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춘여(春汝) / 괴당(槐堂) |
본관 | 야성 송씨[1] |
출생 | 1877년 5월 18일 |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고산리 (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서마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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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9년 3월 18일 |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서마을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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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송회근은 1877년 5월 18일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고산리(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서마을)에서 충숙공(忠肅公) 송희규(宋希奎)의 16대 종손인 아버지 송준모(宋浚謨)와 어머니 파평 윤씨 윤광은(尹光殷)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1901년( 고종 31) 법부 주사(法部主事)에 임명되었으나, 임명된 지 하루 만에 사직하고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3일 간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 #
그는 1919년 3월 파리장서 서명운동에 참여하였으며, 3.1 운동의 영향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성주 군내의 유력한 유림들인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 송수근·송우근(宋祐根)· 장석영· 송훈익·김희규(金熙奎)· 송준필·이봉희(李鳳熙)· 송규선· 송문근· 송인집· 송천흠 등과 성주군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대가면 옥화동교회의 유진성 목사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측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유진성을 찾아가 유림·기독교도들이 연합시위를 전개하기로 협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다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경, 계획대로 성주면 경산동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모여 있던 기독교도들이 먼저 성주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시장에서 대기중이던 그는 60여명의 유림들과 함께 3천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일본 경찰의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시 후퇴하였으나, 이날 밤 10시경까지 독립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였다.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그해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곧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공소가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49년 3월 18일 별세하였다.
사후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