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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영종도 해전 永宗島 海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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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871년 10월 13일(음력 8월 28일 삭) | |||||
장소 | |||||
영종도 서쪽 해안과 신도[1], 삼목도[2] 사이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조선 | 미 영 연합함대[3] | |||
지휘관 |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수사 임상준 전라우수사 이민우(李敏宇) 전라좌수사 류기철(柳冀喆) 경상좌수사 윤영하(尹永夏) 충청수사 이규안(李奎顔) 민국인 김현수 구 남부연맹 봉쇄돌파선 함장 랜돌프 워든 |
원정군 총사령관
헨리 켈렛 제독 미국 특명 전권공사 프레드릭 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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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전군[4] 121척+1척 판옥선 44척 신기전기 장착 방선 37척 활대기뢰 장착 병선 40척 고속 상선[5] CSS 제퍼슨 데이비스함 후군[6] 80척+1척 판옥선 40척 신기전기 장착 방선 40척 북독일 연방 호위함 헤르타함[7] |
장갑함이자 기함
HMS 워리어 장갑함 USS 뉴 아이언사이즈 포함 3척 연안포함과 원양포함 총 15척 호위함과 슬루프함, 초계함 15~20척(추정)[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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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정확히 알 수 없음[9] |
장갑함 1척[10]과 원양포함 2척[11], 초계함 1척, 슬루프함 2척 이외 전원 전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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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서양 원정 함대 전멸 연합군의 본진인 영종도 탈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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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제국 건국사에 나오는 가상의 해전으로 이 전투로 연합군 해군 전력은 사실상 괴멸된다.2. 전개 과정
2.1. 연합군의 방어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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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조선 수군의 기만작전에 미 해군과 일본 함대가 각각 당하게 되자 해전에 대해 완승한다는 확신이 확 사라져 버리게 되었고, 새롭게 계획한 10월 총공세 작전에서 해군의 1/3 가량의 전력이 강상편대로 한강에 차출되면서 남은 함선들이 조선의 주요 수로를 감시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총사령관 켈렛 제독은 괜히 조선 삼도수군을 잡으러 돌아다니다가 조선에서 유일한 보급기지이자 연합군의 본진인 영종도[12] 가 탈환당할 위험이 매우 높기에, 차라리 전투 주도권은 조선에게 넘어가겠지만 연합군 화력이 조선군보다 훨씬 강하기에 충분히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공세 대신 철저한 방어 테세에 돌입한다.
-
방어 준비
우선 영종도 남쪽 해안에 있던 기존의 정박지를 서쪽 해안선으로 옮기게 된다. 기존 정박지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해서 함선들이 다 분산되어 배치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는데 새로운 정박지는 두개의 섬이 가로막고 있었기에 그런 영향이 조금 적었다.
새로운 정박지는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방이 탁 트인 영종도 남쪽 해안보다 어느 정도 막혀 있는 위치이고 정박지로 이어지는 3개의 수로도 엄청 좁고 얕았거니와[14], 거기다 장갑함도 기함 제외하면 딱 3개이었기에 저곳에 배치를 하게 된다.
먼저 조선의 주력 함포인 1백근 야포에 대한 방어력이 약한 프리깃, 코르벳, 슬루프함들은 영종도 해안가에 딱 붙어 원형진을 형성한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함포에 버틸 수 있는 장갑함 3척은 남쪽과 서쪽, 북쪽 입구를 틀어막으면서 수상 장갑포대(Armour Battery)로 만들어 버리고, 그런 장갑함 주변에다 포함 5척씩 엄호를 한다.[15] 덤으로 잠수부를 통한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각 섬마다 1개 수병중대를 배치한다.
이렇게 방어진을 구축하면서 연합군 사령부는 조선군은 1차 방어선조차 뚫지 못하고 설령 뚫게 되더라도 공격 소식을 듣고 전투 준비를 모두 마친 후방 함선들에게 축차격파 당할 거라고 자신한다. 다만 그 정보가 예상치 못한 사람들에게 새나갔다는 게 문제였다...
먼저 조선의 주력 함포인 1백근 야포에 대한 방어력이 약한 프리깃, 코르벳, 슬루프함들은 영종도 해안가에 딱 붙어 원형진을 형성한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함포에 버틸 수 있는 장갑함 3척은 남쪽과 서쪽, 북쪽 입구를 틀어막으면서 수상 장갑포대(Armour Battery)로 만들어 버리고, 그런 장갑함 주변에다 포함 5척씩 엄호를 한다.[15] 덤으로 잠수부를 통한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각 섬마다 1개 수병중대를 배치한다.
