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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6 18:13:57

여몽전쟁(1364년)

1. 개요2. 상세3. 결과4. 관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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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공민왕, 원나라 혜종 치세였던 1364년 몽골 원나라 고려의 자주국화를 저지하기 위해 고려를 재침공했다가 패배한 고려-몽골제국 간의 최후의 전쟁. 역사적으로는 보통 덕흥군의 침입(난), 최유의 난이라 지칭한다.

2. 상세

여말선초 공민왕 치하에서 고려는 원말명초 원 간섭기 속국 관계에서 다시 독립국으로 자립하기 시작하였으며 원나라의 입장에서는 공민왕 치세를 기점으로 자주국으로 독립해가는 고려를 더 이상 그냥 두고볼 수 없었다. 고려 예속화가 없던 일이 되어 고려가 원의 배후에서 적대하기라도 하면 원나라의 후방이 불안정해져서 안 그래도 당시에 쇠퇴하던 원나라가 더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결국 원혜종은 아내 보현숙성황후(기황후)의 영향력까지 더해지면서 주로 기황후파 반공민왕 친원파 재원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고려 재침공을 명하게 되었다. 그렇게 원나라 군대는 여몽전쟁 종전 이후 오랜만에 고려를 침공했다. 원나라를 등에 업은 덕흥군 최유가 얼굴마담 역할을 하면서 공민왕을 쫓아내기 위하여 덕흥군을 왕으로, 행주 기씨 기황후의 조카 기철의 일족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세자[1]로 1만명에 달하는 군사를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가 고려의 새로운 통치자를 자칭했다.

그러나 이성계,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은 원나라 군대를 필사적으로 막아냈으며, 결국 원나라는 수많은 군사력을 잃고 1만에서 17명만이 생환하는 패전이라는 엄청난 흑역사 치욕을 당했다. 결국 원나라는 더 이상의 고려 경략을 포기하고 공민왕의 청대로 최유를 고려로 반송 송환하였으며 최유는 매국노로서 처형당하여 원나라 최후의 고려 침공은 처참하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2]

3. 결과

이 전쟁에서 패배한 원나라는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국력이 더욱 쇠약해져 중원 상실이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만약 원나라가 승리했다면 고려를 다시 친원파 세력으로 종속시켜 고려에 대한 영향력 상실과 중원 상실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었을 것이나 원은 결국 참패했고 머지않아 주원장 치하 명나라 북벌로 도로 몽골 초원으로 쫓겨나 얼마 안되어 멸망하였다.

한편 고려는 마침내 원 간섭기를 완전히 뿌리치고 예전의 진정한 자주 독립국으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무장과 신진 사대부들의 힘이 강해짐으로써 훗날의 조선 건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4. 관련글


[1] 원나라의 침공이 성공했더라면 고려왕조는 도로 원나라의 속국으로 더욱 종속될 뿐만 아니라 아예 왕씨에서 기씨의 왕조로 교체되는 역성혁명, 최악의 경우에는 심지어 고려 자체가 입성책동으로 명분상의 정동행성보다 더 철저한 원의 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존재했을 것이다. 설령 원의 성으로 전락하지는 않고 언젠가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 해도, 한민족의 문화에 몽골의 잔재가 실제보다 더 많이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막장테크를 타고 있던 원말의 형세에서 원나라가 승리하여 용케도 고려를 재복속시키거나 병탄시킬 수 있었다 하더라도 고려는 오래지않아 바로 독립했을 가능성이 크다. [2] 몽골족 한반도를 침공한 것 자체는 6.25 전쟁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내몽골 몽골족 중국 인민지원군 소속으로 참전한 게 마지막이며, 전근대로 범위를 좁히면 청나라 팔기군 소속의 몽골족이 청일전쟁에 참전한 게 마지막이다. 다만 그 두 사례는 몽골족이 각각 한족,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때라서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여몽전쟁과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