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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14:36:32

소설적 자유

1. 개요2. 작품 세계 설정에 대한 자유와 책임3. 장르적 파괴

1. 개요

Romanesque liberte.

프랑스의 작가이자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주창한 개념. 작가에 의해 창조된 세계라고 하더라도 이미 만들어진 이상 그곳은 독자적인 세계로서 제아무리 창조주라고 하더라도 '에이 마음에 안 들어 다 뒤집어 엎자' 등의 무분별한 개입은 있어선 안 된다는 개념이다.

2. 작품 세계 설정에 대한 자유와 책임

여러모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대립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무시한 작가의 소설 세계관은 자위 수단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게임에는 이미 정해진 룰이 있는데 그 룰을 아예 벗어나는 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즉, 반칙이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개연성 핍진성은 중요하며 최소한 인과율은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타임머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설정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타임 패러독스 문제는 매우 골치아픈 문제이며 깊게 파고들면 모순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일정한 패턴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소설적 자유로 허용된다. 예를 들어 터미네이터 시리즈와 백 투 더 퓨쳐 시리즈는 똑같이 시간이동을 다루지만 한쪽은 평행우주 개념이고 다른 쪽은 독자적인 우주관을 사용한다. 두 세계의 물리법칙은 결코 양립할 수 없지만 두 작품 모두 작품성에 문제는 없다. 왜냐하면 작가가 애초에 그렇게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시로 작가가 좀비를 설정해 작품에 도입했다면 총에 맞은 사람이 멀쩡히 걸어다니는 건 충분히 허용된다. 하지만 그냥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에서 범인이 총을 맞고도 멀쩡히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개연성을 파괴하며 작품의 질을 해치게 된다. 나중에 범인이 방탄복을 입고있었다는 추가 설명이 들어가면 다시 개연성을 획득하겠지만 만약 범인이 피격당할 당시에 웃통을 벗고 있었다고 서술돼있었다면? 범인이 로봇이라고 설정해서 변명하든지[1] 사실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었다든지 변명해서 어떻게든 다시 개연성을 회복할 추가 설명을 깔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막무가내로 작품을 진행하면 작가 입장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소설의 소비자층인 독자가 떠나버린다.

소설은 현실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은 현실을 모사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건 소설은 현실성을 추구하는 허구라는 것인데, 섬이 하늘에 떠다니는 세계든 자동차가 말을 하는 세계든 작가가 처음에 그렇다고 설정하면 그런 것이다. 이것이 소설의 허구성이다. 그러나 초능력 따위가 없는 세계관에서 눈이 먼 사람이 저격소총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소설적 자유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자유에는 모름지기 책임이 따르는 것과 동일선상의 개념이다. 자신이 만든 세계관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으므로 꼭 소설가에만 한정지을 필요 없이 TRPG의 마스터도 게임 제작자도 내러티브를 담고있는 모든 매체를 다루는 아티스트들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는 이론이다.

3. 장르적 파괴

다만, 장르에 따라서 드물게 소설적 자유를 덜 신경쓰거나 완전히 파괴해도 상관없는 장르 역시 없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패러디가 중점인 코미디물이 그러한데 가령 심슨 가족에서 호머가 지각한 벌로 방사능 폐기물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은 장면과 크로스오버 특별편에서 패밀리가이의 피터 그리핀과 싸울 때 방사능으로 슈퍼 히어로 능력을 부여받은 장면은 확연히 모순되며 작품에서 한번 소개된 설정이 뒤집어지는 일이지만 이에 대해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코미디 작품들은 여러 작품들을 유쾌하게 비틀어 대거나 현실을 비트는 게 역설적 약속이며 때로는 내러티브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 역시 패러디와 풍자를 전체 맥락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로, 소설적 자유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게임의 본질인 플레이와 퍼즐, 경험 등 게임성 자체가 훌륭하다면 스토리 자체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어도 전체적인 완성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장르에 따라 매우 크게 달라진다. 따라서 게임성만 좋다면 소설적 자유와 무관하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좀비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스토리 비중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라스트 오브 어스 2 같은 경우 주인공들의 성격이 어떠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변화했는지를 전혀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소설적 자유에서 벗어난 연출로 받아들여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물론 주인공들의 성격 변화 자체는 어느 작품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주인공이 큰 사건을 거치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든가 하는 등의 계기가 주어져 성격 변화에 대한 개연성이 확보되었다면 말이다. 외려 이를 개연성의 탄탄함 하에서 재미있고 흥미롭게 전개해 나간다면 게임에 흡인력을 더해 주기까지 하며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이나 공감도 하기 쉬워져 게임에 더 애착을 가지고 플레이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작품에서는 이에 대해 플레이어들이 납득할 만큼의 묘사가 미흡했다는 평가가 짙다.

