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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17:23:31

안병찬(1854)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치규(穉圭) / 규당(規堂)
출생 1854년 5월 3일
충청도 홍주목 화성면 행정리
(現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청대골마을)
사망 1929년 6월 2일 (향년 75세)
충청남도 청양군
본관 순흥 안씨[1]
가족 아버지 안창식, 어머니 파평 윤씨
서훈 건국포장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을미의병2.3. 을사의병2.4. 파리장서 사건과 말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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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독립운동가,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1854년 5월 3일 충청도 홍주목 화성면 행정리(現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청대골마을)에서 유학자인 아버지 안창식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영진(尹寧鎭)의 딸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생원시에 입격한 조부 안용(安溶, 1812 ~ 1884)[2]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했는데, 10여 세에 시, 서, 예에 두루 능했다고 한다. 그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절의 정신에 철저했으며, 성품 또한 강직했으며, 책을 읽는 도중 절의에 죽는 대목을 보면 이를 찬탄하면서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말했다. 39세 때인 1892년 과거에 응시했지만 과거 시험장이 매우 문란한 걸 보고 그만뒀다. 안병찬은 1894년부터 홍주향교의 전교를 맡아 향약을 베풀고 강회를 열어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같은 해 동학군이 홍주성을 공격하자, 그는 홍주목사 이승우를 도와 동학군을 물리쳐 향리에서 주자학 질서를 지키고자 했다.

2.2. 을미의병

1895년 3월, 조선 정부는 흑색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도록 한 '을미변복령'을 발표했다. 안창식은 이 소식을 듣고 중화가 무너진 것으로 보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호응하는 이가 적어서 계획을 미뤘다가 을미사변 단발령이 잇달아 터지자 장남 안병찬을 불러 "나는 늙어서 왕사에 전력할 수 없으니 너는 전력하도록 하라. 나는 뒤를 따라서 대책을 세워 응하겠다."고 말하고 의병 봉기를 지시했다. 이후 그는 청양 유생 채광묵과 장자 안병찬 등과 함께 1895년 11월 28일 화성에 사는 이인영의 집에서 '향회'를 실시해 홍주 일대 유생들을 집결시키고 군사 활동을 결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11월 29일, 안병찬과 채광묵은 의병 180명을 집결시키고 이들을 인솔해 홍주성에 먼저 입성했다. 안병찬은 관찰사에게 의리를 들어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고, 다음날 다시 부민을 단발시키지 말라고 내부에 건의할 것을 요구했다. 읩여들은 12월 3일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했다. 안병찬은 김복한과 함께 창의소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했지만,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그들을 모조리 체포하면서 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2월 4일 저녁 구차하게 살아 뭇 소인들로부터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머리를 온전히하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겨 칼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다음 날 새벽에 깨어난 뒤 문종이를 찢어서 목에서 난 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혈시를 지어 이승우에게 보냈다.
지사는 구렁에 처할 마음가짐 잊지 않고(志士不忘在溝壑)
용사는 목숨 버릴 각오 잊지 않네(勇士不忘喪其元)
차라리 머리 잘린 귀신이 될지언정(寧作斷頭鬼)
머리 깎은 사람 되지 않으리(不作剃髮人)
의리에 죽으니 무엇을 한하랴(死義何恨)
다만 노친이 계시는데(惟恨老親在堂)
끝까지 봉양 못하니 그것이 한이로다.(未克終養)

이 소식을 들은 이설(李偰)은 안병찬을 위한 시를 지었다.
장부는 죽음을 두려워 않지만(丈夫非愛死)
스스로 죽기란 가장 어려워(自死崔難爲)
이 일을 능히 할 이 몇이나 될까(幾人同此事)
열렬한 남아 하나 여기 있네.(烈烈一男兒)

그는 옥중에서 임승주가 주는 미음을 먹었지만, 목에서 난 상처구멍으로 새어나왔고, 구멍을 통해 잔기침도 나왔다. 12월 7일 서울에서 신우균(申羽均)이 군사를 이끌고 내려왔다. 다음날 안병찬은 사환에 업혀서 끌려가 진술을 요구받았지만 말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여서 붓으로 개략을 적었다. 이후 그의 상처는 옥바라지를 해주던 임한주의 극진한 치료로 10여 일이 지나 아물었다.

안창식은 아들이 체포되었으며 자살을 시도했다는 말을 듣고 애태우다가 12월 20일에 역시 체포되어 홍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아들을 만나게 해주길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시를 지어 답답한 심정을 표현했다.
천지가 어찌 이리 어둡고 차기만 한가(天地何晦寒)
지사가 의리를 펴지 못하네(志士未申義)
후면에는 공자의 위패가 있고(後有文宣宮)
앞면에는 선생들의 위패가 있는데(前有先生殿)
뒤를 보아도 부끄러운 일 없고(後瞻無所愧)
앞을 보아도 저버린 일 없구나(前瞻無所負)
부자가 함께 옥에 있으니(父子同就獄)
도로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리라(還爲世人笑)

이후 12월 30일 경무청에서 수감자들을 경무소 밖에 칼을 채우고 손을 묶은 채 일렬로 앉혔다. 이때 안창식, 안병찬 부자가 상면할 수 있었다. 안병찬은 핏자국이 있는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있었으며, 수건으로 목을 싸고 있었으며, 채 아물지 못하여 뼈가 드러나고 살은 비틀리고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다. 안창식은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부자가 다 극형을 받는다면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만약에 선택 구분이 있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옳다."

