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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12:57:16

차코 전쟁

파일:파라과이 국장.svg 파라과이의 대외 전쟁·분쟁 파일:파라과이 국장(뒷면).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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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코 전쟁
스페인어: Guerra del Chaco / 과라니어: Cháko Ñorairõ / 영어: The Chaco War
파일:차코전쟁.jpg
날짜
1932년 9월 9일 ~ 1935년 6월 12일
장소
남아메리카
파라과이, 볼리비아 그란 차코 지역 일대
교전국
파일:파라과이_국기_(1842-1954).png 파라과이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볼리비아
지휘관
파일:파라과이_국기_(1842-1954).png 에우세비오 아얄라
파일:파라과이_국기_(1842-1954).png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파일:파라과이_국기_(1842-1954).png 라파엘 프랑코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다니엘 살라망카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호세 루이스 테하다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필리베르토 오소리오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호세 레오나르도 란사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한스 쿤트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엔리케 페냐란다
결과
파라과이의 승리
영향
파라과이: 분쟁 지역 대부분에 대한 소유권 확보
볼리비아: 파라과이 강 회랑 지대와 푸에르토카사도 항구 확보
병력
파일:파라과이 국기.svg 150,000명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250,000명
피해규모[1]
파일:파라과이 국기.svg 30,000 - 50,000명 사망, 2,556명 포로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60,000 - 80,000명 사망, 40,000명 부상,
21,000명 포로, 10,000 탈영

1. 개요2. 원인3. 무장
3.1. 보병3.2. 기병3.3. 포병, 기갑3.4. 보급, 정보3.5. 해군, 공군 전력
4. 경과
4.1. 피티안투타 호 사건4.2. 전쟁의 발발4.3. 볼리비아의 반격4.4. 파라과이의 2차 공격4.5. 임시 휴전4.6. 파라과이의 3차 공격4.7. 마지막 전투
5. 결과

[clearfix]

1. 개요

차코 전쟁은 그란 차코 지방[2]의 소유권을 놓고 파라과이 볼리비아 간에 일어난 전쟁이다. 파라과이가 승리해 그란 차코를 차지했으며 반건조 지형인 차코 지방에서 싸워서 목마름의 전쟁(La Guerra de la Sed)으로도 불린다.

2. 원인

갈등은 칠레가 볼리비아를 격퇴하고 볼리비아가 차지하던 안토파가스타 주를 합병한 태평양 전쟁의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전쟁에서 패배하여 1883년 태평양 연안과 인접한 안토파가스타 주 지역의 영유권을 칠레에게 넘기고 상실한 볼리비아는 대양으로의 진입로가 봉쇄되면서 내륙국이 되었다. 한편 전쟁에서 패전하여 해안지대 영토들을 모두 잃은 지 46년 뒤인 1929년 볼리비아는 비슷한 시기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와 싸우다가 과거 자국이 점유하던 영토와 도시들을 칠레에게 모두 잃고 패배했던 이웃나라 페루가 타크나 주 등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칠레에게 병합되었던 타크나 등 구 영토 일부를 칠레로부터 돌려받는 모습을 보게 되자 이전에 볼리비아 영토였던 안토파가스타 주에 대한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여 칠레에게 빼앗겼던 안토파가스타 주 등 태평양 해안 지대의 영유권을 돌려받겠다며 칠레에게 맞섰다. 하지만 이미 안토파가스타 주 지역의 주민 대부분은 안토파가스타가 볼리비아에서 칠레로 합병된 이후에 칠레 본국에서 이주해 온 칠레인 이주민과 그 후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지역 주민들은 볼리비아로의 재귀속을 결사반대했다.[3] 이러한 배경으로 볼리비아와 칠레 간의 안토파가스타 주에 대한 영유권 문제와 볼리비아의 태평양 해상 접근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적 협상이 여러번 있었지만 안토파가스타 주 일대에서 산출되는 막대한 구리자원이 매장된 주요 광산지대와 페루-칠레 국경 지대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해당 지방의 영유권을 놓고 싶어하지 않는 칠레 측의 거부와 상술한 현지 지역주민들의 볼리비아 귀속 반대 여론에 부딪쳐 협상은 모두 결렬되고 말았다.[4]

