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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31 09:35:51

알브레히트 1세(하바이에른 공작)

파일:알브레히트 1세(하바이에른 공작).jpg
이름 알브레히트 1세 폰 바이에른
Albrecht I. von Bayern
출생 1336년 7월 25일
신성 로마 제국 바이에른 공국 뮌헨
사망 1404년 12월 16일 (향년 68세)
에노 백국 헤이그
아버지 루트비히 4세
어머니 에노의 마르그리트 2세
형제 마르가레테, 안나, 엘리자베트, 루트비히 6세, 빌헬름 1세, 오토 5세, 베아트릭스, 아그네스, 루트비히
아내 마르가레테 폰 브리크, 마르가레테 폰 클레베
자녀 카타리나, 요하나[1], 마르가레테, 빌헬름 2세, 알브레히트 2세, 요한 3세, 요한나 소피, 빌헬름( 사생아), 에두아르드(사생아), 루트비히(사생아), 요한나(사생아), 마르가레테(사생아), 나탈리아(사생아), 더크(사생아), 아드리안(사생아)
직위 니더바이에른 공작, 에노, 제일란트, 홀란트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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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더바이에른 공작, 에노, 제일란트, 홀란트 백작.

2. 생애

1336년 7월 25일 신성 로마 제국 바이에른 공국 뮌헨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와 에노 백작 기욤 1세 드 에노의 딸 에노의 마르그리트 2세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전처에게서 얻은 자녀들까지 포함하면 5남이었다. 1345년 9월 26일, 외숙부인 에노 백작 기욤 2세 드 에노가 프리슬란트 원정에서 자녀 없이 전사하자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를 물려받았다. 1346년 9월 7일, 루트비히 4세는 마르그리트의 둘째 아들 빌헬름이 어머니의 상속자가 되며, 빌헬름이 자식 없이 죽으면 알브레히트가 뒤를 잇게 했으며 전처 소생의 아들들은 저지대 국가 상속을 포기하게 했다.

알브레히트는 1347년부터 1349년까지 다섯 형제와 함께 바이에른과 다른 지역의 비텔스바흐 영지를 공동으로 통치했다. 1349년 란츠베르크 조약으로 바이에른 공국이 분할되어 그는 이복형 슈테판 2세, 손윗형 빌헬름 1세와 함께 니더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1353년 레겐스부르크 조약으로 빌헬름 1세와 함께 니더바이에른, 슈트라우빙 영토, 저지대 국가의 홀란트, 제일란트, 에노, 프리슬란트로 이루어진 지역을 차지했다. 빌헬름은 저지대 국가를 통치했고 알브레히트는 슈트라우빙을 통치했다.

1357년 가을, 잉글랜드 왕국에서 돌아온 빌헬름 1세가 심각한 정신질환을 보인 끝에 그의 기사 중 한 명인 헤라르트 판 바테링어(Gerard van Wateringe)를 살해했다. 이 정신 질환이 일시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알브레히트 1세는 섭정으로서 형을 대신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한 슈트라우빙의 장관 페터 예거를 추방해 권력을 강화했고, 슈트라우빙에 공작 궁전을 지었다. 하지만 1358년부터 주로 헤이그의 비넨호프에 거주했다. 1359년 델프트, 1361년 미델뷔르흐에서 자신에게 대항해 봉기를 일으킨 대구파(Kabeljauwen)를 진압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왕비 에노의 필리파의 상속권을 이유로 에노 백국을 비롯한 저지대 국가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는 대구파 반란을 은밀히 후원했으며, 1364년 초 저지대 국가에 사절을 보내 에노의 필리파를 새 영주로 받들라고 권고했다. 1364년 5월 18일, 알브레히트 1세는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및 프리슬란트 주 총독에게 에드워드 3세의 주장에 대한 의견을 밝히라고 요청했다. 총독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영역의 관습은 장자 상속에 의한 남성 상속을 우선시한다고 답했다. 이에 알브레히트는 4개 주 대표의 의견을 잉글랜드 사절단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이 정도로 승복하지 않았고, 1365년 12월 알브레히트 1세를 궁정에 초대해 이 문제를 함께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알브레히트는 추종자 120명과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프리슬란트 주의 구성원들과 동행한다는 조건으로 이에 응했고, 런던에서 에드워드 3세와 회담했다. 그 결과 에드워드 3세는 그가 잉글랜드에 우호적인 자세를 보이는 조건하에 그의 계승을 인정하기로 했다. 얼마 후, 헬러 공작 에두아르가 영지를 침공했지만, 알브레히트는 이를 격퇴하고 헬러 공국 일부를 황폐화시켰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고, 알브레히트는 자기 딸을 에두아르의 조카이자 상속인인 빌헬름 7세 폰 율리히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는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가신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인기를 잃었다. 일부 가신은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과 동맹을 맺고 그에게 대항했고, 그는 진압에 실패한 뒤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이후 네덜란드 귀족 여성 알레이드 반 포엘게스트를 정부로 두고 총애했는데, 대구파 인사들이 알레이드의 후원에 힘입어 알브레히트의 궁정에서 잇따라 임명되자, 갈고리파(Hoeken)는 이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1389년 4월, 형 빌헬름 1세가 케누아 성에 갇혀 지내다가 사망했다. 알브레히트 1세는 비로소 정식으로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작이 되었다. 그러나 1392년 9월 22일, 알레이드와 궁정 관리 빌럼 쿠세르가 헤이그에서 갈고리파의 일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알브레히트는 갈고리파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공세를 개시해 성을 하나씩 공략하고 갈고리파 인사들을 박해했다. 그의 아들이자 상속인로서 에노 총독을 맡고 있던 빌헬름 2세는 갈고리파와 친분이 있었기에, 자기 입지가 불안하다고 여기고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394년 초, 알브레히트 1세와 빌헬름 2세는 화해했고 빌헬름 2세는 에노 총독의 권리를 회복했다.

1397년, 알브레히트 1세는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로부터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다. 1404년 12월 16일에 사망했고, 장남 빌헬름 2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3. 가족



[1] 보헤미아 국왕 겸 독일왕 바츨라프 4세와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