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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명 | 아나스타시오(Anastasius) | ||||||||||
세속명 | 없음 | ||||||||||
별명 | 비블리오테카리우스(librarian, 사서) | ||||||||||
출생지 | 실전됨 | ||||||||||
사망지 | 로마 | ||||||||||
생몰년도 | ? ~ 869년 8월 이전 | ||||||||||
재위기간 | 85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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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네딕토 3세에 대적한 대립교황.2. 행적
오르테의 영향력 있는 주교인 아르세니우스의 조카로, 어렸을 때 동로마 제국의 수사들로부터 그리스어를 익혔으며, 그 외에도 여러 교육을 받으면서 가장 교양있는 성직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847년 또는 848년 교황 레오 4세에 의해 성 마르첼로 성당 주임사제로 임명되었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본당을 버리고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이로 인해 850년 12월 로마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파문을 선고받았고, 이후에도 복귀하지 않았기 때문에 853년 또다른 교회회의에 의해 정식으로 면직되었다.855년 7월 17일 레오 4세가 사망하자, 당시 신성 로마 제국 궁정에 있던 그는 제국군의 힘을 빌려 교황이 되려 했다. 그와 추종자들은 교황궁인 라테라노 궁전을 점거하고 새 교황 베네딕토 3세를 감금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이 아나스타시오를 교황으로 받들기를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아나스타시오는 불과 이틀 만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 루도비코 2세는 베네딕토 3세를 인정했지만 아나스타시오와 추종자들을 관대하게 대할 것을 요구했고, 베네딕토 3세는 이를 받아들여 아나스타시오를 석방하고 평신도로 복귀할 수 있게 해줬다.
그 후 아나스타시오는 방향을 바꿔 교황들을 열성적으로 옹호했다. 니콜라오 1세 치세 때 트라스테베레에 있는 성 마리아 수도원장이 되었고, 하드리아노 2세 치세 때 교회 사서로 선임되었다. 또한 861년부터 교황이 외부에 보내는 서신을 대필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황제에게 보낼 서신을 전담했다. 포티오스 분열이 한창이던 당시 교황 니콜라오 1세가 동로마 황제 미하일 3세에게 보낸 서신 중에는 황제가 라틴어를 야만적(barbarous)이고 스키타이적(Scythian)인 언어라고 비난했다는 구절이 있다. 이 일은 동로마 제국이 라틴어를 자국어로 사용하던 고대 로마와 많이 멀어졌다는 증거로 제시되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미하일 3세의 의도는 "너희는 라틴어를 야만적이고 괴상하게 변형해서 구사한다"고 비꼬려는 것이었지 라틴어 자체를 깎아내려는 게 아니었고, 아나스타시오가 의도적으로 황제가 라틴어를 무시했다고 왜곡해서 교황에게 전달했을 거라 추정한다.
868년 교황 하드리아노 2세의 아내였던[1] 스테파니아와 그녀의 딸이 아나스타시오의 친척이며 스테파니아의 장인인 엘레우테리우스에게 살해된 사건이 벌어졌다. 엘레우테리우스는 남치와 살인 혐의로 처형되었고, 아나스타시오는 납치에 공모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파문되었다. 이후 아나스타시오는 신성 로마 제국의 궁정에 피신했다가 루도비코 2세의 중재 덕분에 파문이 취소되었다.
869년 루도비코 2세의 지시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의 고위 인사 2명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특사로 파견되어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의 장남 콘스탄티노스와 루도비코 2세의 딸 에르멩가르다와의 결혼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동로마 함대 사령관이 루도비코를 '프랑크 황제'라고 부르자 루도비코가 이를 모욕으로 간주하는 바람에 어그러졌다. 루도비코는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칭호로 불러주기를 원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이 시기에 루도비코 2세가 바실리오스 1세에게 보낸 편지가 유명하다. 영어 번역 바실리우스 1세와 '로마인'의 정의에 대해 보이는 극명한 관점 차이가 돋보이며,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은 그가 죽은 이후로도 천 년 가까이 남아 유럽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학자들은 루도비코 2세가 이 편지를 직접 쓴 게 아니라 아나스타시오가 집필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아나스타시오는 교황의 외교 서신을 집필하는 것 외에도 그리스어 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키포로스 1세, 요르고스 싱켈로스, 참회자 테오파네스의 동로마 제국 연대기에서 발췌한 <크로노그라피아 트리페르티타(Chronographia tripertita)와 기독교의 역사를 담은 <콜렉타네아>를 발간했으며, 20명의 성인들의 행적을 담은 전기, 제2차 니케아 공의회와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관한 '행전' 및 기타 저작물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전 총대주교 포티오스와 서신으로 교류하면서 그가 필리오케를 받아들이게 하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869년 8월 아나니의 자카리아스가 로마 교회 기록 보관소의 수장으로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그는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당시에는 동방 교회와 마찬가지로 서방 교회에서도 기혼남의 사제 서품이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았다. 1139년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야 기혼남의 사제 서품을 불허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