과거 볼리비아령이었다가 칠레에 넘어간 안토파가스타 주에 대한 영유권 및 해안 접근권 협상이 지정학적 요충지에 해당되는 안토파가스타 주의 소유권을 계속 쥐고 싶어하는 칠레의 소극적 거부와 볼리비아로의 재합병은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대를 외치는 현지 거주 칠레인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도저히 진척을 보지 못하게 된 볼리비아는 태평양과 대서양 바다를 접한 이웃국가인 페루와 아르헨티나로부터 리마와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을 빌려쓰기도 했지만[5] 지리학적으로 볼리비아 본국과 아르헨티나, 페루의 항구도시들과의 거리가 워낙 멀었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고, 이에 라플라타 강을 통해 대서양 연안에 이르는 진로를 개척하려고 했다. 이 진로는 그란 차코 지방을 지나는 길이었고 볼리비아는 그란 차코에 막대한 석유자원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1885년 볼리비아의 사업가 미겔 아라냐 수아레스(Miguel Araña Suárez, 1834~1893)가 파라과이 강 상류의 바이아 네그라(Bahía Negra) 지역[6]에 푸에르토 파체코(Puerto Pacheco) 항을 세웠다. 당시 볼리비아 정부는 바이아 네그라 지역을 파라과이 영토로 암묵적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아레스는 볼리비아의 영토로 멋대로 판단했다. 1888년 파라과이 정부는 해군을 파견하여 볼리비아인들을 이 지역에서 강제 퇴거시켰다. 계속되는 영토 갈등으로 1894년과 1907년 두 차례의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양국의 의회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한편 1905년 볼리비아는 차코 지역에 발리비안(Ballivián)과 과찰라(Guachalla)라는 두 개의 새로운 기지를 세웠다. 볼리비아 정부가 파라과이의 공식 항의를 무시한 채로 시간은 계속 흘렀다.

1927년 2월 27일 파라과이 육군 순찰대와 현지 가이드가 볼리비아군에 체포되었고 파라과이군의 아돌포 로하스 실바(Adolfo Rojas Silva, 1906~1927) 중위가 사망하면서 사건이 커지기 시작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로하스 실바 중위의 죽음에 유감을 표했지만 파라과이 여론은 이를 "살인"이라고 부르며 분노했다. 1928년 1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회담이 결렬되었다. 1928년 12월 5일 파라과이 기병대가 바이아 네그라 지역의 북서쪽에 위치한 볼리비아군의 방과르디아 요새(Fortin Vanguardia)를 공격했다. 파라과이군은 21명의 볼리비아 군인을 포로로 잡고 시설을 불태웠다.

같은 해 12월 14일 볼리비아군은 보복으로 파라과이의 그란 차코 황무지의 보케론 요새(Fortin Boquerón)를 점령했고 15명의 파라과이군을 죽였다. 다음날엔 바이아 네그라에 대한 공습을 감행하여 약간의 사상자와 피해를 입혔다. 그러다 1929년 9월 12일 워싱턴 D.C.에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내린 명령 및 그에 뒤따른 미주 기구의 압력으로 양국은 원상복귀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이었을 뿐, 양국은 영토 확보를 위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당시 양국은 무기 산업이 열악하여 유럽과 미국에서 막대한 양의 무기를 수입해야 했다. 이러한 준비는 1932년 9월 전쟁 발발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파라과이는 3국 동맹 전쟁의 파괴적인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기 때문에[7] 볼리비아는 자신만만했는데...

3. 무장

3.1. 보병

볼리비아군은 스위스제 M1904와 M1911 중기관총, 체코슬로바키아의 Vz.26 빅커스-베르티에 경기관총, Vz.24 7.65 mm 소총, MP28 9mm 기관단총 등 외국산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파라과이군은 독일제 MG08 기관총, 영국제 빅커스 기관총, 리-메트포드 소총, 콜트 MG38 수랭식 기관총, 덴마크제 마드센 경기관총 등 다양한 소형 무기들을 사용했다. 당시 제식 소총인 스페인산 M1927 7.65mm 소총[8]은 과열 문제로 인해 선호도가 없었다. 이에 전쟁 발발 이후,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군의 Vz.24 소총과 MP28 기관단총을 노획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파라과이의 인구는 88만 명으로 볼리비아의 215만명의 1/3에 불과했다. 1932년 6월 파라과이군은 4,026명(전투장교 355명, 군의관 146명, 비전투장교 200명, 부사관 690명, 병사 2,65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유럽-과라니족 혼혈인 메스티소가 대부분이었다.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파라과이 군대는 사실상 같았다. 볼리비아군은 90%가 케추아족(Quechua)이나 아이마라 족(Aymará) 혈통이었으며 하급 장교들은 스페인이나 다른 유럽계 혈통이며 육군 총사령관인 한스 쿤트 장군은 독일인이었다. 볼리비아군의 규모가 훨씬 컸지만 6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적은 없었고, 차코 지역에 배치된 병력은 전체의 3분의 2도 채 되지 않았다. 반면 파라과이는 전군을 동원했다.

