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판나사우 장군의 죽음. 1863년 페르디난트 에른스트 린츠(Ferdinand Ernst Lintz)작.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68년 5월 23일 네덜란드 흐로닝언의 헤일리헤를레이(Heiligerlee)에서 로데베이크 판나사우가 이끄는 네덜란드 반군과 아렌베르크 공작 얀 판리뉴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맞붙은 전투. 네덜란드군의 첫 번째 승리이다.2. 배경
네덜란드, 벨기에 등 저지대 일대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속했지만, 특정 가문에게 오랜 지배를 받지 않아 여러 도시가 자치권을 누리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151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카를 5세가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가혹한 징세를 감행하자 네덜란드 주민들의 반감이 심해졌고, 1539년 폭동이 일어났다가 가혹하게 진압되기도 했다. 게다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는 네덜란드에 개신교가 확산되자 1550년 4월 29일 개신교 신자를 모조리 사형에 처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에 네덜란드인들의 제국에 대한 불만은 갈수록 심해졌다.1556년 카를 5세가 퇴위한 후, 장남인 펠리페 2세가 스페인 국왕으로서 네덜란드를 지배했다. 그는 네덜란드를 식민지로 취급하고, 부친보다 더욱 가혹한 과세와 종교 탄압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이복누이인 마르게리타를 네덜란드 섭정에 임명하여 성직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주교의 숫자를 늘리는 등,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를 스페인식으로 개편하려 했다. 이에 네덜란드 주민들은 고유한 자치권에 대한 침해라고 여기고, 깊은 반감을 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 총독 알바 공은 가혹한 종교 정책을 추진했고,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군이 급료가 계속 밀리자 먹고살기 위해 갖은 약탈을 자행했다.
이를 보다 못한 귀족들은 빌럼 판오라녀를 중심으로 마르가리테를 찾아가 억압적인 통치를 완화해 달라는 내용의 공개 서한을 바쳤다. 마르가리타는 이들의 호소를 펠리페 2세에게 알렸지만, 펠리페 2세는 묵살했다. 결국 1566년 칼뱅주의자들이 봉기를 일으켜 네덜란드 전역에서 성상 파괴 운동을 전개했다. 펠리페 2세는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알바 공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알바 공은 네덜란드 의회를 무시하고 철권통치를 실시했으며, 특별 종교 재판을 열어 수천 명을 처형했다. 심지어 네덜란드 귀족들까지 개신교도에게 동정적이었다며 처형했다.
결국 빌럼 판오라녀는 아내의 친정인 작센으로 피신하였고, 그의 영지는 몰수당했다. 이후 작센에서 용병을 끌어모으고 프랑스의 위그노들과 연합한 뒤, 동생 로데베이크, 아돌프와 함께 1568년 4월경 네덜란드로 진격했다. 그는 네덜란드 북부의 여러 도시를 돌며 봉기를 촉구했고, 동생 로데베이크와 아돌프는 프리슬란트에서 병사를 모집한 후 흐로닝언으로 향했다. 알바 공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대를 파견해 진압에 나섰는데, 그중 1개 부대가 흐로닝언으로 향했다. 이리하여 1568년 5월 23일, 로데베이크가 이끄는 반군과 스페인 진압군이 흐로닝언의 헤일리헤를레이에서 조우했다.
3. 양측의 전력
3.1. 네덜란드 반군
- 지휘관: 로데베이크 판나사우
- 병력: 보병 3,900명, 기병 200명.
3.2. 스페인군
- 지휘관: 아렌베르크 공작 얀 판리뉴
- 병력: 보병 3,200명, 기병 200명.
4. 전투 경과
1568년 5월 23일, 흐로닝언에서 주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로데베이크는 진압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헤일리헤를레이의 수도원이 위치한 언덕에 진영을 세웠다. 언덕 앞에는 도로가 있었고, 길과 언덕 사이엔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로데베이크는 참호를 파서 보병들을 숨겨놓고, 동생 아돌프에게 적을 유인하는 임무를 맡겼다. 아돌프는 지시에 따라 기병 200기를 데리고 스페인군을 공격했으나, 미처 후퇴하기 전에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당시 진압군 지휘관인 아렌베르크 공작 얀 판리뉴는 추가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하지만 적 지휘관이 전사하고 적 기병대가 뿔뿔이 흩어지는 걸 보자, 이들을 추격하여 격멸해야겠다는 유혹에 넘어갔다. 그는 전병력을 이끌고 추격했고, 네덜란드 기병들은 언덕 사이의 길을 건너며 적군을 유인했다. 이윽고 스페인군이 늪지대에 들어서자,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쏴서 적병 다수를 사살했고, 뒤이어 보병들이 들이쳐서 늪지대에 빠진 스페인군을 공격했다.
아렌베르크 공작은 적의 공격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전사했고, 지휘관을 잃은 스페인군은 패주했다. 이리하여 헤일리헤를레이 전투는 네덜란드 반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스페인군은 이 전투에서 400~5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아렌베르크 공작 얀 판리뉴가 전사했다. 반면 네덜란드 반군은 50명가량이 죽었는데, 그중엔 아돌프 판나사우도 있었다. 로데베이크는 동생의 시신을 엠덴에 묻은 뒤, 수도원을 불태우고 각지에 사람을 보내 스페인군을 물리친 사실을 알리고 알바 공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했다. 이에 많은 주민이 호응하면서, 그의 병력은 1만 2천 명으로 불어났다.이후 로데베이크는 흐로닝언시에 사람을 보내 알바 공의 폭정에 맞서 싸우자고 권고했다. 그러나 흐로닝언시가 거절하자, 로데베이크는 흐로닝언을 포위했다. 빌럼은 진압군이 올 것을 염려해 동생에게 델프제일로 철수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로데베이크는 거절하고 흐로닝언시를 계속 포위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그 사이, 알바 공 본인이 친히 이끄는 스페인군이 흐로닝언으로 진격했다. 이에 로데베이크는 흐로닝언시 포위를 풀고 알바 공의 군대와 맞서기로 했다. 그러나 1568년 7월 21일에 벌어진 예밍헌 전투에서, 로데베이크가 이끄는 네덜란드 반군은 처참하게 패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