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청사인 박물관 일대
아우구스티누스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올리브 나무 | 그가 수학한 마다우로스의 바실리카 유적 |
1. 개요
아랍어 سوق أهراس베르베르어 ⵚⵓⵇ ⴰⵀⵔⴰⵙ
영어, 프랑스어 Souk Ahras
알제리 동북부의 도시. 콩스탕틴에서 동쪽으로 100km, 안나바에서 남쪽으로 70km, 테베사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한다. 튀니지와의 국경에서 서남쪽으로 25km 떨어져 있다. 동부 알제리의 베르베르 문화의 거점 중 하나로, 인구는 18만 명이다. 고대에는 누미디아-로마 도시 타가스테였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현재 지명은 아랍어로 '시장'을 의미하는 수크와 베르베르어로 '사자'를 의미하는 아라스( 오랑 지명의 어원이기도 함)의 복합어이며, 실제로 1930년대까지 인근 숲에 사자가 서식했다고 한다.
19세기 말엽 안나바-테베사간 철도와 함께 튀니지 젠두바로의 철도가 부설되어 교통의 요지로 중시되었고, 20세기 들어서는 철광석과 인광석 광산이 발견되어 광업 도시로 발전했다.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국가해방군 (ALN)이 남쪽의 울레드 베시아 산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시가지 서북쪽에 모하메드 셰리프 메사디아 대학이 있다. 해발 700m의 고지대에 위치했지만 여름엔 35도 이상 올라가는 등 덥고, 겨울에는 0도까지 떨어지는 등 추운 편이며 눈도 내린다. 시내의 볼거리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올리브 나무 정도가 있다. 도시 주변에는 로마 유적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서쪽 25km 지점의 케미사 (투부리스쿰)와 남쪽 20km 지점의 마다우로스가 있다.
2. 역사
케미사 (투부리스쿰)의 로마 극장 유적
선사시대 화살촉이 발견될 만큼 오래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다. 그러던 기원전 9세기 카르타고의 성립 후 마다우로스, 테베사와 함께 와디 하미세 강변에 배후도시가 세워졌다. 고대의 지명 타가스테는 베르베르어로 배낭을 뜻하는 타구스트에서 유래되었는데, 도시 자체가 분지 속에 들어있는 형세이기 때문이다. 포에니 전쟁 후 일대는 누미디아령이 되었다가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로마 당국은 인근 지역에 투부리스쿰 (케미사) 등의 성채들을 세워 유목민들의 침공에 대비했다. 팍스 로마나 시기 타가스테는 라틴-베르베르 문화의 교차로였고, 일대의 농토에서 생산한 밀과 인근 숲에서 잡힌 바르바리 사자 및 곰을 로마로 수출했다.[1] 후자의 맹수들은 콜로세움 등의 경기장에서 유희로 활용되었다. 다만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 (식민도시)가 되지는 않았기에 라틴계 로마인들은 거의 정착하지 않았고, 주민의 대다수는 로마화된 베르베르인들이었다.
2.1. 아우구스티누스
밀라노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알리피우스 (15세기 작) / 아우구스티누스의 올리브 나무 옆에 세워진 예배당 |
354년 11월 13일 타가스테에서는 성 모니카의 아들 아우구스티누스가 탄생했다. 다만 고대 유적 위에 현대 도시가 들어선 까닭에 생가는 남아있지 않다. 그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올리브 나무만이 전해질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1세 무렵 인근 마다우로스의 라틴 문학 학교에서 로마 문명을 습득했고, 17세에는 카르타고에서 유학했다. 19세가 된 373년 고향으로 돌아와 문법을 가르치던 그는 이듬해 다시 카르타고로 향하여 교사 생활을 이어가다 383년 로마에 학교를 세웠다. 387년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동향 출신의 제자 알리피우스와 함께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와 수도자로 지내던 그는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사망하는 슬픔에도 현지 수도회 조직을 이끄는 등 신앙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391년 히포의 사제로 선임되어 재차 고향을 떠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존의 재산을 타가스테 교회에 기부했다. 한편 알리피우스는 타가스테의 주교가 된다.
2.2. 중세 : 저항의 장
19세기 무렵 아우구스티누스의 올리브 나무. 1990년대 와하비스트들의 훼손 시도를 넘겨 현존한다
40여년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반달족에게 포위된 히포에서 사망했고, 타가스테 역시 반달 왕국령이 되었다. 반달족은 기존 로마식 장원제를 유지했지만 종교적으로 정통파 기독교를 억압했기에 불만을 품은 현지인들이 종종 봉기했고, 그러다 534년 동로마 제국이 일대를 재정복하고 정통파 기독교를 회복시켰다. 동로마 당국은 기존 도시 유적으로 성채를 세웠고, 곡물 창고를 재건하여 밀을 공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주민들을 봉기하여고, 따라서 일대는 동로마 지배력이 약화된 채로 7세기 이슬람 정복이 이루어졌다. 아랍인들은 타가스테를 바위라는 의미인 수카라로 불렀다. 중세 시기 일대에는 하나차와 엘 하락타 부족이 정착했다. 오스만 제국 산하 알제 총독령 시기에 그들은 콩스탕틴 베이의 지나친 과세에 대항하여 하나차 부족장 엘 우즈나지를 중심으로 저항했고, 19세기 프랑스의 침공 시까지 사실상 독립한 채로 자치를 유지했다.
2.3. 근현대 : 독립 투쟁
셰이크 모하메드 엘 모크라니 | 프랑스 지배기의 수크아라스 시청 |
1843년 5월 25일, 두 차례 시도 끝에 프랑스 군은 일대를 장악했다. 1856년 초엽 수크아라스는 유럽식 도시로 개조되었고, 일대의 농업 전망에 고무된 이주민들이 몰렸다. 이후 비유럽인에 대한 차별이 횡행하며 현지인들의 분노가 축적되었고, 1871년 초엽 프랑스 당국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까지 동원하려 하자 그들은 재차 하나차 부족장 엘 카블루티 하에 집결하여 저항했고, 그러한 스파히 봉기에 이어 라흐마니아 종단의 셰이크 모하메드 엘 모크라니가 카빌리 반란을 일으키며 전국적인 반프랑스 저항으로 이어졌다. 다만 그해 5월 엘 모크라니가 전사하고 엘 카블루티가 튀니지로 망명하면서 반란은 진압되었고, 한동안 평화가 이어졌다. 20세기 초엽의 독립 운동은 무장 투쟁 대신 정당 조직 등 정치적으로 전개되었다.
1954년 알제리 독립 전쟁 시에 수크아라스는 1957년부터 독립군 (ALN)의 동부 지휘부가 되었고, 그들에게 탄약 등의 물자를 지원하는 튀니지와의 보급로 확보를 위해 전략적으로 중시되었다. 무기가 모인 수크아라스에 독립군은 신병 훈련소를 세웠고, 이에 1958년 2월 프랑스 공군이 폭격하기도 했다. 1955년부터 1961년까지 10여 차례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독립군은 건재했고, 결국 이듬해 이루어진 알제리의 독립에 있어 수크아라스는 큰 역할을 수행한 샘이다. 독립 후로 유럽인 거주민들이 떠난 수크아라스는 튀니지와의 교류를 담당하며 꾸준히 성장 중이다.
3. 갤러리
3.1. 케미사
위성사진
3.2. 마다우로스
더 많은 사진은 해당문서로
[1]
그외에 농토를 망친다는 명분 하에 코끼리 역시 사냥하여 그 상아를 팔았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