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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현백(玄伯) / 자광(自光) |
본관 | 야성 송씨[1] |
출생 | 1880년 12월 20일 |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고산리 (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서마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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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8년 4월 27일 (향년 67세) |
경상북도 성주군 | |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금연동마을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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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송우선은 그의 남동생이다.
2. 생애
송규선은 1880년 12월 20일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고산리(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서마을)에서 아버지 송춘익(宋春翼)과 어머니 김녕 김씨 김석교(金錫敎)[3]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성주군의 유림으로, 1919년 김창숙, 곽종석, 김복한 등 유림계 지도자 137명이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청원서를 작성하고 서명할 때 이에 가담하여 서명했다. 이후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성주군 내의 유력한 유림들인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 송수근·송우근(宋祐根)· 장석영· 송훈익·김희규(金熙奎)· 송준필·이봉희(李鳳熙)· 송회근· 송문근· 송인집· 송천흠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때 대가면 옥화동교회의 유진성 목사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측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송규선은 이들과 협의한 끝에 공동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4월 2일 오후 1시, 경산동 관제묘 뒷산에 모여 있던 기독교도들이 먼서 성주시장을 향해 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장에 대기하고 있던 그는 60여 명의 유림들과 함께 3천여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경찰이 발포하면서 부상자가 발생하자, 그는 군중과 함께 일시 후퇴했다가 그날 밤 10시경까지 시위를 지속했다. 이후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1919년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 성주군에서 송인집 등과 함께 사립 동창학원(東昌學園)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을 수행했으며, 8.15 광복 후에는 반공 활동을 전개하다 1948년 4월 27일 공산당원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반공활동의 공을 인정하여 송규선에게 내각 수반의 표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0년에는 독립운동을 전개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