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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4 11:28:52

스기노 카즈오

스기노 카즈오(杉野計雄 : 1921~1999)
1. 복무 기록2. 태생과 입대 배경3. 중일 전쟁4. 첫 실전이 미드웨이 해전5. 후방에서 교관 생활6. 중상과 가미카제 임무7. 제대 이후의 삶

1. 복무 기록

비행시간 : 1994시간
출격 횟수 : 495회
교전 횟수 : 100회 이상
격추수 : 단독 격추 32기
최종 계급 : 비행병조장(飛行兵曹長)

2. 태생과 입대 배경

1921년 야마구치현 오노다시에서 태어난 스기노 카즈오(杉野計雄)는 일곱살이 되던 1927년에 집에서 가까운 호수에 수상기가 착수해 정비하는 모습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광경을 본 어린 소년 카즈오는 비행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카즈오 소년이 10살이 되던 1930년에는 집 근처에 비행기 몇대가 비상착륙하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이때 어린 나이였지만 구덩이에 빠진 기체를 밀고 당기며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직접 만지는 경험을 했고, 비로소 조종사가 될 꿈을 품게 된다. 17살이 된 1938년에 실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시멘트 회사에 입사했지만 이듬해인 1939년에 일본 해군에 기관병으로 지원하여 쿠레 해병단을 통해 입대했다. 그러나 해병단에서는 항해와 정비에 필요한 실무 과정은 무엇 하나 가르치지 않는 대신 교관들의 주입식 교육과 선임병들의 구타와 얼차려만 이어졌고, 이런 현실에 실망한 그는 어렸을 때 바라던 대로 조종사가 될 길을 찾게 된다.

3. 중일 전쟁

1940년 2월에 막 취역한 카게로급 구축함 3번함인 쿠로시오(黒潮)에 말단 수병으로 승선한 그는 마침 일본이 한참 치르고 있던 중일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스기노 수병은 1941년에 해군 비행병을 모집하는 예과연습생으로 선발되었고, 비로소 비행 교육을 받게 된다. 훗날 해군 유수의 에이스로 발돋움하게 되는 스기타 쇼이치와 함께 조종 훈련을 받은 그는 1942년 오이타 해군항공대에서 전투조종사 과정을 수료했다. 6월에 제6항공함대의 함상전투기 조종사로서 항공모함 아카기에 올라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다.

4. 첫 실전이 미드웨이 해전

스기노 카즈오는 미 해군 돈틀리스 폭격기의 일격에 맞고 불타는 아카기에서 겨우 빠져나와 부근의 아군 구축함에 의해 구조되었는데 일본으로 돌아온 후로도 해군 수뇌부가 내린 미드웨이 해전의 함구령으로 인하여 키사라즈 기지에 며칠간 감금되기도 했다. 7월에 상선을 개장한 항모 다이요의 전투기 부대에 임시로 배속된 스기노는 10월에는 오무라 해군항공대로 전속했다가 11월에 사세보 해군항공대로 이동했다.

1943년 4월에 항모 쇼카쿠의 전투조종사로 승함한 스기노는 8월에 트럭 제도로 전개하여 10월 1일에 라바울로 이동했다. 스기노 카즈오가 첫 격추를 경험한 것은 1943년 11월 2일로, 뉴브리튼 섬 상공을 날며 폭탄을 떨구던 미군의 쌍발 폭격기 B-25 미첼을 요격해 추락시킨 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거듭해서 B-26 P-38을 격추하는 전과를 거두면서 마셜 제도로 이동했다. 12월에 새로 편제된 항모 즈이카쿠의 전투기 승무원으로 라바울에 다시 파견된 스기노는 제253항공대에 소속되었다.

남방 전선에서 보급이 끊기면서 부대의 식량 사정이 나빠지자, 스기노 군조는 떨어진 부하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어디선가 식재료들을 구해와 제로 전투기 프로펠러 스피너를 냄비로 삼아 전골을 끓여 먹이기도 했다. 휘하 병사들에게 스기상[1]이라고 불리며 존경받던 그에게는 또다른 비결이 있었는데,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부하를 구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일본군에 만연해 있던 때리면 즉효라는 사고방식과 악습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5. 후방에서 교관 생활

1944년 2월에 일본으로 돌아와 오이타 해군항공대에서 비행 교관이 된 스기노 카즈오는 4월에는 츠쿠바로 이동해 수도 도쿄를 방어하기 위한 요격 부대원으로 근무했다. 8월에 대만 해협 항공전, 연이어 필리핀 항공전에 참가한 스기타는 11월에 필리핀 방면 전투기대 선임 조종사로 임명된 후 공중전에 나섰다가 이륙 도중에 상공에서 덮쳐온 헬캣 전투기에게 격추되었다.

6. 중상과 가미카제 임무

그런 추락을 겪으면서도 불행 중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양 다리가 마비되고 척추가 부러질 정도로 초주검이 될 중상을 입은 스기노 카즈오는 이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권총을 머리에 댔지만 부하가 총구를 손으로 쳐내고 총을 빼앗아 자살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마비된 다리가 다음날 아침에 감각이 돌아왔고 3일 후부터 부축을 받아 걷게 되었다.

긴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스기노는 부상에서 회복한 후 1945년 2월에 가미카제 특공대원이 되었다. 그렇지만 베테랑이었던 그는 직접 함선 특공을 하는 임무 대신 폭탄을 싣고 돌진하는 특공기의 직엄 임무를 담당했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그는 가미카제 같은 자살 임무에 대해 회의를 품었고 개인적으로는 극구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한편으로 그는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고뇌했다.

7. 제대 이후의 삶

3월에 하카타 해군항공대의 교관으로 임명된 스기노는 종전까지 그곳에서 근무했다. 8월에 일본이 항복하자 군복을 벗게 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고, 얼마 후에는 소방본부에서 내근직이 맡겨졌다. 1953년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공직 추방령이 풀리면서 재건된 해상자위대에 다시 입대한 스기타는 조종 교관으로 복무하다가 1971년에 3등 해좌(三等海佐 : 해군 소령)로 정년 퇴임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스기노는 이후 일본 도로공사에 입사해 1986년까지 재직하다가 1999년에 7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1] 동기였던 스기타 쇼이치도 부대는 달랐지만 똑같은 별명으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