문제는 볼리비아 병사들은 안데스 산맥의 고지대에서 생활하는 데 익숙한 케추아 또는 아이마라 출신의 농민 징집병이었으며 차코의 저지대, 덥고 습한 땅에서는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반면 파라과이 장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 프랑스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야전 경험을 쌓은 상태였고 최고 사령관인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과라니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정보를 얻었다. 참모인 라파엘 프랑코 대령은 침투 작전에 매우 능했고 이후에 전쟁 영웅으로까지 칭송될 정도였다. 파라과이는 17세 이상 남성에 대한 징병제를 실시했고 경찰까지 군에 동원할 정도로 총력전 태세였다. 이겼기에 망정이지 졌으면 삼국동맹전쟁 시즌2 만들뻔

양쪽 모두 전쟁 자체를 기획할 만한 최고 지휘관급 인재가 없다는 약점이 있었는데 둘 다 유럽에서 퇴역 장군을 영입해서 해결했다. 볼리비아는 독일의 한스 쿤트 장군을 영입했고 파라과이는 주앙 베레예프 장군 등의 저렴한 러시아 지휘관들(…)을 영입했는데 여기에서 파라과이가 성공했다. 쿤트는 총사령관에 임명돼서 전적으로 볼리비아의 작전계획을 맡았는데 1차대전의 경험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현지에 맞지 않는 전략전술을 펼쳤다. 파라과이쪽의 러시아 지휘관들은 초기에 볼리비아군을 파라과이가 막는 상황에서 효율적인 방어계획을 세웠고 이후의 공세도 베레예프는 브루실로프 공세의 경험으로 훌륭하게 역습계획을 세웠다. 파라과이측 총사령관이었던 에스티가리비아는 이들을 훌륭하게 활용했다.

3.2. 기병

건조한 그란 차코 지역에선 말들에게 충분한 물과 먹이를 제공할 수 없었고 양군의 기병대 상당수가 사실상 보병으로 복무했다. 소수의 기병만이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3.3. 포병, 기갑

볼리비아는 전쟁부 장관인 한스 쿤트 장군의 주장에 따라 볼리비아는 보병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다수의 경전차와 탱크를 구입했다. 독일에서 교관들을 요청하여 8주 간 승무원 훈련을 시행했다. 볼리비아가 사들인 빅커스 Mk. E A형과 B형은 1932년 12월부터 볼리비아군에 투입되었다. 볼리비아는 파라과이에 비해 대포와 기갑차량의 양적 측면에서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그란 차코의 복잡한 지형, 부족한 수자원, 불충분한 병참 준비로 인해 볼리비아군의 기갑차량 수천대가 먼지로 인해 못 쓰게 되었다.

파라과이는 사거리가 3,000야드에 달하는 브랑 Mle 31 박격포를 구입했다. 브랑 박격포는 자체 수류탄인 카룸베이(Carumbe'i)[9]와 함께 효과적으로 적을 격퇴했다. 사실 이 박격포는 유럽에서는 안 팔리던 재고품이었다. 파라과이도 처음에는 제대로 된 야포를 사려고 했는데, 무기상들이 재고품 처리를 위해 같은 값에 더 많은 포(야포 하나 가격이 박격포 3개)를 살 수 있다고 꼬드겼고 파라과이는 돈도 부족한데다가 구입하러 간 정부측 인원이 무기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구입하게 된 것이었다. 유럽 같은 환경에서는 숫자가 1/3이라도 야포쪽이 더 유용했겠지만 차코 전쟁은 주로 밀림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이런 환경에서는 오히려 박격포가 더 효과적이었다.

3.4. 보급, 정보

파라과이군은 무선 통신 기술을 사용했으며[10] 파라과이 강으로 배를 통해 이동할 수 있었다. 반면 볼리비아군은 전장까지 안데스 산맥을 건너 800km나 이동해야 했으며 시간도 14일이나 소요되었다. 또 그란 차코 지역의 열악한 물 공급과 건조한 기후는 탈수로 인한 수천 명의 비전투 사상자를 야기했는데 피해자의 대부분이 볼리비아군이었다.