이렇게 방어진을 구축하면서 연합군 사령부는 조선군은 1차 방어선조차 뚫지 못하고 설령 뚫게 되더라도 공격 소식을 듣고 전투 준비를 모두 마친 후방 함선들에게 축차격파 당할 거라고 자신한다. 다만 그 정보가 예상치 못한 사람들에게 새나갔다는 게 문제였다...
2.2. 조선군의 공격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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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의 딜레마
아직까지 연합군이 본토 상륙을 하기 전이라 일본군 소탕과 강화도의 진무영 옥쇄 외에는 큰 성과가 없는 육군과 달리, 수군은 군산포 해전과 제2차 한산도 해전에서 동아시아 민족들의 공포 그 자체였던 서양식 함선을 9척이나 격파함으로 그들의 존재가치를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어마어마한 화력을 가진 포함이 50여 척이나 남았고 그 중에서 강력한 방어력을 지닌 장갑함이 4척이나 있는데다 아직 싸우지도 못한 미국의 모니터함 2척도 버티고 있었기에, 위에 나온 두 해전에서 승전한 직후 바로 쥐 죽은 듯이 숨었다가, 수색 중이던 영국 함대가 진도와 군산포를 지나 인천 앞바다로 돌아가자 다시 바다로 나와 모든 함대들이 군산으로 집결하게 된다.
이렇게 총집결한 연합 수군의 전력은 판옥선이 87척, 방선이 37척, 병선이 137척이나 되는 대군이었지만, 1백근 야포가 모두 보급되기 전에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적군과 맞설 수 있는 군함은 고작 함포가 탑재된 판옥선 67척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최강 전력들이 집결한 강화도와 영종도로 대낮에 맞서 싸우기도, 한밤 중에 야습하기에도 곤란한 상황에 놓여 지휘관 모두가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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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돌프 워든의 등장
이 때 가고시마에서 정기 보급을 마치고 독일 호위함인 헤르타함이 귀환하는 데, 해르타함과 함께 왠 미국 상선이 같이 입항하게 된다. 통제사인 임상준 수사가 티르피츠 중위에게 이 상선의 선장인 랜돌프 워든을 심문하라고 명하였고, 서로 대면하게 되는데, 이때 워든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게 된다.
그 정보란 10월 12일을 기해서 연합군 포함 8척과 미국의 모니터함이 영종도 또는 강화도를 떠나 어딘가로 이탈하게 되는데 이는 10월 10일에 연합군이 전면적인 상륙작전을 개시할거고 이탈한 포함들이 상륙을 지원한 후 바로 한강으로 진입해 한강 내부의 배다리를 비롯한 조금 남은 수로들을 완전 차단한다는 내용이었다. 거기다 장갑함 3척이 3개의 수로에다 각각 하나씩 막고 있다는 정보까지 알려주면서, 어쩌면 조선군에게 승리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내용을 들은 티르피츠는 통제사에게 하늘이 내린 최대의 은총이라고 보고하면서 워든이 알려준 정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번[16] 정찰을 하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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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해군의 확인 정찰
10월 8일 오전 헤르타함은 조선 해안 탐측 활동을 하다가 잠시 들렀다고 둘러대면서 브와제 섬(영종도)에 방문한다. 그리고 올 때 조금의 의심 받는 것도 피하기 위해 개전 이후부터 나가사키에 묶여 조선으로 전달되지 못한 미군들의 위문편지를 대신 전해주어 연합군의 호감을 받게 된다. 사령부도 헤르타함의 독일 장교와 선원들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미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고 기뻐하면서 헤르타함의 함장인 슈타인호프에게 지금 연합군의 상태와 본토 침공 계획에 대해 술술 말하게 된다. 한편 자키느와 수로[17]에 배치된 장갑함과 그 옆을 천천히 항해하면서 지키는 미국 원양포함의 배치 상태를 보던 티르피츠는 워든이 말한 대로 조선수군에게 있어서 절호의 기회라고 한 말이 절반은 잘못 된 것이었고[18] 자칫하면 질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에 이를 어찌하나하고 고민하던 차에 함장으로부터 곧 있을 상륙작전의 전반적인 계획[19]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 현장에서 가설하는 게 흔한 일이었던 주교를 20세기 말처럼 미리 만든 걸로 현장에 가서 6~7시간 만에 조립을 하겠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놀라운 소식을 얼른 조선 수군에게 전하려고 했지만 연합군 사령부 측의 상륙작전 참관 요청을 조금의 의심을 안 받으려고 수락했다고 하면서 헤르타함은 꼼짝없이 10일 저녁이 될 때까지 연합군 진영에 머무르게 된다.
