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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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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사법부장
한문 史良
한국식 독음 사양
영문 Shi Liang
존초(存初)
출생 1900년 3월 27일 청나라 장쑤성 창저우
사망 1985년 9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상하이 법과대학 졸업
직업 변호사, 정치가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여성 변호사2.3. 항일투쟁 운동2.4. 민주연맹 당원2.5.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3. 개인사4. 참고 문헌

1. 개요

여중호걸(女中豪杰)이다.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의 변호사, 정치가, 사회운동가. 1930년대 중국 상하이의 유명한 여성 변호사였으며 구국회에 참여해 당국에 항일투쟁과 국공합작을 호소했다가 7군자 체포 사건 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가 중일전쟁이 터진 직후 풀려났다. 중일전쟁 시기엔 국민들의 항일투쟁을 독려했으며 국공내전 시기엔 국민당의 독재를 비판하고 공산당과 협력해 사회주의 내 민주제도 도입을 추구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민주연맹 제2,3기 중앙부주석, 제5, 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사법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여생해방운동을 전개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스량은 1900년 3월 27일 장쑤성 창저우의 한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 생활 형편이 곤궁했지만 아버지 스강(史刚)으로부터 글을 배웠고 서구 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학식을 쌓다가 14살 때 무진현 여자사범학교부속 독서반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1919년, 그녀는 5.4 운동에 참가해 창저우 여사동창회 회장을 지냈고 창저우 무진 여학교 부회장을 맡았으며 학계 연맹에 자주 출석했다.

1922년, 스량은 무진 여학교를 졸업한 후 친구가 학비를 대신 내준 덕분에 상하이 사법학원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했다. 1925년 5.30 운동 때, 그녀는 "제국주의 반대", "매국노 타도"를 외치며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고 하루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설치(雪耻)> 잡지를 창간해 민족 독립을 선전하고 열강의 침략에 반대했다.

그러던 1926년, 그녀는 학원 교장이 학비를 엉뚱한 곳에 남용하고 정작 학생들의 생활 개선엔 신경쓰지 않는 것에 반발해 학생 100명과 함께 호교단을 구성하고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때 사법계의 저명인사 동강(董康)이 상하이 법과대학을 설립하자, 스량은 호교단 멤버들과 함께 사법학원을 떠나 상하이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그녀는 동강의 수제자가 되었다.

2.2. 여성 변호사

1927년, 상하이 법과대학을 졸업한 스량은 변호사가 되려고 했지만 국가가 인정하지 않은 사립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증을 얻지 못하고 난징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정치공작원 양성소에 근무했다. 그녀는 국민당 간부들이 범인을 비인도적으로 대우하고 고문을 서슴치 않는 것을 목격했고, 얼마 후엔 그녀의 아버지 스강이 동강을 통해 강도 높은 심문을 받고 있던 차이위안폐이(蔡元培)를 구출했다. 1930년, 스량은 칭다오 국민당 특별시당부 훈정과 주임을 거쳤고 반년 후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같은 해 상하이 법과대학이 교육부의 허가를 받고 정식학교가 되면서, 스량은 번호사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었다.

스량은 1931년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고 상하이 변호사조합 집행위원이 되었다. 또한 공산당이 상하이에 설치한 '혁명인도상제총회'에 가입하고 이 총회의 소속 변호사로 재직하며 덩중샤(邓中夏), 임백과(任白戈), 웅근정(熊瑾玎), 방지달(方知达) 등 상하이 당국에게 체포된 공산당원들의 변호를 담당했다. 이 시기 그녀는 중국에 보기드문 여성 변호인으로서 여러 재판에 참여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2.3. 항일투쟁 운동

1935년 8월 1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항일구국을 위해 전체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전국이 단결하여 내전을 중지하고 단결해 일본에 대항할 것을 호소했다. 이후 상하이에선 항일 구국운동이 왕성하게 발전했다. 스량은 이 분위기에 편승해 상하이 여성계 구국회를 발족하고 이사로 선출되었고 상하이 문화계 구국회에도 참여해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6년 5월 3일, 스량은 전국각계구국연합회 발족식에 참석해 쑹칭링, 선쥔루 등 40여인과 함께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6년 11월 8일, 상하이의 일본인 방적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항의 파업을 실시했다. 이에 스량은 장나이치, 선쥔루, 왕자오스(王造時) 등 구국회 회원 700여 인과 함께 상하이 정안사로에 위치한 교회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여 국민정부에게 초공작전을 중단하고 공산당과 힘을 합쳐 일제에 맞설 것을 촉구했다. 이에 국민정부 당국은 구국회 지도자들을 체포하기로 결정했고, 스량은 11월 23일 장나이치, 선쥔루, 왕자오스, 쩌우타오펀(鄒韜奮), 리궁푸(李公朴), 사첸리(沙千里)와 함께 체포되었다. 스량은 곧 석방되었으나 다른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7군자 석방시위'에 참석했고 법정에서 동료들을 변호했다. 결국 국민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이들을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스량은 중일전쟁 기간 동안 국민참정회 참정원을 지냈다. 그녀는 유일한 여성 참정원으로서 국민정부에 민주제도를 도입하고 여성의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특히 헌법에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 보장을 명문화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며, 국민대회에 여성대표 정원을 적어도 15%를 채우도록 명시할 것을 요구헀다.
"이것은 이전에 아무도 언급하지 않은 문제다. 반봉건, 반식민시대에서 오래된 사회에 처한 여성을 위해 그들의 입장에 서서 싸우는 것은 그야말로 전례없는 일이다."

