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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20:02:34

에두아르트 판 헬러

이름 레이누드 3세 판 헬러
Eduard van Gelre
출생 1336년 3월 12일
헬러 공국 아른험
사망 1371년 8월 24일
신성 로마 제국 율리히 공국 바이스와일러
아버지 레이누드 2세 판 헬러
어머니 잉글랜드의 엘레노어
형제 레이누드 3세
직위 헬러 공작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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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러 공작. 형제 레이누드 3세를 폐위한 뒤 헬러 공작이 되었고, 바이스와일러 전투에서 브라반트군과 맞붙어서 승리했지만 전투 중에 전사했다.

2. 생애

1336년 3월 12일 헬러 공국 아른험에서 헬러 공작 레이누드 2세 판 헬러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 프랑스의 이자벨의 딸인 잉글랜드의 엘레노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343년 10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당시 10살이었던 형 레이누드 3세가 헬러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1350년, 후크파와 대구파 사이의 분쟁이 벌어졌을 때, 레이누드 3세는 후크파를 지원했다. 이에 대구파는 에두아르트를 지원했고, 이로 인해 형제는 후크파와 대구파의 수장으로서 내전을 벌였다.

1352년, 양자는 화해 협약을 맺었고, 그는 형제로부터 루르몬트와 케셀 영지를 받았다. 그러던 1354년, 후크파의 일원이었다가 대구파로 전향한 에메릭 판 드루텐이 레이누드 3세 또는 그의 추종자가 사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암살자에게 피살되었다. 이에 분개한 대구파가 대대적으로 반기를 들자, 레이누드 3세는 이에 대응해 벨루웨 농노들에게 자신을 위해 싸워준다면 '자유 농부'가 될 특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호응한 농부 2,000명이 에두아르트와 지지자들이 장악한 아른험으로 진격했지만, 브리옌베르그 전투에서 에두아르트와 수백 기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농부들은 언덕에서 진을 치고 첫번째 전투에서 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기사들이 두번째로 돌격했을 때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고 무장도 덜 되었던 농부들이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에두아르트의 기사 100명이 전사한 반면, 농부들은 수백 명이 죽었다.

이후에도 내전을 이어가던 레이누드 3세는 1361년 5월 티엘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해 에두아르트에게 생포된 뒤 처음에는 로젠달 성에 4년간 감금되었다가 니젠베크 성에 투옥되어 6년간 더 감금되었다. 그는 총 10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운동 부족과 폭식으로 인해 너무 뚱뚱해져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형을 폐위시킨 에두아르트는 헬러 공작이 되었고, 후크파 토벌 작전을 계속 이어갔다.

1371년,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측에 고용되었던 대규모 용병 집단이 라인강과 뫼즈강 사이 지역을 배회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프랑스 용병들이 율리히 공국 영토에서 활동하던 브라반트 상인들을 약탈했지만, 율리히 공작 빌헬름 6세는 보상금 지급을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룩셈부르크 공작이자 브라반트 공작 벤첼 1세는 복수를 결심하고, 나무르 백작 기욤 1세의 지원을 받아 율리히 공국으로 진군했다. 빌헬름 6세는 이에 맞서 에두아르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에두아르트는 이복 누이 마리아의 남편인 빌헬름 6세를 돕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기로 했다.

1371년 8월 22일, 아헨 바로 북쪽 마일인 바이스와일러에 도착한 벤첼 1세와 기욤 1세의 군대가 율리히 6세를 몰아붙였다. 그러던 중 에두아르트가 전장에 도착해 역공을 가해 적군을 순식간에 무너뜨렸고, 벤첼 1세와 기욤 1세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생포되었다. 그런데 전투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그는 도중에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수항원인 헤르만 리어스 판 히스가 그를 향해 화살을 쐈다고 한다. 그는 이틀 후인 8월 24일에 숨을 거두었다. 에두아르트가 사망한 뒤, 그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던 형 레이누드 3세가 해방된 뒤[1] 헬러 공작으로 선포되었으나 1371년 12월 24일 아른험에서 사망했다.

에두아르트는 1368년 하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작 알브레히트 1세의 딸인 카타리나와 약혼했다. 당시 카타리나는 7살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카타리나가 성인이 되는 시기에 거행되기로 했다. 그러나 에두아르트가 그 전에 전사했기 때문에, 결혼은 성립되지 않았다. 에두아르트와 레이누드 3세 모두 적출자를 낳지 못했기에, 두 사람의 이복 누이인 메흐텔트 마리아가 헬러 공작위를 놓고 격돌한 끝에 마리아가 승리했고, 율리히 공작 빌헬름 7세 폰 율리히가 마리아의 아들 자격으로 헬러 공작위를 세습했다.


[1] 전승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를 꺼내기 위해 벽을 부숴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