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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초대 | 권한대행 | 제2대 |
알렉산드르 자하르첸코 | 드미트리 트라페즈니코프 | 데니스 푸실린 | |
국가원수:
인민의 주지사 정부수반: 총리 |
}}}}}}}}}}}}}}}}}} |
알렉산드르 자하르첸코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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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7b1bb><colcolor=#ff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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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6년 6월 26일 |
소련
우크라이나 SSR
도네츠크주
도네츠크 (現 러시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도네츠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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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8년 8월 31일 (향년 42세) |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도네츠크 (現 러시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도네츠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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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1976~1991) [[우크라이나| ]][[틀:국기| ]][[틀:국기| ]] (1991~2014)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2014~2018) |
학력 | 도네츠크 공과대학교 |
직업 | 군인, 정치인 |
재임 기간 |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내무부 차관 |
2014년 4월 7일 ~ 2014년 5월 16일 | |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군 사령관 | |
2014년 5월 16일 ~ 2014년 7월 6일 | |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총리 | |
2014년 8월 7일 ~ 2018년 8월 31일 | |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국가수반 | |
2014년 11월 4일 ~ 2018년 8월 31일 | |
정당 | |
배우자 | 나탈리야 자하르첸코 |
자녀 | 4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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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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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자하르첸코는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으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국가수반과 총리를 동시에 역임했다.
2. 생애
1976년 6월 26일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도네츠크주 도네츠크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인,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다. 1995년 도네츠크 산업 자동화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 광산에서 전기 기술자로 근무했다. 도네츠크 우크라이나 내무부 법률 연구소에서 공부했고, 이후 기업을 창업하면서 석탄산업과 식료품 생산 및 유통, 도서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 손을 대면서 재산을 많이 모았으며 해당지역에서는 꽤 거물급 기업인으로 이름을 날렸다2010년경부터 하르키우를 기반으로 한 군인, 경찰 변호와 군사 역사를 다루는 비영리 단체인 '오플롯'의 도네츠크 지부를 이끌었다.
2.1. 정치 활동
그러다가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친서방 세력이 정권을 잡자 이에 반발했고, 2014년 4월 16일 동부 우크라이나 위기 초반 오플롯 소속 7명의 무장 남성들을 이끌고 최고 라다에 최고 라다에 의해 반려된 법안에 대한 국민 투표를 요청하며 도네츠크주 청사를 점령했다. 5월 16일에는 도네츠크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7월 22일 코제브냐 전투 중 팔에 부상을 입었다.[1]2014년 8월 7일 초대 총리 알렉산드르 보로다이에 의해 차기 총리로 지명되었다. 자하르첸코가 서방에 동부 우크라이나 위기가 스스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보로다이가 직접 러시아 정부에 추천했다고 알려졌다. 9월 14일에는 민스크 협정에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대표로 서명했다.
2014년 11월 2일 2014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총선에서 도네츠크 공화국 소속으로 출마해 78.93%의 득표율로 11월 4일 국가수반 직에 올랐다. 선거 공약으로 종전 시 폴란드보다 높은 연금을 줄 것을 내세웠으며, 돈바스가 아랍에미리트와 같이 자원이 풍부하지만 전쟁 중이기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종전 의지를 내비쳤다. 또한 "요즘 세대는 민주주의 아래에서 자라 아버지 둘, 어머니 둘을 가질 수 있는데 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보수적인 성 가치관을 드러냈다.
2014년 12월 9일, 일본의 제재 명단에 추가되었다. #
제2차 민스크 협정에서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대표로 서명했으며, 포로를 석방하지 않거나 철군하지 않을 경우 하르키우를 점령하고 데발체보의 우크라이나군 수비대를 공격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2015년 1월 14일부터 2월 20일까지 러시아군의 지원 하에 데발체보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2월 17일 데발체보 전투 막바지에 다리 부상을 입었다. 이후 급하게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알쳅스크의 병원에 입원했고, 루간스크 국가수반인 이고리 플로트니츠키가 병문안을 왔다. #
2017년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내 정치 위기 당시 루간스크 내무부의 편을 들어 이고리 플로트니츠키의 축출에 이바지했다.
3. 사망
2018년 8월 31일 도네츠크의 카페에 설치된 폭탄이 폭발하며 사망했다.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외무부는 우크라이나를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해 비판했고, 우크라이나 측은 도네츠크 내 내분의 결과라고 반론했다. 2018년 9월 1일부터 3일까지를 추모 기간으로 결정해 개학을 9월 4일로 미루었으며, 9월 2일 도네츠크 오페라, 발레 극장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레오니트 파세치니크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국가수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이 조의를 표했다. 레오니트 파세치니크는 "자하르첸코가 든 투쟁의 깃발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돈바스에서는 이 살인 사건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2019년 6월 16일, 각종 조사와 우크라이나 보안국 요원인 세르히 베시타, 블라디슬라우 자이체우 및 기타 구금된 전직 보안국 요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용의자를 특정하는 데 성공했다. 안드리 바이달[2], 안드리 오텐코, 다미르 바시탄니코우가 직접적으로 연루된 요원들이라고 한다. #
2022년 9월 29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 도청한 올렉산드르 키야셴코 우크라이나 보안국 장교와 우크라이나 보안국 요원간의 통화에 따르면 자하르첸코 암살을 계획한 이가 암살자에게 500만 루블을 지급했다고 한다. 루간스크 측은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의 러시아 편입에 관한 국민투표 하루 전 우크라이나 보안국 장교 올렉산드르 키야셴코가 루간스크 고위 관리 독살을 준비하는 통화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말했다고 주장했다. #
4. 평가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고 영웅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생전 도네츠크 인민 민병대가 코제브냐 전투 이전까지 우크라이나의 공격을 방어하기만 했다고 밝히는 등 민병대가 도시와 사람들을 보호했다는 점을 일반 대중들에게 강조했으며, 러시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도네츠크 재건 사업을 빠르게 시행하고 연금 등 전쟁으로 누릴 수 없게 된 사회 복지 제도 등을 일부 복원한 것이 요인으로 보인다.5. 여담
생전 민족 볼셰비키당 당원 자하르 프릴레핀[3]과 친했다. 프릴레핀은 자하르첸코를 우크라이나의 5대 정치인이라고 칭송했으며 자하르첸코를 주인공으로 한 책을 쓰기도 했다. 자하르첸코는 프릴레핀의 영국 점령론을 옹호하며 이것이 러시아에 황금기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했다.2015년 인터뷰 영상에서 부친이 우크라이나 정부 통제지역에 살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연금을 못 받고 있다고 말했다.[4] 이외에도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격추 사건의 목격자로서 조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과 종전 조건, 러시아군 개입 부인 등이 담겨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