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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
한문 | 王造时 | |
한국식 독음 | 왕조시 | |
영문 | Wang Zaoshi | |
본명 | 왕웅생(王雄生) | |
출생 | 1903년 9월 2일 청나라 장시성 지안시 안복현 | |
사망 | 1971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학력 | 미국 위스콘신대학 정치학과 졸업 | |
직업 | 변호사, 교수, 정치가 | |
종교 | 무신론 |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변호사, 교수, 정치인. 청년 시절 미국 위스콘신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변호사로서 활동했다. 1930년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자 구국회에 가입해 국민정부에게 공산당과 손을 잡고 항일투쟁 정책을 시행하라고 압박했다가 7군자 체포 사건 때 체포되어 8개월간 수감되었다. 중일전쟁 시기 항일 구국운동에 가담했고 국공내전 시기엔 국민당의 독재에 맞섰고 중국 공산당의 민주집중제에 호응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푸단대 역사학과 교수를 맡았으나 반우파 투쟁 때 우파로 간주되어 탄압받았고 문화대혁명 때 두 아들과 작은 딸을 잃고 비참하게 사망했다.2. 생애
2.1. 초기 경력
왕자오스는 1903년 9월2일 장시성 지안시 안복현에서 죽목 장사를 하는 상인의 자제로 태어났다. 1917년 베이징 칭화대학 중등과에 다니던 그는 1919년 5.4 운동에 참가했다가 2차례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이후 칭화학생회 평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1925년 8월 칭화대를 졸업한 그는 미국에 유학가서 위스콘신 대학에 들어가 정치학을 전공했고 1929년 6월 정치학 학위를 받은 뒤 8월 영국 런던경제대학 연구원으로 부임해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주창자 해럴드 라스키 교수를 스승으로 삼았다.1930년, 왕자오스는 소련을 거쳐 중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같은 해 상하이 광화대학교 교수 및 문학부 학자 겸 정치학과 이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그는 <주장과 비판> 간행물을 창간하고 뒤이어 <자유포럼> 지를 창간했다. 또한 상하이대학교수 항일 구국회에 참여했고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제19 국방군을 적극 지원했다. 이후 그는 쑹칭링, 루쉰, 양싱포(杨杏佛) 등과 함께 국민권보장동맹을 결성하고 동맹의 홍보위원, 집행위원을 맡아 국민당 특무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사회운동가와 학생들을 구출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1933년 11월, 왕자오스는 '민변을 위한 충고'이라는 선언을 발표해 복건사변을 일으킨 일당을 강력히 비판하며 장제스에게 항일 투지를 보여줄 것을 당부했다. 또한 그는 1935년 말 마상백(马相伯), 선쥔루 등과 함께 상하이 문화계 구국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을 맡았다.
2.2. 구국회의 7군자
1936년, 왕자오스는 상하이 문화계 구국연합회에서 홍보부장을 맡아 상하이 문화계 구국회보와 <구국정보> 편집을 도맡아 내전의 중지를 촉구하고 공산당과 힘을 합쳐 항일에 전념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1936년 전국 각계 구국연합회에 가담해 집행위원,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던 1936년 11월 23일, 그는 국민당에게 전격 체포되었다. 이에 각지에서 그를 비롯한 '7군자'를 석방하라는 시위가 빗발쳤고 급기야 장쉐량이 서안 사건을 일으킨 후 7군자 석방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후 왕자오스는 동료들과 함께 제판에 넘겨졌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37년 7월 31일에 석방되었다.2.3.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
1938년 3월, 왕자오스는 장시성 정치강습원 교육실장 겸 교수로 재직하며 중일전쟁 시기 동안 장시성 간부훈련을 도맡았다. 또한 9월에 지안시에서 '전방일보'를 창간하고 국민참정회 참정원으로 초빙되었다. 그리고 1939년 가을엔 안복중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으로 부임해 안복현의 학생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중일전쟁이 마무리된 후, 왕자오스는 상하이에 자유출판사를 설립하는 동시에 개인 법률 고문을 겸했다. 그러던 1948년 12월, 장제스의 명을 받든 국민당 특무가 추안핑이 창간한 상하이 '관찰' 잡지사를 폐쇄하고 '관찰'지 임원들을 체포했다. 이에 왕자오스가 직접 나서서 당국에 이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당국은 이듬해 2월 관찰 임원들을 석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왕자오스는 민주운동을 전개해 사회주의 국가 내 민주제도 수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51년부터 푸단대 역사학과 교수 및 세계사 교연실 주임을 맡았다. 그러나 몇년 후, 그는 가혹한 운명에 직면하게 된다.