또한 그녀는 여성근로자들에게 도시에서 촌락으로 내려가 시골 여성들에게 정치참여에 관한 홍보 교육을 실시하라고 권고했으며, 전시 아동보육회의 상무이사도 맡았으며, 설계위원회 주임을 겸했다. 보육회는 전국에 40여 개의 보육원을 설치하고 2만여 명의 전쟁고아들을 수용했다. 그녀는 또 중국여성연합회의 상무이사를 맡아 각 계층의 애국여성을 단결시키고 민주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2.4. 민주연맹 당원

1941년 3월 19일, 스량은 국민참정회의 항일조직인 구국회, 중화민족해방 행동위원회, 중화직업교육사, 농촌 건설파, 국가사회당과 중국 총년당이 통합한 조직 준비 작업에 참여했다. 그후 1942년, 그녀는 구국회 동료들과 함께 중국 민주정단 동맹에 가입했다. 1944년 9월 19일, 충칭에서 전국 민주주의 연맹총회가 개최되었다. 스량은 이 총회에 참석해 중국민주정단 동맹을 개인 참여에 기반한 중국 민주연맹으로 재구성고 무당파인 장란(张澜)이 주석을 맡는 것에 동의했다. 1945년 9월, 주국 민주연맹 충칭시 위원회가 성립되었고, 스량은 충칭시 위원 겸 조직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스량은 1945년 11월 중국 민주연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민주연맹 중앙위원, 민주연맹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중일전쟁이 마무리된 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충칭에 가서 장제스와 협상해 각 당이 참가하는 정치협상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헀다. 스량은 중국 민주동맹 대표단의 고문을 맡아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는 한편 중국 공산당과 긴밀히 협력해 민주제도 실현, 국민당 독재 반대, 내전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정치협상회의 이후, 스량은 상하이로 돌아와 변호사 업무를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민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47년 10월, 국민정부는 민주연맹을 불법단체로 간주하고 민주연맹 인사들에 대한 체포령을 발표했다. 이에 민주연맹 지도자들은 홍콩으로 피해 1948년 1월 홍콩에서 열린 제3차 3중전회에서 중국 공산당과 긴밀히 협력해 장제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이때 스량은 상하이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첸리(沙千里)에게 자신 대신 홍콩에 가서 출석하도록 부탁했다.

이후 그녀는 민주연맹 본부의 결정에 따라 상하이에 민주연맹 화둥 집행부를 창설하고 화둥 집행부 주임을 맡아 민주연맹 지하공작 활동에 종사하며 민주 선전활동과 대중연계 작업 등 여러 분야에서 일했다. 인민해방군이 상하이를 공략하기 직전, 국민당은 그녀의 집을 수색하고 그녀를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인민해방군과 합류했다.

1949년 6월, 스량은 베이징으로 가서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준비 작업에 참가했다. 당시 저우언라이는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 명단의 선정과 관련해 스량에게 의견을 구했고 "이전의 정치협상회의 때는 내가 찬석하지 않았고 여성 대표가 거의 없었으니 이번 정치협상회의에선 여성대표가 눈에 띄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후 그녀는 9월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민주연맹 대표로 참석해 제1회 전국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0월 1일, 그녀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식에 참석했다.

2.5.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스량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사법장관과 정무원 정치법률위원회 위원을 역임헀고 전국부녀자연합 집행위원 부주석, 전국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1953년부터 민주연맹 중앙 부주석을 맡았다. 스량은 새로운 변호사제도와 공증제도 건립을 요구했으며 인민배심원 제도의 수립을 제안했다.

스량의 가장 큰 업적은 중화인민공화국 혼인법 제정이다. 1948년 토지개혁을 위한 시찰단에 참가했던 그녀는 여러 촌락에서 부녀자가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모든 과부들을 홀아비로 지내는 가난한 농부에게 강제로 시집보내는 등 여성을 형편없이 대우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량은 부녀자가 해방되지 못하면 민족 전체가 해방됐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여성 권익의 실현을 반드시 법률에 보장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9년 3월 23일, 트럭 100대와 지프 20대가 하북 서백파농촌에서 베이징으로 향했다. 이 차량들은 스량이 특별히 준비한 자료를 담고 있었다. 스량은 정치협상회의에서 중국 여성들의 암울한 실태를 낱낱이 고발하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 제정을 촉구했다. 이에 중화인민공화국은 1950년 5월 1일 혼인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법이었다.