한편, 소비자들이 스토리의 비중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같은 경우 게임성을 더 크게 논하기 때문에 카유우마로 유명한 사육사에 일기에선 T바이러스가 공기 감염이 되는 듯한 묘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공기 감염 묘사가 거의 무시되었음에도 이를 신경쓰는 플레이어들은 거의 없다. 좀비 바이러스 감염이 어떤식으로 이루어지는가는 좀비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도 게임 자체가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적들을 어떻게 공략할지에 대한 전략이 스토리보다 시리즈 완성에 있어 더 중요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때때론 상업물이라고 불리는 장르물에선 매출을 더 신경쓰기 위해 비주얼과 사운드 등 다른 요소들에 역량을 더 집중하고, 의도적으로 소설적 자유의 중요도를 상당히 떨어트리기도 한다. 결국 소설적 자유는 개연성과 크게 연관되어 있는 부분으로서 이를 지키면서 작업하려면 그만큼 시간적, 물질적 투자가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가령 쏘우 시리즈는 장르물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가상의 상황에서 범죄자들이 직쏘에 의해 잔인하게 처벌당하는 상황을 가볍게 보고 즐기고 싶어 한다. 때문에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시리즈의 주요 포인트인 직쏘 철학이 모순되는 상황이 발생함에도 별 생각없이 보면 악인이 잔인하게 처벌받는 장면들이 충실하게 연출되고 있기 때문에 시리즈의 인기가 작품성과는 무관하게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다.[2]

그러므로 모든 상업물이 소설적 자유의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이는 상업작품들의 특성이다. 90년대 액션 어드밴처 영화 등지에서 총과 각종 화기 등으로 적들을 잘만 학살하고 다니던 주인공이 정작 악인의 생명에 대한 동정심을 보여준다거나, 수많은 소년만화들이 전개상의 편의성이나 자극적인 전개를 위해 기존에 내세운 법칙을 깨부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줘도 매출이 잘 나왔던 것 역시 소비자들의 니즈에 충실한 상업물로서의 선택과 집중을 해 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존 윅은 상업물 중에서도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서 애초부터 이런 요소들을 걱정할 일이 없게끔 별 내용을 만들지 않고 철저하게 액션에만 집중한 좋은 선례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이런 장르물들이라고 하더라도 주 고객층이 보는 이유와 관련한 설정만큼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 존윅은 많은 매니아들이 칭찬해 온 요소인 총기 전투에 대한 현실적인 고증을 통한 액션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고 핸드건에서 아무런 탄창 교환 묘사도 없이 4, 50발을 연달아 쏜다면 매니아들은 등을 돌리고 쏘우처럼 그냥 액션이 나오니까 보는 관람객만 남을 것이다. 소설적 자유가 모든 작품과 모든 내러티브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장르물이라고 한들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고있는 그 이유와 관련된 정보들에 대해서 만큼은 사르트르의 이 이론을 어겨선 안된다. 상업물이든 아니든, 독자들이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 그 작품을 봐야 할 핵심적인 이유까지 파괴하는 작품은 결코 사랑받을 수 없다.


[1] 미래 배경의 범죄 스릴러라면 가능하다. [2] 소설적 자유는 단순히 물리적인 설정 외에 캐릭터들과 세계관에도 분명한 책임을 묻기 때문에 작품 내 캐릭터나 환경, 사회가 모순되거나 엇나간다면 연출로라도 그것을 비판해야 하며 그 모순으로부터 오는 책임을 분명하게 짊어져야 한다. 하지만 쏘우는 1만 따로 떼놓으면 괜찮지만 2부터는 비질란테 성향을 띄어 문제가 된다. 작품은 직쏘의 방법이 옳다 옹호하지만 직쏘가 제시하는 철학인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거나, 악인들을 치유하는 수단으로서의 살육게임"과는 무관하게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는 이들이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며 더 나아가 7편에서 주인공 바비의 아내는 바비에게 속은 명백한 피해자이자 선량한 시민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모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건이나 책임을 묻는 수단이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고, 계속 비질란테 성향만을 묘사하기 때문에 소설적 자유를 지키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