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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예멘 아랍 공화국 الجمهوريّة العربية اليمنية Yemen Arab Republic}}} |
||
국기 | 국장 | |
1962년~1990년 | ||
성립 이전 | 통일 이후 | |
예멘 왕국 | 예멘 공화국 | |
면적 | 195,000km² | |
인구 | 7,160,981명(1990)[1] | |
수도 | 사나 | |
정치체제 | 일당제, 공화정, 군사독재 | |
국가원수 | 대통령 | |
통화 | 북예멘 리알 | |
1인당 GDP | 384$(1990)[2] | |
언어 | 아랍어 | |
종교 | 수니파, 자이드파 | |
민족 | 예멘 아랍인 | |
위치 |
[clearfix]
1. 개요
과거 북예멘 지역은 알리의 후손인 라스 왕조가 계속 점거하던 자이드파 지역으로, 1918년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였으며, 이후 ' 예멘 무타와킬 왕국'(1918~1962)과 ' 예멘 아랍 공화국'(1962~1990)이 성립되었다. 1967년 남예멘이 건국되기 전에는 이 지역에 있는 국가는 그냥 예멘이라고 통칭되었으나, 이후 두 개의 예멘을 구분하기 위해 북예멘이라는 통칭이 쓰이게 되었다.영어 위키피디아에서 'North Yemen'을 입력하면 ' 예멘 무타와킬 왕국과 예멘 아랍 공화국을 가리키는 말'로 정의하였으나, 나무위키에서의 북예멘 항목은 예멘 아랍 공화국과 동의어임을 유의할 것. '예멘 무타와킬 왕국'은 예멘 왕국으로 통칭한다.
2. 역사
5이맘파 국가이던 예멘 왕국에서 1962년 9월 26일 새 군주인 무하마드 알바드르가 왕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 정권의 영향을 받은 소장파 장교를 중심으로 한 자유 장교단이 사나를 점령했다. 이들은 '아랍 연합 공화국'을 선포, 압둘라 알 사랄 대령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왕당파와 내전을 치르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북예멘 내전이라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모로코, 팔라비 2세의 이란, 영국이 왕당파를 지원하였고 이집트군이 1962년부터 1968년까지 공화국 편에서 개입했으며 소련, 시리아가 공화파를 지원하였다. 미국은 공화정부를 승인하였으나 사우디와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공화정부를 지원하진 않았다. 이 당시 나세르가 엄청난 양의 병력과 물자를 예멘에 쏟아부었음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나세르의 베트남이라고 불릴 정도였고 훗날 6일 전쟁 당시 이집트군이 이스라엘군을 상대로 졸전을 면치 못하는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사나에서 축출된 왕당파는 북부 고원지대를 점령하고 사나에 대한 탈환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공화정부와 왕당파의 실력이 비등하여 1965년부터 전선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계속된 내전에 지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이살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1967년 8월, 예멘 내전에 대한 개입을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에 대해 사랄 정권은 격렬히 반발했으나 공화정부의 군부도 계속된 내전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결국 1967년, 압드 알 라흐만 이리야니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사랄을 축출하였는데 이틈을 타서 12월, 왕당파가 총공세를 가해 사나를 포위하여 1968년 2월까지 무려 70일간 공세를 퍼붓는 상황이 되었다. 공화정부는 붕괴 직전으로 몰렸으나 소련, 시리아, 남예멘의 지원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결국 지칠대로 지친 왕당파도 온건파가 중심이 되면서 1968년 휴전협정을 체결하게 되었고 1970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가 공화정부로부터 왕당파를 정부에 포함시켜주겠다는 합의를 받아냄에 따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예멘 아랍 공화국을 인정하게 되었다. 예멘 내전에서 총 15만명의 예멘인이 사망하였다.
이후 북예멘은 군인들이 통치하는 군사정권이 유지되었다. 1970년, 북예멘은 신헌법을 반포하고 북예멘을 이슬람 공화국으로 만들었으며 공화국 평의회를 설치하였다. 허나 북예멘 헌법은 입법부를 구성하지 않았으며 정당 활동도 금지하는 등 자문회의라는 모호한 단체를 통해서 의견을 수렴하여 통치하는 독재를 유지하였다. 공화국평의회 의장 이리야니는 중도좌파 무스닌 알마드 알아이니를 총리에 임명하고 사우디와의 합의에 따라 3명의 왕당파를 장관에 임명하였다. 허나 지방의 통치권은 사실상 독자적인 군대를 유지하고 있는 부족장들에게 있었으며 하시드와 바킬 등 대부족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했다.
부족들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된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던 이리야니 정권은 결국 1974년 6월 13일, 이브라힘 알함디 중령의 쿠데타로 붕괴되었다. 함디는 공화국평의회를 해체하고 군사평의회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함디는 1974년 6월 19일, 임시 헌법을 반포하고 1년 이내에 새 헌법을 발표할 것을 약속했으나 이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함디는 부족들의 권력을 약화하기 위해 자문회의를 해체하고 남부의 부족들을 지원하고 예멘 내전 중에 몰락하였던 구 좌파들의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이에 1976년 민족민주전선이 결성되었다. 함디 정권은 개혁정책으로 인기를 얻었으나 개혁을 계속 추진하기에는 권력기반이 취약하였으며 당연히 부족과 보수파들은 함디를 몰아내고자 했다.