늦었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 밤 10시가 돼서 당진[20]으로 돌아와 그동안 수집한 연합군의 작전 정보 모두를 보고했고 이 정보를 담은 서신을 조선 중앙군과 한양 조정에 보내게 된다. 여담으로 향후에 있을 논란들을 피하기 위해 이 정보들의 모든 출처는 독일이 아닌 랜돌프 워든의 단독 행동이라고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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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준비
조선 수군은 독일을 통해 받은 연합 함대 배치현황을 토대로 전투를 준비한다. 우선 조선 수군을 통제사 임상준이 이끄는 전군과 전라우수사 이민우가 이끄는 후군으로 나누어 위의 현황대로 편성하는 한편 전군에는 엄청난 속도를 가진 제퍼슨 데이비스함이 선봉으로 돌진하는 전략을 세운다. 그리고 피난 온 영종도 어민들을 통해 들은 정보를 기반으로 달이 안 보이는[21] 음력 8월 28일, 밀물이 최고점에 이르는 인시(오전 3시에서 5시)[22]에 야습하기로 결정하면서 마지막 해전이 준비된다.
2.3. D.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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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퍼슨 데이비스함의 돌격
사방이 어두워져 시야가 좁아진 새벽 4시(추정)에 자키느와 수로를 지키는 장갑함 뉴 아이언사이즈의 한 견시수가 좌현 700야드(640m) 떨어진 곳에서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제퍼슨 데이비스함을 발견한다. 다급히 놀라 방어 준비를 하고 일제 사격을 하는 등 대응을 하지만, 남부의 봉쇄 돌파선이기도 했던 제퍼슨 데이비스함에겐 속도로 가볍게 다 피한다. 이에 대해서 랜돌프 워든의 말 대로 최소 2000 야드(1,828m)에서 관측되어야지 대응이 가능한데 지금 절반도 안되는 곳에서야 관측이 되었기에 대응 자체가 힘들다고 볼 수가 있다. 이렇게 돌격하는 제퍼슨 데이비스함에는 양쪽의 원양포함을 불태울 소이신기전 발사대 4개와 당분간 못 쓰는 판옥선에서 옮겨 놓은 1백근 야포가 함수에 있었고, 거기다 대 장갑함 결전 병기용으로 활대기뢰 3발을 장착해 둔 상태[23]였다. 그리고 일제사격에 실패하고 장전하느라 잠시 침묵 상태에 빠진 미 군함들을 향해 신기전을 발사하고 곧 이어 제퍼슨 데이비스함은 그대로 장갑함 뉴 아이언 사이즈함에 충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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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과 서쪽 방어선 돌파
충돌 직후의 시점이 천리경과 쌍안경으로 지켜보고 있던 조선 기함(사령선)으로 넘어가서 자세히 나오지는 않으나 그들의 시야에 충돌 후 거대한 물기둥과 큰 폭발이 난 후 함수의 대부분이 부숴져 살릴 수 있을지가 의문인 상태가 되어 서서히 빠져나가는 제퍼슨 데이비스함과 갑판이 모조리 불길에 휩싸이고 거기다 엄청나게 커다란 구멍이 생겨 서서히 침몰하는 미국 장갑함이 나타나게 되는데, 거기서 절규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바다로 굴러 떨어지는 미국 수병들을 보면서 소름이 끼친 듯한 반응을 보인다.[24] 그렇게 멍한 반응을 보이는 동안 양쪽에서 속절없이 불타오르던 원양포함 두 척도 유폭되어 순식간에 터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서쪽에서도 뭔가 큰 폭음과 멀리서도 잘 보이는 불빛이 보임에 따라 클레르 수로[25]를 치던 후군이 그곳을 지키던 영국 장갑함[26]을 터트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제 더 이상 지체해야 하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진 통제사는 참상에 대한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 쯤에서 다시 연합군 측으로 넘어가는데 기함에서 이 참상을 지켜보던 총사령관 켈렛 제독은 방어선이 돌파된 것만으로 이제 이 함대는 도망칠 수도 없고 그대로 끝장난, 희망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이르었지만, 그래도 항복 따윈 안 하고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말을 하며 기함을 찾아온 프레드릭 로를 바로 탈출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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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하늘을 장식하는 3만 여발의 신기전
완전히 개방된 남쪽 수로를 통해 들어온 신기전기 장착 방선 37척과 활대기뢰 탑재 병선 40척을 향해 20~30여척의 연합군 군함들이 필사적으로 사격을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명중탄이 하나도 나오지가 않았다.[27] 이렇게 연합군 수병들이 답답해 하는 사이 조선의 방선이 정박된 군함들을 향해 신기전을 발사한다. 이 신기전들은 다 황린이 탑재되어 있어 방화수로도 전혀 안 꺼지고 계속 불에 타가다가 근처 탄약에 유폭되어 터져나갔고, 이런 지옥같은 공격이 2차, 3차로 날라가 더 많은 목재 함선들이 속절없이 불에 타나갔다.
