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소비에트-우크라이나 전쟁 радянсько-українська війн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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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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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17년 11월 8일~ 1921년 11월 17일 | |||
장소 | |||
우크라이나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폴란드 제2공화국| [[남러시아 정부| [[우크라이나국| |
마흐노우시치나 |
지휘관 | |||
시몬 페틀류라 미하일로 파블렌코 올렉산드르 우도비첸코 |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 |
안톤 데니킨 표트르 브란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파울로 스코로파즈키 |
네스토르 마흐노 |
결과 | |||
소비에트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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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내전 중이던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벌인 전쟁이다.2. 전개
아직 1차대전이 벌어지던 1918년 1월 22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자,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 북동부를 침공했다.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와 미하일 무라비요프가 지휘하는 이 군대의 병력은 3만에 달했고 이에 맞서는 우크라이나군은 1만 5천명이었다. 우크라이나 좌안과 우안에서는 현지 볼셰비키들이 붉은 군대의 진격에 호응하여 반우크라이나 봉기를 일으켰다. 붉은 군대는 12월 26일 하리코프, 이듬해 1월 9일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15일 알렉산드롭스크(현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20일 폴타바를 점령했다. 무라비요프는 27일 바흐마치에 붉은 군대가 집결하자 키예프(현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붉은 군대가 키예프로 진격할 당시 그들을 막아선 우크라이나 인민군은 500명도 안되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크루티 전투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여 시간을 벌어주었고 그 사이 우크라이나 국회는 키예프를 탈출하여 서쪽 빈니차로 천도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를 붕괴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독일 제국군에 리가가 함락당하자 전쟁 수행능력을 잃어버린 볼셰비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해야만 했다. 볼셰비키는 독일 제국이 1차대전으로 패망하자마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무효를 선언하고 동유럽을 침공했다. 물론 자원과 인구가 풍부한 우크라이나도 대상 중 하나였다.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이용해 1918년 11월 28일 쿠르스크에서 우크라이나 임시노농정부(Временное 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о Украины)를 선포하여 우크라이나 재침을 사실상 공식화했다.
볼셰비키의 우크라이나 재침은 1919년 1월 2일에 개시되었다. 다음날 제1우크라이나인소비에트사단이 하리코프를 점령했다. 다음날 안토노프옵세옌코가 지휘하는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창설되었다. 농민 빨치산과 도시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붉은 군대에 가담했다. 붉은 군대는 12일 체르니고프(현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 20일 폴타바를 점령했다. 파벨 디벤코 휘하 제2우크라이나인소비에트사단은 예카테리노슬라프를 점령했다. 안토노프옵세옌코는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활동하는 안톤 데니킨의 군대가 오데사와 크림 반도에 상륙하는 협상국 군대와 합류하여 키예프로 진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므로 그는 키예프를 먼저 점령하기 위해 18일 쿠르스크에서 체르니고프로 사령부를 옮겼지만, 이때 우크라이나 정부가 프랑스에 청한 군사원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안토노프옵세옌코의 우려는 기우로 끝났다. 2월 5일, 붉은 군대는 키예프를 점령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빈니차로, 그 다음 카미야네치포딜스키로 천도했다. 붉은 군대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중부를 나누는 즈브루치 강에 도달하고 키예프를 향한 우크라이나 인민군의 반격을 격퇴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에 의한 전시공산주의 적용과 그로 인한 가혹한 식량 징발은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반볼셰비키 봉기를 촉발했다. 이들의 봉기로 인해 붉은 군대의 서진이 중단되었고 한숨 돌린 우크라이나군은 병력과 물자를 보충할 수 있었다. 붉은 군대는 우크라이나 인민군과 한동안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이다 6월 말 돈바스에서 의용군[1]에게 연패하여 하리코프, 니콜라예프(현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 오데사를 상실했다.
남부전선에서 수세에 몰린 볼셰비키는 다시 우크라이나를 포기해야만 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반격을 개시, 8월 12일 빈니차, 14일 스타로콘스탄티노프(현 우크라이나 스타로코스탼티니우), 19일 베르디체프(현 우크라이나 베르디치우), 21일 지토미르, 30일 키예프를 수복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 안톤 데니킨이 지휘하는 백군 소속 남러시아군도 키예프 근교에 도착했다. 우크라이나군은 교전을 피한다는 생각으로 남러시아군에 키예프를 넘기고 후퇴했다.
아무튼 1919년 볼셰비키의 우크라이나 재침은 볼셰비키의 패배로 끝났지만 우크라이나의 승리라 보기에도 애매한 결말이 났다. 데니킨의 총공세를 격퇴한 볼셰비키는 1919년 12월 키예프를 재점령했고, 우크라이나는 끝내 멸망한다.
[1]
Добровольческая армия.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오늘날 우크라이나 남부 및 러시아 남서부에서 활동한 백군 부대로, 볼셰비키는 물론
마흐노우시치나를 상대로도 싸웠다. 1919년
남러시아군(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Юга России)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이 남러시아군은 다시 1920년 3월
표트르 브란겔의 브란겔 군(Армия Врангеля)과 합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