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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13:57:53

레이누드 2세 판 헬러

파일:레이누드 2세 판 헬러.jpg
이름 레이누드 2세 판 헬러
Reinoud II van Gelre
출생 1295년
헬러 벡국
사망 1343년 10월 12일
헬러 공국 아른험
아버지 레이누드 1세 판 헬러
어머니 마가레타 판 담피에르
형제 그바이데, 필립스, 엘리사벳, 필리파, 마가레타
아내 소피 베르투, 잉글랜드의 엘레노어
자녀 마가레타, 메흐텔트, 엘리사벳, 마리아, 레이누드 3세, 에두아르트
직위 헬러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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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러 공작.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적했다.

2. 생애

1295년경 헬러 백작 레이누드 1세와 니무르 변경백 기 드 담피에르의 딸 마가레타 판 담피에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그바이데[1], 필립스[2], 엘리사벳[3], 필리파[4], 마가레타[5]가 있었다.

아버지 레이누드 1세는 1288년 림부르크 영지를 놓고 브라반트 공작 장 1세 브라반트와 맞붙었다가 참패해 림부르크의 소유권을 내준 뒤 막대한 빚을 짊어졌고, 빚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재정이 계속해서 악화된 끝에 영지 대부분을 저당잡혔다. 급기야 1315년 경제 위기가 발생하자, 레이누드 1세는 헬러 백작령 전체를 저당 잡혀서라도 빚을 갚기로 했다. 레이누드 2세는 이러다가 영지를 상속받지 못할 것을 우려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스스로 행정을 맡았다. 1318년 9월 3일, 그는 정식으로 헬러 백작에 취임했고, 아버지를 몽포르 성의 방어탑인 그라우베르트의 지하 감옥에 투옥했다. 레이누드 1세는 그곳에서 6년간 갇혀 지내다가 1326년 10월 21일에 옥사했다.

레이누드 2세는 토지와 제방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고, 바닷물의 보유와 내수 및 지하수의 배출을 개선하기 위한 조항과 규정을 만들었다. 이 법안은 부분적으로는 공법 및 사법 관습법의 기록으로 구성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제방, 둑, 안벽 검사 및 사법 조직에 관한 새로운 법률로 구성되었다. 그는 이를 통해 제방 사업을 통해 새롭게 확보한 땅을 헬러 백국의 영토로 삼았다. 1326년 리에주 주교에게 고용되어 뮌스터 주교인 헤세의 루트비히와의 전쟁에 투입되어 브레드보르트 전투에서 승리한 뒤 큰 금액을 보상으로 받아서 빚을 청산하는 데 썼으며, 1328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루트비히 4세의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에 참석했다.

1334년 다른 저지대 국가들과 함께 프랑스의 확장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고, 1337년부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었다. 1338년 즈윈 호수에 접근하는 프랑스 함대에 대해 잉글랜드군에 경고했으며, 프랑스를 지지하는 플란데런 백국으로부터 여러 플란데런 도시를 점령하고 에드워드 3세의 왕실 대리인 역할을 맡았다. 1339년 3월 19일 프랑크푸르트 독일 의회에서 루트비히 4세와 에드워드 3세 사이의 중개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헬러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1342년 아른험 인근 몬니크이젠에 카르투시안 수도원을 설립했다. 1343년 거주지를 헬러에서 네이메겐으로 옮겼지만, 그해 10월 12일 아른험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3. 가족



[1] ? ~ 1315년 이후 [2] 유년기에 사망 [3] ? ~ 1354, 쾰른의 성 클라라 수녀원장 [4] ? ~ 1352, 쾰른의 성 클라라 수녀 [5] 1299년 이전 ~ 1346/1347, 클레베 백작 디트리히 7세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