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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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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시몬 볼리바르 | 안토니오 수크레 | 호세 마리아 페레스 우르디니네아 | 호세 미겔 데 벨라스코 | |
<rowcolor=#ffffff> 제5대 | 제4대2 | 제6대 | 제4대3 | |
페드로 블랑코 소토 | 호세 미겔 데 벨라스코 |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 | 호세 미겔 데 벨라스코 | |
<rowcolor=#ffffff>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세바스티안 아그레다 | 마리아노 엔리케 칼보 | 호세 발리비안 | 에우세비오 길라르테 | |
<rowcolor=#ffffff> 제4대4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
호세 미겔 데 벨라스코 | 마누엘 이시도로 벨수 | 호르헤 코르도바 | 호세 마리아 리나레스 | |
<rowcolor=#ffffff>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
호세 마리아 데 아차 | 마리아노 멜가레호 | 아구스틴 모랄레스 | 토마스 프리아스 | |
<rowcolor=#ffffff> 제18대 | 제17대2 | 제19대 | 제20대 | |
아돌포 발리비안 | 토마스 프리아스 | 일라리온 다사 | 나르시소 캄페로 | |
<rowcolor=#ffffff>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그레고리오 파체코 | 아니세토 아르세 | 마리아노 밥티스타 | 세베로 페르난데스 | |
<rowcolor=#ffffff>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6대2 | |
호세 마누엘 판도 | 이스마엘 몬테스 | 엘리오도로 비야손 | 이스마엘 몬테스 | |
<rowcolor=#ffffff>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
호세 구티에레스 게라 | 바우티스타 사베드라 | 펠리페 세군도 구스만 | 에르난도 실레스 레예스 | |
<rowcolor=#ffffff> 제32대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
카를로스 블랑코 갈린도 | 다니엘 살라망카 | 호세 루이스 테하다 | 다비드 토로 | |
<rowcolor=#ffffff> 제36대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
헤르만 부슈 | 카를로스 킨타니야 | 엔리케 페냐란다 | 괄베르토 비야로엘 | |
<rowcolor=#ffffff> 제40대 |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
네스토르 기옌 | 토마스 몬헤 | 엔리케 헤르초그 | 마메트로 우리올라고이티아 | |
<rowcolor=#ffffff> 제44대 | 제45대 | 제46대 | 제45대2 | |
우고 발리비안 |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 |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 |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 | |
<rowcolor=#ffffff> 제47대 | 제48대 | 제47대2 | 제49대 | |
레네 바리엔토스 | 알프레도 오반도 칸디아 | 레네 바리엔토스 | 루이스 아돌포 실레스 살리나스 | |
<rowcolor=#ffffff> 제48대2 | 제50대 | 제51대 | 제52대 | |
알프레도 오반도 칸디아 | 후안 호세 토레스 | 우고 반세르 | 후안 페레다 | |
<rowcolor=#ffffff> 제53대 | 제54대 | 제55대 | 제56대 | |
다비드 파디야 | 발터 게바라 | 알베르토 나투쉬 | 리디아 귈러 | |
<rowcolor=#ffffff> 제57대 | 제58대 | 제59대 | 제46대2 | |
루이스 가르시아 메사 | 셀소 토렐리오 | 기도 빌도소 | 헤르만 실레스 수아소 | |
<rowcolor=#ffffff> 제45대2 | 제60대 | 제61대 | 제51대2 | |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 | 하이메 파스 사모라 |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 | 우고 반세르 | |
<rowcolor=#ffffff> 제62대 | 제61대2 | 제63대 | 제64대 | |
호르헤 키로가 |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 | 카를로스 메사 |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 벨체 | |
<rowcolor=#ffffff> 제65대 | ||||
에보 모랄레스 | ||||
볼리비아 다민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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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제65대 | 제66대 | 제67대 | ||
에보 모랄레스 | 자니네 아녜스 | 루이스 아르세 | ||
<rowcolor=#ffffff> ※ 볼리비아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 |
볼리비아 공화국 제31대 대통령 에르난도 실레스 레예스 Hernando Siles Rey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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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c35><colcolor=#ffffff> 출생 | 1882년 8월 5일 |
볼리비아 수크레 | |
사망 | 1942년 11월 23일 (향년 60세) |
페루 리마 | |
국적 |
[[볼리비아| ]][[틀:국기| ]][[틀:국기| ]] |
재임 기간 | 제31대 대통령 |
1926년 1월 10일 - 1930년 5월 28일 | |
약력 |
교육부 장관,(1922)[1], 전쟁부 장관,(1922-1923)[2], 볼리비아 제31대 대통령,(1926-1930),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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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리비아의 제31대 대통령이다.2. 생애
2.1. 집권 이전
1900년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1905년부터 민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후 여러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다.1914년 공화당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다가 1920년 7월 12일 쿠데타로 호세 구티에레스 게라 대통령을 실각시키며 정권을 잡았다.[3] 1921년 1월 28일부로 바티스타 사베드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사회공화당이 분리되어 나왔고 실레스도 당적을 옮겼다. 사베드라 정부에서 실레스는 교육부 장관과 전쟁 및 식민지부 장관 직을 역임했다. 1925년 5월 실레스는 차기 대선 후보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실레스는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사베드라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약속하고 부통령엔 사베드라 대통령의 동생인 압돈 사베드라(Abdón Saavedra)를 임명하는 "약속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되었다. 실레스는 우선 잠자코 문서에 서명했다. 1925년 12월 1일에 실시된 대선에서 실레스는 97.3%의 투표율을 얻으며 공화당의 다니엘 살라망카 후보를 꺾고 승리했다.