이 공격으로 군함 30여척이 피격 당했고, 이 중 불에 탄 부분이나 배 안에 있는 모든 탄약들을 모조리 제거하거나 바다에 던진 기함 워리어함을 비롯한 극 소수의 함선을 제외한 함선들은 그대로 불타 격침당하게 된다.
하지만 공격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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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대기뢰 병선들의 돌격
모든 함선들이 화재를 진압하느라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하는 사이에 활대기뢰를 장착한 병선 40척이 창기병처럼 돌격을 시전한다.
이때가 돼서야 이론상으로 강력해야 할 남쪽 방어선을 조선군이 어떻게 뚫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게 된 연합군 함선들은 각각 자신들을 향해 돌격하는 병선들을 격파하려고 모든 힘을 썼지만 아예 죽을 각오로 돌격하는 병선을 막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터져간다.
그렇게 터진 군함들 중에 기함이자 장갑함 HMS 워리어함도 있었고 그 시점부턴 사실상 전투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3. 결과
기함인 HMS 워리어가 격침된 지 30여 분이 지나가 동이 틀 무렵, 연합군 해군에겐 남은 군함이 겨우 6척[28]밖에 남지 않은 처참한 처지만 남게 된다. 한편 주변 바다에는 처참하게 박살나거나 불탄 군함들의 잔해들이 즐비했고 바다 위에는 이미 죽어버린 선원들의 시신들과 폭발한 배에서 튕겨나간 양측 생존 수병들이 허우적거렸고 브와제 섬에서 띄운 구조보트들이 이들을 급히 구조하는 것으로 전투 에피소드가 끝나게 된다.사실상 모든 가용 전력이 박살난 연합군 해군은 조선 삼도수군에게 항복을 한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주중 미국대사 겸 특명 전권 대사인 프레더릭 로를 포함한 영종도 주둔군의 생존자 전원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으며 본진인 영종도가 탈환된 동시에 재해권마저도 박탈 당하게 된다. 아울러 포로가 된 프레더릭 로는 이미 상륙해서 소식이 끊어진 채 고생 중인 원정 육군에게 13일 정오를 기해서 모든 군사행동을 중단하고 조선에 항복하라는 서한을 보낸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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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돌프 워든이 조선을 도운 이유
남북 전쟁 종전 후 그는 미국의 상선 선장으로 하릴없이 푼돈을 벌어가며 일하던 어느 날, 중국의 상인에게 용선되면서 제물포로 화물을 옮긴 적이 있었다.[29] 이때 조선 사람들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이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힘이 없긴 하지만 한때 자신의 조국이었던 남부연맹처럼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나라 같다고 생각했다.[30]
그러다가 톈진 사건의 배후가 조선으로 몰려 전쟁에 치닫게 되는 상황이 되자 그는 힘도 없고 약한 조선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도 조선인들은 서양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당당히 침략에 맞서 끝까지 버텨왔으며 연합군의 굴욕적인 항복 요구도 받지 않고 지금까지 싸워왔다는 것에 감동하게 되면서 그런 조선인들을 위해 자기가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깨닫게 되었고, 이미 연합군의 규모과 일본군의 출정에 대한 정보를 베이징의 조선공사관에게 전달한 적이 있던 랜돌프 워든은 아예 자신의 목숨을 조선 수군에 거는 도박을 하게 된다.
