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에릭 리들 Eric Lidde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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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릭 헨리 리들 Eric Henry Liddell |
출생 | 1902년 1월 16일 |
청나라 톈진시 | |
사망 | 1945년 2월 21일 (향년 43세) |
중화민국 Weihsien 수용소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에든버러 대학교 |
종목 | 육상 |
주종목 | 단거리 |
신체 | 173cm, 68kg |
종교 |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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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前 육상과 럭비 선수였으며,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것은 1902년 중국에서 태어났으며 5살때 부모님을 따라 영국으로 귀환한 뒤 1924년 까지 영국에서 살았으며 이후 1925년에 중국 선교사로 파송받게 된다.2. 육상 선수 경력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육상 선수를 하였으며, 수년간 국내대회를 휩쓸기도 하였다. 1924 파리 올림픽에 참가했는데, 100m 경기는 주일이라는 이유로 출전을 포기한 일화는 유명하다. 다만 본인의 주종목이 아닌 100m야 그렇다치고서라도,[1] 팀경기인 4x400m계주에도 출전을 안하는 바람에 영국이 이 부문에서 동메달에 그친 것에 대해서는 당대에 영국에서도 비난이 많았다. 대신 200m에서 동메달, 400m에선 세계신기록[2]으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3. 럭비 선수 경력
에든버러 대학교 시절에 럭비 선수로 활동하였고, 스코틀랜드 대표팀에서도 활약하였다. 국가대표로서는 1922~1923년 7경기 12득점.4. 은퇴 이후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중일전쟁중이던 1943년, 일본군에 의해 억류되어 다른 서양인들과 함께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는 수용소에서도 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스포츠를 가르치고, 이들을 위한 장비를 만들곤 했다. 같은 수용소에 갇혔던 이들이 증언하길 자신도 아프고 굶주리면서도 다른 이들을 먼저 생각했다고. 한번은 영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교환협정을 통해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나, 임산부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5년 뇌종양에 걸렸는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43세. 그 뒤 그에 관한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데이비드 푸트남이 제작한 불의 전차다.5. 수상 기록
올림픽 | ||
금메달 | 1924 파리 | 400m |
동메달 | 1924 파리 | 200m |
[1]
오늘날은 물론 당대기준으로도 그는 뛰는 폼이 상당히 좋지 못했다. 아예 얼굴을 뒤로 젖히고 뛰었다고 한다. 영화 불의 전차의 다른 주인공인 해롤드 에이브러햄은 "사람들의 그의 끔찍한 폼을 보고 비웃었지만, 그는 1등으로 들어오곤 했다."라고 회상했다. 다만 아무래도 이런 특성탓으로 100m보다는 폼의 영향을 덜받는 400m에서의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후에 그와 800m 경기를 벌여 근소한 차이로 이긴 독일의 800m 세계기록 보유자 오토 펠쳐는 에릭 리들에 대해 "800m로 주종목을 바꿔 훈련하면 세계최강이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2]
다만 이것이 세계신기록으로 인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당시 육상종목에는 440
yd(약 402m) 달리기가 있었는데, 이 종목의 기존 세계기록 47.4초가 파리 올림픽에서 리들이 세운 400m기록 47.6초보다 더 빨랐기 때문. "402m를 47.4초에 뛰었으면, 400m는 최소한 그보다 더 빠른 시간에 통과했다는 이야기니 400m 세계신기록 역시 402m 선수의 기록 47.4초를 인정해야 한다."와 "더 느린 것은 인정하지만 어쨌든 종목이 다르니 리들의 47.6초여야 한다"라는 주장이 대립되었다. 여담으로 "400m도 400yd도 아닌 440yd라는 괴상한 경기는 도대체 왜 하는 거야?"란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440yd는 영미권 혹은 경마나 항해에서 주로 쓰이는
mile의 1/4이어서 '쿼터마일'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