 상태에 빠져 강둑 쪽으로 허겁지겁 달아나다 도륙당하거나 많은 이가 강에 몸을 던져 익사했다. 로데베이크는 갑옷과 무기를 모두 버리고 엠스강을 가로질러 헤엄쳐 간신히 탈출했다. 이리하여 예밍헌 전투는 스페인군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네덜란드 반군은 예밍헌 전투에서 7,000명에 달하는 사상자 및 포로를 기록했다. 반면 스페인군의 사상자는 100명 미만이었다. 알바 공은 노획한 대포 16문을 녹여서 자신의 동상을 제작해 안트베르펜에 세우게 했다. 한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로데베이크는 빌럼과 합류하였고, 빌럼은 일단 프랑스로 가서 위그노와 합세한 뒤, 가을에 3만여 병력을 이끌고 네덜란드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양측은 1568년 10월 20일 조도뉴 전투를 치른다.


[1] 헤일리헤를레이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