본디 남부 연맹 소속이었기에 남북 전쟁 당시 남부 연맹의 해안 봉쇄에 활약했던 뉴 아이언 사이즈에 대한 원한도 있었다. 선술했듯 뇌창을 3개나 장착했던 것도 이 배를 확실하게 파괴해서 복수하기 위한 것.
[1]
연합군은 클레르(Claire) 섬이라고 부른다
[2]
연합군은 자키느와(Jaquinoi) 섬이라고 부른다.
[3]
프랑스 해군은 대부분 수송함대로 있었기에 영종도가 아닌 중국이나 먼 바다 지역에 있다고 추정되며, 전투 장면이 나오는 10권에서 프랑스 군함이 터졌다는 이야기가 없기에 여기선 제외함
[4]
연합군 남부 방어선 돌파와 화공을 위한 함대
[5]
구 봉쇄돌파선
[6]
연합군 서부 방어선 돌파와 화공을 마친 전군이 탈출할 항로를 개척할 함대
[7]
제퍼슨 데이비스함과 달리 외교문제 때문에 항로 안내 임무만 수행
[8]
작중에서 자세한 수를 밝히지 않음
[9]
다만 활대기뢰 병선의 전사자가 상당했으리라고 추정됨.
[10]
북부 방어선을 지키던 HMS 디펜스
[11]
장갑함을 근접 호위한 함선
[12]
연합군에서는 브와제 섬(Boisee Island)이라고 부른다.
[13]
A섬은 영종도, B섬은 삼목도, C섬은 신도이다. 그리고 세 섬들 사이에 희미하게 보이는 초록색 동그라미가 연합군 정박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14]
폭이 1~1.5해리이고, 깊이는 가운데는 10~14m 정도지만 그 부분을 빼면 겨우 3.6m 밖에 안 된다. 그리고 이건
만조시의 깊이이고,
간조일 때는 가운데를 제외한 모든 곳이 물이 완전히 빠진 갯벌이 된다.
[15]
그런데 9권의 정찰 장면이나 10권 전투 상황을 보면 장갑함의 양 옆에 겨우 원양포함 2척 밖에 없었다.
[16]
이미 헤르타함은 강화도 연합군 함대 정박지에 위문을 가장한 정찰을 한 적이 있다.
[17]
삼목도~영종도 사이에 있는 수로이자 남쪽 방어선
[18]
그래도 장교가 아닌 일반 상선 선장이었기에 그도 완전히 알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19]
이 정보가 향후 모든 전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0]
원래 주둔지는 군산이었지만 10월 6일에 당진으로 주둔지를 옮겼다고 한다.
[21]
연합군의 시야가 좁아질 때
[22]
연합군 방어진의 이점인 조수간만의 차를 역이용, 상대적으로 얕은 수로가 제일 깊어질 시기
[23]
실제 역사에서 뉴 아이언사이즈함은
남북 전쟁중 남부 기뢰선에게 1발의 활대 기뢰를 맞았음에도 격침되지 않았기에 1발이 아닌 3발을 장착하게 된다.
[24]
"참상이로다..." '그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참상이었다.'
[25]
신도~삼목도 사이의 수로이자 서쪽 방어선
[26]
HMS 헥터함
[27]
연합군 포술장 시점을 보면 조선 수군들이 섬 그림자와 어둠에 이중으로 감춰져 희미한 잔상으로 보였기에 제대로 된 조준조차 힘든 모습을 보인다.
[28]
참고로 생존 군함 모두 다 영국 군함이다.
[29]
그냥 전투 장면만 보는 사람들이 왜
이양선이라 불리던 서양 상선이
제물포에 그냥 올 수가 있냐고 할 수도 있기에 조금 설명을 붙이자면, 이때 무진경장(후에 서술할 예정)이라는 개혁으로 조선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는데, 이 무렵에 문호개방의 준비차원이기도 하고 관세 수입으로 개혁 자금 확보를 위해 민국인들이 대원군에게 건의하면서 유일한 근대 무역로인 제물포~
상하이 노선이 개설되었으며 랜돌프 워든은 이 항로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갔다.
[30]
워든의 집안은 보통 지주들은 노예들을 부린다는 보편적인 인식과 다르게 노예가 아닌 자유 흑인을 고용하면서 운영하는 중소 지주였으며, 워든은 노예제를 지키기 위해 남부에 선게 아니라, 자기 고향의 동포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남부 해군에 종군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굶주리는 남부 병사와 평민들을 위해 밀수선을 운용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