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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0:27:58

조도뉴 전투


파일:조도뉴 전투.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네덜란드 반군3.2. 스페인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68년 10월 20일 브뤼셀에서 동쪽으로 45km 떨어진 조도뉴(Jodoigne)[1]에서 빌럼 판 오라녀의 네덜란드 반군과 알바 공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맞붙은 전투. 스페인군이 완승을 거뒀다.

2. 배경

1568년 7월 21일, 빌럼 판 오라녜의 동생 로데베이크 판 나소가 이끄는 네덜란드 반군은 네덜란드 흐로닝언의 예밍헨에서 알바 공이 이끄는 스페인군에게 대패했다.[2] 로데베이크는 갑옷을 전부 벗어던지고 엠스 강에 뛰어들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네덜란드 북부 도시들을 돌며 군사를 모집하고 있던 형 빌럼과 합류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프랑스로 망명한 뒤 재산을 대대적으로 털어서 병사를 모집하고, 위그노 세력과 결탁해 장차 네덜란드로 진격할 기회를 노렸다.

그해 가을, 빌럼은 엑상스(현재 발제르베르크)에 병사들을 집결했는데, 그 규모가 25,000~30,000 명에 달했다. 그는 이 정도 병력이라면 알바 공의 스페인군을 상대할 만하고, 알바 공의 폭정에 시달리는 네덜란드 주민들도 호응하리라 예상하고 10월 5일에 출정하여 그날 밤 뫼즈강을 건넜다. 그의 군대는 10월 6일 요새화된 도시 스톡하임에 입성하였고, 이튿날 통그레스 성읍을 장악했다. 하지만 스톡하임은 작은 도시였기에 빌럼의 대군을 지원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빌럼은 리에주 시에 물자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한편, 알바 공은 예밍헨에서 대승을 거둔 뒤 네덜란드의 소요를 억누르는 데 사활을 걸었다. 대표적인 네덜란드 대귀족이었던 에드몽드, 호른 백작은 브뤼셀 시장 광장에서 재판을 받은 뒤 공개 참수형에 처해졌다. 알바 공은 뒤이어 베로에르텐 평의회를 통해 반역자로 규정된 귀족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주민들은 알바 공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맞서려 하지 못했다. 그래서 빌럼이 대군을 이끌고 왔을 때 호응하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알바 공은 빌럼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10월 7일 그의 군대와 함께 마스트리히트에서 출진했다. 양군은 10월 9일 통그레스 인근에서 소규모 접전을 치렀다. 이후 빌럼은 10월 10일 생트롱에 입성한 뒤 그곳의 수도원을 약탈하고, 수도원장에게 몸값으로 2만 크라운을 지불하라고 강요했다. 군자금이 부족해진 빌럼으로선 부득이한 조치였지만, 이 일로 주민들은 빌럼의 군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비협조로 일관했다. 그 후 빌럼은 군대를 서쪽으로 이동하여 마스 강을 건너 마스트리히트를 위협했다. 이를 통해 알바 공이 회전에 응하도록 유도하려 했지만, 알바 공은 빌럼이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사전에 파악하고, 시간을 끌면 빌럼의 병사들이 보수를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리라 예상해 회전에 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알바 공은 빌럼의 반란군을 바짝 추적하며 낙오병들을 사로잡았다. 반란군 장병들은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쫓기는 입장이 된 데다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자 불만을 품었다. 급기야 폭동이 일어났고, 빌럼은 칼집에 총탄이 박힌 덕분에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던 중 프랑수아 드 앙제가 이끄는 위그노 군대가 뫼즈 강을 건너 샤를몽트 요새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빌럼은 와브르에서 위그노 군대와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알바 공은 그들이 순순히 합류하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고, 와브르로 가기 위해 조도뉴에서 글로트 게테 강을 건너고 있던 적군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조도뉴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네덜란드 반군

3.2. 스페인군

4. 전투 경과

1568년 10월 20일, 빌럼은 와브르로 향하던 중 조도뉴에서 글로트 게테 강을 건널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알바 공의 추격으로부터 군대를 지키기 위해 루베르발 영주 필립 판 마르바이스가 이끄는 후위대 3,000명을 배치했다. 얼마 후 알바 공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들이닥쳤다. 알바 공은 기병대를 즉시 출격시켜 강을 건너는 적을 공격하게 하고, 대포 6문을 동원하여 공격을 지원하게 했다.

후위대는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이내 전의를 상실하고 붕괴되었고, 필립 판 마르바이스는 생포된 뒤 브뤼셀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다만 반란군 본대는 그 사이에 강을 무사히 건넜고, 알바 공은 추격을 중단했다. 이리하여 조도뉴 전투는 스페인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5. 결과

조도뉴 전투에서 스페인군의 사상자는 80명에 불과했다. 반면 네덜란드 반군은 몇몇 주요 지휘관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고, 2,000명 이상의 병사가 전사하거나 사로잡혔다. 이렇듯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와브르에 도착한 빌럼은 얼마 후 위그노 군대와 조우했다. 그러나 위그노군은 2,000명의 보병, 500명의 기병 밖에 안 되었고, 이에 실망한 빌럼은 독일로 돌아가기 위해 리에주 주교공국에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빌럼은 리에주 시를 포위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해 압력을 행사했지만 소용 없었다.

빌럼은 1568년 11월 12일 르 퀘스노이 외곽에서 자기를 추격해온 스페인 별동대를 격퇴했지만, 군자금이 바닥난 상황인데다 리에주 주교공국이 끝까지 길을 열어주지 않아서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로 후퇴해 재기를 도모했지만, 프랑스 정부로부터 즉시 나라를 떠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빌럼은 대포와 총을 죄다 팔아서 병사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해산한 뒤, 위그노와 함께 지내며 가톨릭 세력과 맞서 싸우다가 1569년 11월 딜렌베르크로 이동했다.

한편, 알바 공은 빌럼의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한 뒤 빌럼에게 식량을 공급해준 도시들에게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고 시장을 참수했다. 이리하여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성공적으로 장악한 듯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난 스페인 궁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70년부터 네덜란드에 더욱 가혹한 과세를 부과했다. 알바 공은 무거운 과세에 항의하는 네덜란드 의회를 무시하고 증세를 강행했고, 납세를 거부하는 이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가혹한 세금을 피해 외국으로 도망가는 이들이 늘어났고,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모든 네덜란드 민중은 스페인의 압제를 증오했다.

그러던 1572년 4월 1일, 알바 공이 프랑스의 침략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남부 네덜란드에 군대를 집중시키는 틈을 타, 네덜란드 독립군 함대인 '바다의 거지떼(고이센)'가 브릴레 항구를 기습적으로 점령했다. 민중은 이에 호응하여 홀란트와 제일란트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빌럼은 즉시 그들과 합세하여 반란군을 이끌었다. 이리하여 조기에 끝난 줄 알았던 네덜란드 반란이 재개되었다.
[1] 프랑스어 이름으로, 네덜란드어로는 헬데나컨(Geldenaken) [2] 예밍헨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