1977년에 이르러 부족들의 반발이 격심해져서 반란부족들을 향한 공습이 행해지는 등 예멘은 다시 내전에 치달았다. 함디는 이 상황에 남예멘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였으나 아덴으로 출발하기 전날인 1977년 10월 11일 암살당했다. 함디가 사망하고 함디를 죽인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는 아흐마드 후세인 알 가쉬미 중령이 군사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여 1978년 2월 헌법제정국민회의를 소집하였다. 헌법제정국민회의는 진보세력들을 달래기 위한 가쉬미의 의도에 따라 도시 출신들의 진보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헌법제정국민회의는 가쉬미를 임기 5년의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가쉬미는 대통령 취임 후 군사평의회를 해체했다.
가쉬미 정권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부족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좌파세력과 함디의 잔여세력을 탄압했는데 이에 사파이 부족을 중심으로 공수부대와 함디의 추종자들이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곧 진압되었으나 생존자들은 남예멘으로 피신하여 민족민주전선 산하의 무장단체로 재편되었다. 이로 인해 남북 예멘의 관계도 긴장추세로 돌아섰다. 허나 가쉬미도 오래 가지 못하고 1978년 6월, 남예멘 대통령 루바이 알리가 파견한 특사와 면담하던 중 특사의 가방에 든 폭탄이 터져서 암살당했다. 가쉬미가 죽은 후 예멘군 부참모총장을 맡던 알리 압둘라 살레 중령이 군의 지지를 등에 업고 1978년 7월, 헌법제정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살레는 1982년 대국민회의(المؤتمر الشعبي العام)라는 아랍 민족주의 정당을 창당하여 북예멘은 일당제 국가가 된다. 살레는 예멘이 통일된 지 한참 후인 2012년까지 집권하다가 아랍의 봄으로 실각한 뒤 5년 후 2017년 후티 반군에게 살해당했다.
1967년 수립된 남예멘과는 우리나라나 과거 독일과 같이 애증의 관계 속에서 공존하였다. 1972년 처음으로 카이로에서 남북이 정상회담을 가지며 향후 통일을 하겠다는 선언까지 했었는데 남북의 내부 갈등 문제와 1977년에 발생한 북예멘 대통령 암살사건, 1979년에 발생한 국경 분쟁으로 통일 계획이 유보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개방정책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인해 북예멘이 점점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남측과 남북국경 지역의 유전개발이라는 현실적인 이익이 맞물리면서 다시 통일 분위기가 조성되어 2년 뒤인 1990년 남북 합의에 의해 통일을 이룬다. 그러나 1994년 남예멘이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무력진압되었고, 2010년대 들어 예멘 북부를 후티 반군이 장악하고 예멘 남부를 수니파가 장악하는 형국이 이어지면서 예멘이 재분열될 가능성이 나타났다.
3. 외교 관계
3.1. 남예멘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북예멘-남예멘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3.2. 한국과의 관계
북예멘은 공산국가가 아니지만 친서방이 아닌 아랍 사회주의 성향이었기 때문에[3] 북한과는 1963년 3월 수교한 반면 대한민국과는 1985년 8월에야 수교하였다.통일 이후에는 통일 예멘 공화국으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4. 정치
군사정권이 1964년 4월 28일에 헌법을 공포했지만 정당은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범국민정치기구로써 이집트의 아랍사회주의연맹을 모델로 한 예멘아랍연맹을 창립하여 정치를 독점하는 장치를마련하였다. 군사정권이 들어서기전 왕정시기에는 정치기구나 정당조직은 없었으며 북부산간지대의 부족세력을 기반으로 한 봉건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했을 뿐이었다.비록 정당으로서 뚜렷한 조직은 갖추지 않았으나 범 이슬람 종교 정치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이 아브두 알 함디 자이다니를 중심으로 결집해 있었다. 이들은6년간 연기되어오다 1988년 7월 5일에 실시된 협의평의회(Majlis ash-shura)선거에서 전체 선출의석 128석중 약 1/6 가까이 이들의 동조자들에 의해 충당되었고, 수도 사나의 6석을 차지할 정도로 세력이 컸다. 한편 선거가 연기된 6년동안 살레 대통령은 통일예멘기구(Unified Yemen Organization)(후에 총인민회의General People's Congress로 이름을 바꿈)을 만들어 통일직전에는 북예멘의 대표적인 정치세력이 되었다
[1]
남예멘은 당시 인구 259만 명이었다.
[2]
UN 통계. 참고로 당시 남예멘은 268$였다.
도긴개긴
[3]
이 때문에
미국-
소련 간
냉전 시대에는
제3세계로 분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