3.5. 해군, 공군 전력

차코 전쟁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공중전이다. 양측 모두 구식 단발 복엽 전투기와 폭격기를 사용했다. 파라과이군은 14대의 프랑스제 포테즈 25를 배치했고 볼리비아군은 최소 20대의 미제 CW-14 오스프리를 배치했다. 특히 볼리비아는 국제연맹의 무기 금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민간 수송기로 위장한 소수의 T-32 콘돌 II 쌍발 폭격기 겸 수송기 도입까지 추진했으나 결국 페루에서 걸려 실패했다. 하지만 독일제 Ju 52 수송기 4대를 확보하여 대규모 수송이 가능했다.

파라과이 해군[11]은 수천 명의 병력과 수 톤의 보급품을 파라과이 강을 통해 전선으로 이송했으며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우마이타(Humaitá)급 초계정을 운용했다. 1934년 12월 22일 밤 파라과이 해군 항공대는 남아메리카에서 첫 야간 공습을 감행했다. 파라과이 해군은 이날을 "해군 항공대의 날"을 기념하여 기념하고 있다.

볼리비아군은 최소 10척의 경비정과 수송선을 배치했으며 주로 마모레-마데이라 철도[12]를 통해 그란 차코 북부 지역으로 군수품을 수송했다. 해군의 경우 파라과이가 우세했다.

4. 경과

4.1. 피티안투타 호 사건

1932년 6월 15일 볼리비아군 파견대가 피티안투타(Pitiantuta) 호수에 위치한 파라과이군의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요새를 점령하고 불태웠다. 이는 볼리비아 대통령 다니엘 살라망카가 그란 차코에 대한 파라과이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감행되었다. 한 달 후인 7월 16일, 파라과이군이 볼리비아군을 이 지역에서 몰아냈다.

이후 살라망카 대통령은 코랄레스, 톨레도, 보케론 요새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파라과이 정부는 반환을 요구했으나 살라망카 대통령은 이 지역들을 분쟁 지역으로 설정하고 군대를 파견하며 갈등을 고조시켰다. 같은 해 8월, 볼리비아는 분쟁 지역의 군 병력을 6,000명으로 늘렸다. 당시 볼리비아는 차코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약하다는 것을 사전에 파악하고 파라과이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정하기 위해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이에 파라과이는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의 지휘로 1만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4.2. 전쟁의 발발

1932년 9월 9일 파라과이군이 보케론 요새를 공격하며 차코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보케론 요새에는 619명의 볼리비아군이 지키고 있었고 파라과이는 5,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22일 동안 포위했다. 2,500명의 볼리비아군이 남서쪽에서 포위망을 풀려고 시도했으나 파라과이군에게 격퇴당했다. 몇몇 볼리비아 부대는 보급품을 가지고 보케론 요새로 진입했고, 볼리비아 공군은 포위된 병사들에게 식량과 탄약을 투하했다. 9월 9일 시작된 포위는 1932년 9월 29일 보케론 요새가 함락되면서 끝이 났다.

보케론 요새가 함락된 후에도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의 최전선 전초기지인 아르세(Arce) 요새로 진격했으나 이미 그곳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르세를 방어하던 4,000명의 볼리비아군은 남동쪽으로 후퇴했다.

4.3. 볼리비아의 반격

1932년 12월, 모든 준비를 마친 볼리비아군은 한스 쿤트 장군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쿤트는 1차 대전때부터 볼리비아의 군사 고문으로서 볼리비아 육군 장교들과 정치 엘리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쿤트의 작전은 볼리비아 제1군단이 파라과이의 나나와(Nanawa) 요새를 시작으로 이슬라 포이(Isla Poí)에 위치한 중앙사령부까지 진격하는 것과 함께 볼리비아 제2군단이 코랄레스, 톨레도, 페르난데스의 요새들을 점령하여 파라과이 강을 따라 파라과이의 도시 콘셉시온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1933년 1월 볼리비아 제1군단은 나나와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라과이군의 거센 저항으로 전황은 대치 양상으로 흘러갔다. 볼리비아 제2군단은 코랄레스 요새와 플라타니요스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페르난데스 요새와 톨레도 요새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1933년 2월 26일부터 3월 11일까지 이어진 포위전 이후, 제2군단은 톨레도 요새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코랄레스 요새 근처로 철수했다.