2.4. 비참한 말년
때는 1941년 4월 13일,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만주국의 영토를 존중하겠다고 발표했다. 전국각계 항일구국연합회는 소일 불가침 조약의 내용을 접하고 충칭에서 간담회를 열어 소련이 항일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국을 외면하고 적과 화해한 잘못된 행위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이후 왕자오스는 모두의 뜻에 따라 <스탈린 원수께 드리는 편지>를 작성했다. 이 편지는 이틀날 스량의 집에서 검토된 후 수정 작업을 거쳐 선쥔루, 장나이치, 리궁푸, 샤첸리(沙千里), 호자영(胡子婴), 장선푸(张申府), 류칭양(刘清扬), 스량 등 9명의 서명을 받은 뒤 소련에 보내졌다.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중소 우호관계가 발전하면서, 이 공개 서한이 문제시되었다. 소련의 국영신문 프라우다는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은 일제와 아돌프 히틀러를 동시에 맞서는 건 힘드니 히틀러에 집중하기 위해 일제와 화친한 스탈린의 현명한 책략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프라우다는 왕자오스 등이 보낸 편지는 소련과 스탈린을 반대하는 반동세력의 책동이라고 비난했다. 이렇듯 소련에서 꼬투리를 잡자, 왕자오스는 1957년 3월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정치협상회의 2기 3차회의에서 자신은 결코 소련과 스탈린을 비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중앙통전부는 조사에 착수했고, 왕자오스와 공동으로 편지를 작성했던 이들은 "그 편지가 무슨 잘못이 있더라도 모두가 책임을 져야지, 왕자오스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중공은 이 일로 소련과 갈등을 빛으면 좋을 게 없다고 여겼다. 때문에 중앙통전부는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저우언라이는 일찍이 왕자오스의 '반소' 문제에 대해 들은 바는 있었지만 내막을 알지 못했는데 중앙통전부로부터 해당 사실에 관한 보고를 접하자 바로 왕자오스를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1957년 3월 27일 오후, 왕자오스는 전국 정치협상회의를 마무리한 뒤 저우언라이로부터 초대를 받고 중난하이 서화청에 들어가 저우언라이의 환영을 받았다. 저우언라이는 왕자오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후 그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저우언라이는 계속 왕자오스와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우언라이는 그가 이 일에 대해 전혀 잘못이 없다고 말했고, 있어서는 안 될 책임을 한 사람에게 지우는 것은, 지극히 불공정한 것임을 강조했다. 또 정치협상회의가 끝난 후에는 그를 베이징으로 옮길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왕자오스는 눈물을 머금으며 감사를 표하고 저우언라이와 이별했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배려가 어지간히 고마웠는지, 정치협상회의가 끝나고 상하이로 돌아갈 때 다음과 같은 감사 편지를 보냈다.
"나라를 위해 한없이 진지하게 이야기주길 바라는 당신의 간절한 마음과 진심어린 부탁에 참으로 감명받았습니다."
몇달 후, 왕자오스는 마오쩌둥의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 방침과 중국 공산당의 정풍운동에 호응하여 공산당에 대해 몇가지 비판을 제기했다. 먼저, 그는 1957년 3월 20일 중국 인민정치협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의 민주주의 생활은 점점 더 풍요롭고 원만해져야 한다. 현재 당내 각급 간부들에게는 많은 권리가 있지만 당 외부 인사들에게는 거의 없다. 당 외부인사들은
위징의 정신을 갖추고 당의 모든 문제에 가감히 비판하여 주관주의와 관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그해 6월, 왕자오스는 상하이 선전공작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대중과 간부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좋은 일을 하게 함으로써 정풍운동의 초점을 풀뿌리 민주주의 수준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해 6월, 공산당은 약속을 뒤집고 반우파 투쟁을 단행했다. 그가 이전에 했던 발언은 당에 대한 공격과 민중 선동으로 간주되었고 사방에서 그를 반동분자로 몰아붙이는 목소리가 일었다. 여기에 왕자오스가 스탈린에게 보냈던 편지가 다시 문제시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의 원조 국가인 소련을 반대한 '대우파'로 낙인찍혔고 사회적으로 철저히 매장되었다.
