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신철회(申哲會) |
이명 | 신준남(申峻南) |
자 / 호 | 열경(說卿) / 도암(島菴) |
본관 | 평산 신씨[1] |
출생 | 1864년 11월 22일 |
경상도
문경현 가현면 도내동 (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민지리 섬안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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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2년 1월 15일 |
경상북도 문경군 | |
묘소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민지리 남밭골마을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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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신태식은 1864년 11월 22일 경상도 문경현 가현면 도내동(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민지리 섬안마을)에서 아버지 신명하(申命夏, 1848 ~ 1885)[2]와 어머니 흥양 이씨 이만교(李萬敎)의 넷째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가은면 와야리(현 가은읍 원북리 와야리마을)로 이주하였다. 그는 평소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이 뛰어났다고 한다.1895년 초 의병을 일으켜 당시 밀정 혐의가 있던 가은면의 김골패(金骨牌)와 상주목(현 상주시)에 사는 강용이(姜龍伊)를 상주목 가서면 농암리(현 문경시 농암면) 농암시장에서 사살하였다.
그 뒤 1900년 10월 내부 주사(內部主事)에 임명되었고, 1901년 5월 사직했다. 1901년 11월 산릉도감 감조관(山陵都監監造官)에 임명되었다가 한 달 뒤인 12월 병으로 사직했다.
1902년 7월 인천감리서 주사(仁川監理署主事)에 임명되었으나, 이틀 만에 사직하였다. 이듬해인 1903년 2월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또한 일주일이 채 안 되어 사직하였다.
1907년 8월 3일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충청북도 제천군, 강원도 울진군, 평해군, 양양군, 영월군, 산동, 원주군, 홍천군, 춘천군, 철원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그는 종종 이강년의 의진과 합세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며, 나중에 이강년의 부대와 연합한 뒤 소모후군장(召募後軍將)의 소임을 담당하였다. 이에 대해 일제는 그의 본가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보복했다. 1908년 9월, 신태식은 홍주 전투에서 패한 뒤 횡성으로 퇴각할 때 총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양주 산안 전투에 참전하여 왜장 죠사부로(長三郞)를 사로잡아 총살했다.
그러나 1908년 12월 경기도 영평군 이동 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1909년 2월 16일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상고하여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18년 1월 19일 경성형무소에서 출옥한 그는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가세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도 방면에서 조선 독립 후원 의용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김찬규(金燦圭)·이응수(李應洙)·김돈희(金敦熙)·김동진(金東鎭) 등 경상북도 지방의 지사들을 규합하여 1920년 가을에 서로군정서와 연락해 가면서 국내에서 독립군 활동에 호응·협조를 목적으로 하는 의용단을 조직하고 김찬규가 경상남도 단장에, 신태식이 경상북도 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일본 경찰에 기밀이 탐지되었다.
이로 인해 또다시 체포된 그는 1922년 12월 28일 대구감옥에 수감되었으며, 1923년 9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 혐의로 대구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위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
1924년 6월 5일 출옥한 뒤에도 항일운동을 지속하여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14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26년 2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하기도 했다.
그 뒤 1932년 1월 15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신태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