2.2. 집권 기간
대통령이 되자마자 바티스타 사베드라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기 위해 우선 사베드라 대통령을 유럽 대사로 임명시키고 1925년 독립 100주년 행사 때 참석해준 유럽 국가들에 외교 사절단으로 압돈 사베드라 부통령을 파견시키고선 두 사람의 입국을 금지시켰다. 1926년 12월 29일 국민당을 창당하며 당적을 새롭게 옮겼다.1927년 남미 순방 중이던 미국 금융 사절단을 초청하였고 사절단장인 에드윈 케머러는 당시 매우 심각했던 볼리비아 외채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볼리비아는 모든 경제 수입의 50%가 외채 상환에 사용될 정도였다. 1928년 7월 11일 일반은행법을 통해 볼리비아 중앙 은행을 설립하였고 세금 규정이나 통화 관련 법률도 개정했다.
1927년 2월 27일 파라과이 육군 순찰대와 현지 가이드가 볼리비아군에 체포되고 파라과이군의 아돌포 로하스 실바(Adolfo Rojas Silva) 중위가 사망하면서 사건이 커지기 시작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로하스 실바 중위의 죽음에 유감을 표했지만 파라과이 여론은 이를 "살인"이라고 부르며 분노했다. 1928년 1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회담이 결렬되었다. 1928년 12월 5일, 파라과이 기병대가 바이아네그라 지역의 북서쪽에 위치한 볼리비아군의 뱅가디아 요새(Fortin Vanguardia)를 공격했다. 파라과이군은 21명의 볼리비아 군인을 포로로 잡고 시설을 불태웠다.
같은 해 12월 14일, 볼리비아군은 보복으로 파라과이의 보케론 요새(Fortin Boquerón)를 점령했고, 15명의 파라과이군을 죽였다. 다음날엔 바이아네그라에 대한 공습을 감행하여 약간의 사상자와 피해를 입혔다. 1929년 9월 12일, 워싱턴 DC에서 미주 기구의 압력으로 양국은 원상복귀를 합의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일 뿐, 양국은 영토 확보를 위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당시 양국은 무기 산업이 열악하여 유럽과 미국에서 막대한 양의 무기를 수입해야 했다. 이러한 준비는 1932년 9월 전쟁 발발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1929년 3월 3일, 볼리비아의 첫 라디오 방송이 수도에서 방송되었다. 1933년엔 Radio Illimani라는 볼리비아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이 개관했다.[4] 이는 차코 전쟁으로 볼리비아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1929년 5월 14일, 총선 기간 동안 포토시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실탄을 발포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한스 쿤트 장군은 80발의 실탄을 발포했다고 공식 보고를 올렸다.
2.3. 실각과 그 후
에르난도 실레스의 대통령 임기는 1930년 1월 10일부로 종료될 예정이었는데 측근들은 임기 연장을 추진했고 같은 해 8월 6일까지 연장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실레스와 그 측근들의 최종 목표는 재선이었다. 당시 볼리비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4년 단임제로 제한되었기에 개헌을 위한 제헌의회 소집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통령직에서 사임해야 했고 그래서 1930년 5월 28일부로 사임했다.이후 한 달 동안 대통령 없이 장관들의 연립 정부 형태로 국정이 운영되었다. 문제는 아직 추방된 압돈 사베드라 부통령이 사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부통령인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해야 한다. 그러나 실레스 추종파는 원칙을 따르지 않고 실레스의 복귀 작업을 계속 진행했으며, 이는 결국 국민들의 지지를 잃는 결과로 이어진다.
1930년 6월 22일, 라파스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은 유혈진압을 시행하여 2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6월 24일 오루로(Oruro) 시에 주둔한 포병 연대의 봉기를 시작하여 군이 두개의 파벌로 나눠져 내전을 벌였다. 결국 6월 28일 한스 쿤트 장관의 추방으로 쿠데타는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레스 전 대통령의 자택이 공격받으며 대사관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결국 새로 들어선 카를로스 블랑코 갈린도 정부는 실레스를 칠레로 추방했다. 아후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칠레 주재 볼리비아 대사와 194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페루 주재 볼리비아 대사직을 역임했고 리마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