쿤트는 알리우아타 요새를 점령했고 파라과이 제1사단의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이후 캄포 호르단(Campo Jordán) 전투를 통해 파라과이 제1사단을 격퇴하고 후퇴시켰다. 1933년 7월, 쿤트는 나나와 요새 2차 공격을 위해 포병, 공군, 전차,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했지만 2,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결국 실패했다. 같은 해 9월, 쿤트는 사령관직 사임을 청했지만 반려되었고 이 전투는 파라과이군으로 분위기가 넘어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4.4. 파라과이의 2차 공격

1933년 9월, 파라과이군은 알리우아타 요새가 약화된 틈을 타 점령하고 509명의 볼리비아군을 포로로 잡았다. 이 공로로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가 대장으로 진급했고 볼리비아는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을 점령하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하고 방어전과 소모전으로 전환했다.

1933년 12월 10일,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군 제9사단과 제4사단을 무찔렀다. 볼리비아군은 2,600명이 전사하고 7,500명이 항복했다. 단 900명의 볼리비아 병력만이 탈출할 수 있었다. 파라과이군은 포로로 잡힌 볼리비아군으로부터 소총 8,000정, 기관총 536정, 박격포 25정, 전차 2량, 대포 20문을 확보했다. 쿤트는 볼리비아 육군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한편 나나와 요새 근처의 캄포 데비아(Campo de Vía) 전투에서 패배한 볼리비아군은 북서쪽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라파엘 프랑코 대령은 추가적인 진격을 제안했지만 에우세비오 아얄라 대통령은 이미 이 전쟁에서 승리한거나 다름없다고 여겨 기각했다.

4.5. 임시 휴전

1933년 12월 19일 20일간의 휴전이 합의되었다. 1934년 1월 6일, 휴전협정이 만료되자 볼리비아는 군대를 재편성하고 첫 공세에 참여한 병력보다 더 많은 병력을 집결시켰다.

4.6. 파라과이의 3차 공격

1934년 2월 11일 에스티가리비아 장군은 볼리비아군의 마가리뇨-라치나 방어선을 뚫었고 3월 27일 카냐다 타리하(Cañada Tarija) 전투에서 1,000명의 볼리비아군을 포로로 잡았다. 같은 해 5월 25일, 볼리비아군의 반격으로 67명의 파라과이 장교들과 1,389명의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1934년 11월,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군 남쪽전선의 최전방 요새인 발리비안(Ballivián) 요새를 점령했다.

1934년 11월 9일, 12,000명의 볼리비아 기병대가 이렌다궤(Yrendagüé) 요새를 점령했다. 이 지역은 그란 차코 지역에서 담수을 얻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지역이었다. 볼리비아군이 다음 전장으로 떠나고 파라과이군이 이곳을 탈환했다. 복귀한 볼리비아 기병대는 갈 곳도 없고 물도 없이 떠돌다가 비참하게 사망했다. 결국 1934년 11월 27일 볼리비아 장군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다니엘 살라망카 대통령을 사임시켰다. 이후 호세 루이스 테하다 부통령이 뒤를 이었다.

북부 및 북동부 전선이 붕괴된 후 볼리비아는 남부 전선의 비야 몬테스(Villa Montes)에 위치한 사령부에 모든 병력을 집중시켰다. 1934년 12월 28일, 파라과이군은 이비보보(Ybybobó)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200명의 볼리비아군이 전사하고 1,200명이 항복했지만 파라과이군은 수십 명의 병사만 잃었다. 이 승리로 파라과이군은 안데스 산맥에 도달하였다. 1935년 1월 11일,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의 2개 연대를 격퇴시켰다. 이후 파라과이는 비야 몬테스와 산타 크루스 데라시에라 간의 도로를 장악하면서 고립시켰다.

4.7. 마지막 전투

볼리비아 본토 지역까지 진격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자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는 비야 몬테스에 대한 총공격을 결정했다. 1935년 2월 7일, 약 5,000명의 병력이 첫공세를 나섰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3월 6일 비야 몬테스 북쪽으로 130km 떨어진 카미리(Camiri) 유전을 공격했으나 다시 실패했다.

4월 15일, 파라과이군은 파라페티 강에 있는 볼리비아군 전선을 돌파하여 차라과 시를 점령했다. 볼리비아군은 이후 반격으로 4월 25일 475명의 포로를 붙잡았다.

1935년 6월 4일, 볼리비아 연대가 결국 포소 델티그레인가비(Pozo del Tigre-Ingavi) 전투에서 패배하고 항복하면서 차코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6월 12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5. 결과

파일:Chaco war map.svg
차코 전쟁의 결과. 붉은 실선은 휴전 협정으로 확정된 현재의 국경, 검은 선은 육상 국경, 파란 선은 강으로 이뤄진 국경, 붉은 점선은 파라과이군의 최대 진격지점, 그리고 하늘색 선은 볼리비아군의 최대 진격 지점이다.