왕자오스는 처음엔 자신이 우파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나는 반당, 반사회주의를 전개할 마음이 없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사방에서 감당하기 힘든 공격이 몰아치는데다 믿었던 동지 스량이 "나 또한 내심 왕자오스의 편지가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며 그를 비판하면서, 그는 궁지에 몰렸다. 결국 왕자오스는 자신이 우파라고 인정하고 사상검증 후 자아비판서를 제출한 뒤 1957년 말 농촌으로 가서 노동 개조를 받았다.
여기에 가정문제까지 겹쳤다. 왕자오스는 어렸을 때 부모의 권고로 주투방(朱透芳)과 약혼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당시 중국의 주요 정치인들은 대개 부모의 권고로 결혼한 아내를 내팽개치고 새 아내와 장가들었지만, 그는 예외적으로 주투방을 깊이 사랑했고 미국으로 유학할 때 함께 데리고 가서 교육받게 해주고 1928년 가을에 결혼했다. 1956년 3월 주투방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왕자오스는 극도로 슬퍼하여 오랫동안 무덤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두 아들은 장기간 병을 앓았다. 장남은 조현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고 차남은 원래 베이징 대학에서 공부하여 성적이 우수했으나 아버지가 대우파로 간주되자 자신 또한 연좌되어 대중의 비난을 받고 정신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두 딸의 운명도 비참했다. 장녀는 대학을 졸업한 후 사법부에서 근무하다가 아버지의 일로 그녀 또한 끌려가 온갖 비난을 받고 정신병에 걸렸다. 또한 차녀 왕해용(王海容)은 푸단대학 물리학과에서 공부하였고 아버지를 매우 존경해 아버지가 대우파일 리가 없다고 공언하다가 그 자신도 우파가 되어 공장에 보내져 노동개조를 받게 되었다. 그후 그녀는 아버지의 악화되는 건강을 걱정하다가 우울증에 걸렸고 서른도 안되었을 때 불치병에 걸렸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가족들마저 병에 걸린 암울한 상황에 놓여 있던 그에게 또다시 불행이 닥쳤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지 얼마 안된 어느 날, 홍위병들이 그의 집에 쳐들어가 재산을 몰수하고 "장기간 투쟁"을 벌이기 위해 아예 집에 눌러 앉았다. 그의 두번째 부인은 집에서 쫓겨나 공장에서 감시를 받으며 노동에 전념해야 했고, 막내 딸은 머리가 면도된 채 거리로 끌려가 조리돌림을 당했다. 3개월 후, 홍위병들은 왕자오스를 비판 투쟁대회에 끌고 가서 그에게 반혁명 활동의 강령과 계획, 조직을 물었다. 이때 그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고, 결국 수갑을 찬 채 체포되어 상하이 제1교도소로 보내졌다.
왕자오스가 교도소에 수감된 후, 그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받던 월급이 정지되었기 때문에 병원비를 낼 수 없어 정신병원에서 쫓겨났다. 두 아들이 자주 발광하여 사람을 때리는 등 사고를 일으키자, 계모는 할 수 없이 그들을 침대에 눕히고 두 발을 끈으로 묶었다. 돈도 없고 약도 없고 식량도 없었기 때문에, 두 아들은 제대로 된 치료와 영양 섭취를 받지 못하고 3개월 도 안되어 잇따라 병사했다.
왕자오스는 5년간 재판을 받지 못하고 형 선고도 받지 못한 채 감옥에 갇혀 지냈다. 그는 오랜 지병이었던 간염이 재발해 고통을 호소하면서 간수들에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호소했으나 끝내 묵살당했다. 결국 1971년 9월 어느 날, 그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향년 68세.
왕자오스가 죽은 지 몇달 후, 그가 애지중지하던 막내딸 왕해용은 우파라는 낙인을 벗지 못한 채 병사했다. 그녀는 죽기 직전 눈물을 흘리며 계모와 남편에게 "내 소원은 오직 하나다. 아빠와 오빠, 남동생과 함께 묻어달라."라고 당부했다. 그후 1980년 5월, 중국 공산당은 왕자오스가 우파로 잘못 지정되었음을 인정하고 그를 복권시키기로 결정했다.
3. 작품
- <왕자오스 문집>
- <세계 근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