혼인법에는 강압이나 남존여비 등 봉건주의 혼인제도를 폐지하고 개인의 의사에 따른 혼인만 보장했으며 일부일처제를 정당한 가정제도로 간주했다. 또한 정부에서 발급한 혼인증은 여성의 혼인 자유에 법률적인 권리를 부여했다. 이 혼인법의 일부인 일부일처제도는 입법 당시 스량이 가장 강력히 주장한 제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걸로 만족하지 않고 부녀자연합회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결혼법 조항이 사실로 되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 지금 어떤 여성 청년은 혼인의 자유를 요구한다. 부녀연합은 부녀자들의 친정이며, 우리 여성간부들은 많은 여성들을 뒷받침해야 하며, 당당해야 하며, 그들이 봉건세력과 투쟁하는 것을 지지해야 한다."

스량은 혼인법 제정 후 각급 인민정부, 인민법원 등 관계 기관에 혼인법을 관철할 것을 촉구했고 혼인법의 집행 상황을 직접 촌락으로 가서 확인했다. 또한 '결혼법을 성실하게 집행하자'는 글을 써서 각지에 배포했으며 부녀자 인권 침해자에 대한 엄벌을 요구했고 여성에게 적용되는 재판제도를 개선하고 혼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불법행위를 단호하게 단속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에 힘입어, 일부 지방법원은 혼인부를 설립해 부녀자의 혼인 사건을 전문적으로 처리했고 여성이 재판장을 맡았다.

또한, 스량은 각 계층의 부녀자들과의 연계와 단결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 사회주의 건설에 공동으로 힘을 쏟았다.그녀는 문교계, 과학계 여성지식인들을 배려하여 늘 그들의 의견과 요구를 반영하고, 상공계 여성인 및 가족들과 무릎을 맞대고 당의 노선과 방침, 정책을 배우도록 격려하며, 하루빨리 사회 정치활동과 노동에 참가하기를 바랬다. 그리고그녀는 아시아-아프리카 여성회의에 중국 여성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고 국제민주여성연합회 이사회에 참석해 국제 여성단체와의 연계활동을 전개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인도, 스리랑카 등을 방문했으며 중국을 방문한 외국 여성 대표단과 다른 외빈들을 여러 차례 접대했다.그녀는 외국 친구에게 신중국 여성의 일과 생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성취를 소개하고, 중국 여성의 세계평화 수호와 침략전쟁 반대 의사를 소개하며, 여성과 아동의 업무 경험을 교류했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이 벌어지자, 스량은 한때 깊은 정을 나눴던 뤄룽지, 장보쥔을 비롯한 민주연맹 내 '우파' 인사들을 고발했으며 법무부가 폐지되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어 우파로 몰린 인사들에 대한 재판을 주관했다. 장보쥔의 딸 장이허(章怡和)는 '나의 중국 현대사'에서 스량이 아버지와 함께 민주운동을 이끌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민주제도 도입에 노력하는 등 뜻을 함께했다가 돌연 아버지에게 '대우파'라는 누명을 씌우고 자신의 동료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며 자신은 그녀 때문에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화대혁명 시기, 스량은 분파를 조장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재산이 몰수당하고 사상검증과 노동개조 참여를 강요받았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보호해줬기 때문에, 그녀는 더 큰 재난을 모면했다.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후인 1979년 10월, 그녀는 민주연맹 제4차전국대표대회에서 건강 악화를 이유로 주석직에서 물러났다.

1985년 9월 6일, 스량은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향년 85세.

3. 개인사

스량의 부친 스강은 9명의 아이가 있는 가난한 서당 선생으로 그녀에게 서구 사상을 전했다.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스량은 별다른 사회활동 없이 집안에 틀어박혀서 남편에게 복종하는 전통적인 여자가 되기 싫어서 상하이에 가서 법률을 공부했다. 이후 스량은 '자유 여인'으로서 여러 남성들과 정을 나누었다. 중일전쟁 시기, 스량은 그녀처럼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 뤄룽지와 깊은 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은 충칭에서 공공연한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끝난 후 뤄룽지는 스량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펑더화이의 처형 푸시슈(浦熙修)에게 관심을 돌렸다.

스량은 뒤이어 육전동(陆殿栋)과 사귀었다. 육전동은 장쑤성 오강현출신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에 유학하여 법률을 깊이 연구하고 국제법을 전공했다. 또한 상하이에서 프랑스 조계지인 순포방에서 활동하며 유창한 프랑스어와 영어를 구사했다. 두 사람은 정치범들을 변호하는 업무를 맡으면서 식사를 함께하고 영화를 관람하고 양복을 같이 입는 등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49년 초 국민당이 스량을 체포하려 하자, 스량은 육전동의 집에 숨었다가 나중에 그를 따라 경찰에 자수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인민해방군이 상하이에 도착하면서, 두 사람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그들은 평생 함께 했지만 자식은 없었고 전쟁고아였던 스샤오훙(史小红)을 입양했다.

4.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