그러자 안병찬이 말했다.
"이 무슨 말씀입니까. 소자가 범한 일은 꼭 죽겠다는 뜻을 고수한 것이니 죽는 것이 당연하겠습니다. 또 윤리 면과 집안 형편의 처지에서 보더라도 만약에 부주(父主)께서 이 지경에 이르면 전 가족을 어떻게 꾸려가겠습니까. 마음을 너그럽게 하시고 너무 걱정하지 마옵소서."

이설은 이 광경을 보고 찬탄했다.
“부자가 다투어 죽고자 하니 드문 일이다. 옛 사람 공포(孔褒)[3]와 비교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부친 안창식은 1896년 음력 1월 5일 방면되어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병찬을 비롯하여 김복한, 이설, 홍건, 이상린, 송병직은 방면되지 못했다. 1월 12일 이들을 압송하라는 법부의 훈령이 도착했고, 이에 따라 1월 13일 홍주를 떠나 14일에 신례원을 거쳤고, 1월 15일 아산의 이순신 묘를 지나 진위에서 유숙했다. 16일에 수원을 거쳤고 17일에 서울에 도착해 한성재판소에 이송되었다. 이후 재판이 지연되자, 2월 8일 남로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은 이 사건을 조속히 처리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결국 서울에 온 지 한 달이 지난 2월 23일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이 의병들을 불러 공초했다. 이때 안병찬은 재판정에서 을미사변을 분통해했고 단발령 소식을 듣고 화이의 구별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충의정신과 의리 정신에 입각하여 의병을 일으켰음을 밝혔다.

이범진은 1896년 2월 25일 안병찬, 홍진, 이상린, 송병직 등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고 김복한에게는 유배형 10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날 밤 자정에 판사 김교헌(金敎獻)은 안병찬 등 홍주 의병장들을 불러 고종의 특지에 따라 전원 사면한다는 뜻을 전했다. 2월 26일 관찰사에서 면직된 이승우가 면회를 오자, 모두들 그를 냉랭하게 대했다. 이때 안병찬은 이승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감이 나하고는 오늘에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이 반반이 되겠으나, 후일의 여론은 영감이 반드시 반측무의(反側無義)한 사람이 되고 말 터이니 영감을 위하여 애석한 일이오."

안병찬은 2월 28일 옥에서 나와 사육신을 모신 노량사(露梁祠)를 지나면서 다음 시 한 수를 지었다.
노량진 사당 아래 봄 물결이 밝으니(盧梁祠下春波明)
석조가 개인 빛을 보내며 막힌 언덕에 나도다(夕照呈晴隔厓生)
사모하는 정신이 임목에 있으니(戀戀精神林木在)
증인이 가르키는 곳인고로 가는 길을 멈췄다.(證人地點故停行)

2.3. 을사의병

이후 자택으로 귀가한 후 1899년에 사망한 부친 안창식의 3년상을 치르고 향리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각지에 통문을 보내 자신의 뜻을 밝혔다.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져 있으니 비롯 천장의 상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한갓 소용없는 빈말만 할진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초모하는 동시에 정산에 거주하고 있는 전 참판 민종식을 찾아가 총수의 책임을 맡아줄 것을 청했다. 민종식은 이를 받아들여 의병장에 올랐고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팔아 5만 냥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민종식은 대장에 추되어 의진의 근거지를 정산의 천장리로 삼고 항전에 돌입했다. 1906년 3월 15일, 광수장터에서 집결한 의병대는 편제를 정했다. 이때 안병찬은 행군사마의 직을 맡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통문을 사민에 보내 의병을 일으킨 까닭을 설명했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나라가 망하고 땅을 잃은 일이 한없이 많지만 일찍이 군사는 있으되 한 번도 피를 흘리지 않고 활 한 번 쏘아보지 않고서 담소하는 사이에 온 나라를 빼앗기는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도다. 불쌍한 우리 국민들은 농사를 지으려 해도 경작할 땅이 없고 장사를 하려 해도 기술을 쓸 데가 없으니 장차 그놈들의 노예가 되고 그놈들의 고기밥 이 될 것이다. 아! 오늘날의 화를 누가 불렀는가. 진실로 그 이유를 캐보면 6, 7명의 적신들이 안에서 화를 만들어 나라를 들어다 남에게 준 것 아님이 없다. 동방의 피 끓는 남자로서, 누가 그놈들의 살을 씹어서 한을 씻고자 아니하겠는가. (중략)

