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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1 15:46:57

니콜라오 5세(대립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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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인노첸시오 3세(Nicholas V)
세속명 피에트로 라이날두치(Pietro Rainalducci)
출생지 라치오 주 리에티 지방 코르바로
사망지 아비뇽
생몰년도 ? ~ 1333년 10월 16일
재위기간 1328년 5월 12일 ~ 1330년 7월 25일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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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요한 22세에 대적한 대립교황.

2. 행적

라치오 주 리에티 지방의 코르바로에서 출생했다. 1310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설교자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1327년 4월 9일, 교황 요한 22세는 청빈을 극도로 강조하는 프란치스코회를 "폭군, 이단의 선동자, 교회의 품에 다시 불타오르는 뱀"이라고 규탄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프란치스코회는 마침 요한 22세와 갈등을 벌이고 있던 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4세와 손잡았다. 1328년 5월 12일 로마에 입성한 루트비히 4세는 피에트로를 교황 니콜라오 5세로 옹립하고 요한 22세를 파문에 처하도록 했다.

니콜라오 5세는 초기엔 오컴의 윌리엄 등 해외의 여러 유명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4개월 후 로마 시민들이 요한 22세를 지지하며 봉기를 일으키자, 루트비히 4세와 함께 로마를 탈출해 비테르보로 철수했다. 1328년 12월 요한 22세의 교황 특사 오르시니 추기경이 비테르보에 대한 원정을 개시하자, 니콜라오 5세는 그로세토를 거쳐 피사로 이동한 뒤 제국군의 보호를 받았다. 1329년 2월 19일 피사 두오모 성당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교황청 예복을 입은 밀짚 인형을 요한 22세로 간주하고 비난을 퍼부은 뒤 군인들에게 넘기는 의식을 거행했다.

1329년 4월 11일 루트비히 4세가 독일의 정세가 급박해지자 그를 버리고 독일로 철수했다. 여기에 프란치스코회마저 요한 22세와의 화해를 위해 그를 저버렸다. 그는 도로나티코의 보니파시오 백작의 보호 아래 부르가로 성으로 망명했다. 그러다 피렌체군이 위협해오자 다시 피사로 피신했다. 이후 요한 22세와 협상한 끝에 1330년 8월 25일 요한 22세가 있던 아비뇽으로 찾아가 교황 직위를 포기하고 요한 22세에게 복종했다. 그 후 소액의 연금과 사면을 받았지만 아비뇽 교황궁에 갇혀 지내다가 1333년 10월 16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