1938년 7월 21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으로 그란 차코 지역의 3/4가 파라과이의 영토가 되었다.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과 파라나 강에 대한 항행권과 푸에르토 카사도 항구를 얻었다.

전쟁은 파라과이의 승리로 끝났지만, 양측 모두에게 상처만을 남겼다. 볼리비아는 전체 인구의 3%인 65,000명에서 80,000명 사이의 인구를 잃었고 20,000명의 병력(볼리비아 인구의 2%)이 포로로 잡혔다.

파라과이는 전체 인구의 3.5%인 45,000명을 잃었다. 하지만 42,000정의 소총, 5,000정의 기관총과 기관단총, 2,500만 발의 탄약을 볼리비아군으로부터 빼앗았다.

볼리비아는 험난한 지형과 날씨, 물 공급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대부분의 원주민 병사들은 해발 3,700m 이상 지역에서 거주했는데 갑자기 저고도의 열대 기후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양측 전사자는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절반 이상이 전투와 관련된 원인보다는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과 다른 감염 등의 비전투 요인으로 사망했다. 또한 전쟁은 두 나라를 경제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 전쟁은 파라과이에게 있어서 3국 동맹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지만 정작 당시 대통령인 에우세비오 아얄라는 전후후유증 수습에는 실패해서 1936년 2월 17일에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정작 피튀기는 전투를 통해 얻은 그란 차코 지방에선 2012년 11월 26일에야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매우 극소량이다.


[1] 모든 수치는 추정치이다. [2] Chaco Boreal이라고도 불린다. 면적은 25만 9,000km²에 달한다. [3] 타크나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비해 칠레인 이주민 인구가 적었다. 실제로 칠레가 이 지방을 점유했을 당시 이 지역의 인구를 늘려보려고 칠레에서 자국민 이주를 권유해보기도 하고, 당시 남미 국가들로 이민을 오는 유럽 각국의 이민자들의 정착을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실패했으며 결국 자국민과 이민자들의 이주 기피와 국토를 유지할만한 지역 인구의 부족으로 1929년 칠레는 페루에게 이 일대의 영유권을 돌려줬다. [4] 여담으로 이때 당시 칠레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이전 페루와 볼리비아의 영토였다가 전쟁을 통해서 칠레에 합병됐던 아리카, 이키케, 타크나, 안토파가스타 지역들 중 구리 등 광물 자원이 많이 산출되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은 계속 점유하고, 구리, 암염, 초석 같은 광물자원들이 전부 다 고갈됐거나 광물자원 산출량이 안토파가스타보다 몹시 적었던 아리카와 이키케, 타크나 등은 페루에게 영유권의 일부 혹은 전토를 다 돌려줘서라도 태평양 전쟁 당시 칠레에게 빼앗긴 영토 문제로 인해 칠레와 대립하고 있었던 페루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29년 칠레령 잔류 및 페루로의 재귀속 여부를 묻는 타크나, 아리카, 이키케 지역에 대한 주민투표가 페루와 칠레간의 합의를 통해서 실시됐는데 칠레인 인구 비율이 아주 적고 페루계 주민들이 가장 많았던 타크나 지역이 페루 재귀속에 찬성하는 표를 던지면서 타크나 지역은 페루에게 돌아갔고, 칠레 합병 이후 이주 칠레인 주민들의 상주 비율이 높았던 아리카와 이키케는 칠레령 잔류에 찬성하는 표를 던지면서 칠레령으로 남아 현재의 페루-칠레 국경선이 새롭게 확정되었다. [5] 이는 21세기에도 마찬가지여서 볼리비아는 아르헨티나나 페루 정부로부터 대서양과 태평양 연안과 접한 아르헨티나와 페루의 항구들을 지금까지도 빌려쓰며 해상무역을 하고 있다. [6] 현재는 파라과이의 알토파라과이 주 소속이다. [7] 사실 21세기에도 파라과이는 3국 동맹 전쟁의 영향 아래에 있다. [8] 독일 마우저사 제품이며 스페인의 오비에도 병기창에서 제작되었다. [9] 과라니어로 작은 거북이를 뜻한다. [10] 볼리비아군엔 이러한 기술이 없었다. [11] 파라과이와 볼리비아는 내륙국이지만 양쪽 모두 강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12] 1903년 페트로폴리스 조약으로 인해 건설된 철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