우리는 조석으로 분격하지만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들 힘이 없으므로 이에 큰 소리로 외쳐 팔방의 여러 뜻있는 군자들에게 고하노라. 원컨대 눈앞의 안일에만 끌리지 말고 바싹 다가온 큰 화를 맹성하여 하나하나가 사기를 진작하고 동성상응(同聲相應)하여 단체를 만들어 충신의 갑옷을 입고 인의의 창을 잡아 먼저 적신의 머리를 베어 저자에 걸어 조금이라도 신민의 분함을 씻으며 만국의 공사와 화합하여 일차 담판하되 우리의 자주적 국권을 잃지 말자. 장차 무너질 종묘사직을 붙들며 죽게 될 백성을 구하여 후세에 할 말이 있도록 한다면 천만 다행이리라.

홍주 의병대는 홍주성의 동문밖 하고개에 진을 치고 홍주성을 공격했지만 관군의 반격으로 점령에 실패했고, 광시장터에 집결해 군제를 바로잡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공주를 공격하기로 하고 청양군 화성면 합천에 진을 쳤다. 그러나 곧 공주부 주재 일본헌병대가 홍주군 관군과 함께 역습에 나섰고, 결국 13월 17일 오전 5시 홍주 의병대는 이들의 야습을 받고 괴멸되었다. 이때 안병찬은 박창로 등 의병 2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곧바로 공주 관찰부 감옥에 갇혔고 일본인 고문관 다카하시시(高橋淺水)의 공초를 받았으며, 이어서 일본헌병대 사령부의 공초를 받았다.

그는 공주 관찰부에 갇혀 있다가 5월 5일 이남규가 직산 군수 곽찬(郭瓚)을 설득한 덕분에 석방될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민종식 의병대에 재가담해 참모(參謀)가 되었고, 동생 안병림 역시 형과 함께 가담하여 참모사(參謀士)가 되었다. 두 형제는 민종식이 5월 20일 홍주성을 장악하는 데 공을 세웠고, 안병림은 돌격장(突擊將)이 되었다. 그러나 며칠 후 일본군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공략당하자, 안병찬은 동생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공주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박창로와 함께 정산의 칠갑산 쪽으로 들어가 의병 3백명을 이끌고 항쟁했지만 1907년 12월 4일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또다시 며칠간 취조를 받은 뒤 석방되었다.

2.4. 파리장서 사건과 말년

1910년 한일병합 선포 후, 안병찬은 향리에서 은거했다. 그러다가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안병찬은 김복한과 함께 유림들의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6월 13일 '정치범처벌령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공주 형무소에 갇혔다. 그는 이곳에서 건강진단을 받았고 6월 24일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구재판소에서 7월 29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고 상소권을 포기한 뒤 자택에서 2년간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다.

그는 풀려난 뒤 세상과 인연을 끊고 향리에서 자제 교육에 힘썼다. 그러다가 1929년 6월 2일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동아일보는 1929년 6월 13일자 기사에 그의 장례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청양지사(靑陽志士)로 명성이 높은 전 의병수령 안병찬 씨는 칠십륙 세의 파란중첩한 일생을 마치고 육월 이일에 영원한 길을 떠났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어니와 씨의 장례식은 육월 육일에 거행하는데 오백여 명의 조객(弔客)과 수백여의 만장(輓章)은 청양에 처음 보는 장의였으며 홍성 유교부식회(洪城 儒敎(扶植會)의 제전(祭奠)이 있은 후 화성면 신정리 선에 안장하는데 무려 사회장(社會葬)이었다더라.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안병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또한 부친 안창식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동생 안병림 역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 참판공파-장사랑공파 27세 병(炳) 항렬. [2] 1867년( 고종 4) 식년시 생원시에 3등 41위로 입격하였다. [3] 후한 말, 장검은 환관들을 비판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자 오랜 친구인 공포를 찾아갔다. 이때 공포는 집에 없었고 동생 공융이 그를 숨겨줬다. 나중에 공융이 장검을 숨겨준 일이 발각되자 장검은 도망쳤지만, 공융과 공포는 이에 대해 조사를 받기 위해 체포되어 송치되었다. 체포될 적에 공융은 자신이 장검을 받아들였으니 공포는 이 일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공포는 장검이 찾아온 사람은 자신이니 공융과는 무관한 사건이라 주장했다. 담당 관리가 누구를 죄줄지 정하지 못하고 공융 형제의 어머니에게 아들 중 누구를 죄줄지 묻자, 어머니도 집안 일은 주인이자 어른인 자신의 책임이며 두 아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토록 서로가 자신이 책임지고 처형받겠다고 다투는 전례 없는 일 때문에, 결국 군국에서는 판결을 못 내려 끝내는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 결과 공포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라는 조서가 내려와 공포가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