薛公瓚傳
1. 개요
조선 초기, 중종 때에 쓰여진 고전소설로 조선판 엑소시스트.[1] 작가는 당대의 문신 채수. 채수는 유불선 가리지 않고 공부를 했으며, 그 덕에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도교, 무속에 조예가 깊었다. 당대에 지어진 소설들 중에서 흔치 않은 괴담형 소설이다.
2. 등장 인물
2.1. 설위(薛緯)
설공찬의 증조할아버지로, 과거 대사성을 지낸 인물이다. 작중 시점에선 이미 고인이라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고, 설공찬의 가계를 언급할 때 잠시 언급되는 인물이다.이 인물은 엄연히 순창 설씨 족보에 나오는 실존인물로, 1419년( 세종 1)에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1위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만경 현령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고 한다.
2.2. 설충란(薛忠蘭)
설위의 손자이자, 설충수의 형이자 설공찬 남매의 아버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나 딸은 시집보내자마자 병으로 죽어버렸고, 아들 설공찬은 장가도 못 가고 몽달귀신이 되어, 참척을 2번이나 겪은 불쌍한 아버지다.이 인물도 순창 설씨 족보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인데, 실제 족보에서도 설충란은 설위의 손자로 제시되어있다. 설공찬이 설위를 증조부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설충란 대까지의 족보는 어느정도 고증이 정확한 셈.
2.3. 설충수(薛忠壽)
설충란의 동생이자 설공찬 남매의 숙부, 설공침-설업동 형제의 아버지. 영화 < 엑소시스트>의 크리스 맥닐과 같은 포지션이다.큰아들 설공침이 설공찬 남매의 혼령에 씌어 날이 갈수록 야위어지자, 무당 김석산을 불러 남매의 혼령을 쫓아내 아들을 살리려고 애쓴다. 이 인물 역시 순창 설씨 족보에 등장하는 실존인물.
2.4. 설공찬(薛公瓚)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충란의 장남이다. 이 인물은 가상인물인데, 순창 설씨 족보를 감안할 때, 실제 설충란의 아들인 설공양을 모티프로 만든 인물로 추정된다. 영화 <엑소시스트>의 파주주 포지션이다.20세가 될 때까지 장가를 못 간 노총각이었다. 의아할 수 있으나 시대가 조선시대라는 걸 감안하자. 지금이야 20세에 장가를 가면 "왜 이렇게 결혼을 빨리 하냐?"는 소리를 듣지만, 조선시대에는 20세에도 장가를 못 가면 "반 40살이 될 때까지 어째서 장가를 못 갔냐?"는 소리를 들었다. 오죽하면 20살까지 혼인하지 못하면 국가에서 중매를 서 줄 정도였다.
결국 그는 장가도 못 가고 병으로 죽었다. 젊은 나이에 죽게 되어 한이 맺힌 것인지, 구천을 맴돌다 사촌형제 설공침의 몸 속으로 들어가 마구 괴롭힌다.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아마도 생전에 사촌들과 사이가 그다지 좋았던 편이 아닌 듯하다.
숙부 설충수가 무당 김석산을 불러 자신을 내쫓으려 하자, 크게 반발하며 설공침을 죽기 직전까지 괴롭힌다. 설충수가 "김석산을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그제야 원래대로 되돌리고, 사촌동생들에게 공침의 입을 빌려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2.5. 설공찬의 누나
여성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던 당시 시대적 배경 때문에 이 인물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이름이 언급되지 않기에 이 인물은 가상인물로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일단 순창 설씨 족보에는 "설충란이 슬하에 3명의 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역시 영화 <엑소시스트>의 파주주 포지션이다.설충란의 장녀인데, 남동생 설공찬과 같이 생전에 몸이 약했는지 젊은 나이에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역시 젊은 나이에 죽게 되어 한이 맺혔는지, 구천을 맴돌다 사촌형제 설공침의 몸 속으로 들어가 괴롭혔다.
이에 숙부 설충수가 무당 김석산을 불러서 퇴마를 진행했고, 버티기엔 너무 약했는지 "내 남동생 공찬이를 데려오겠다."고 말한 뒤 설공침의 몸에서 나갔다. 그리고 예고대로 남동생을 데려왔다.
2.6. 설공침(薛公琛)
설충수의 장남으로 설공찬의 사촌형제이다. 역시 가상인물인데, 순창 설씨 족보를 감안할 때 아마도 실제 설충수의 아들인 설공심을 모티프로 만든 인물로 추정된다.이 작품 내 최대 피해자이기도 한 인물이다. 영화 <엑소시스트>의 리건 테레사 맥닐과 같은 포지션이다. 생전에 도대체 사촌형제들에게 뭔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설공찬 남매가 교대로 그의 몸에 들어와서 괴롭히고 다닌다. 처음엔 뒷간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설공찬의 누나 혼령에 빙의되었는데, 이 혼령은 무당 김석산 덕분에 퇴마되었지만, 뒤이어서 설공찬의 혼령이 씌였고, 매일 빙의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결국 참다 못한 아버지 설충수가 다시 김석산을 불러 내쫓으려 했지만, 설공찬이 그를 죽지 않을 만큼 괴롭혀 김석산을 못 부르게 막았다. 아마도 설공찬이 제발로 나가지 않는 한 계속해서 설공찬에게 몸을 빌려주게 될 듯하다.
2.7. 설업동
설충수의 차남으로, 설공찬의 사촌형제이자 설공침의 동생이다. 역시 가상인물이다. 설공찬 일가의 가계를 언급할 때 잠시 언급되는 인물이며, 작품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결말부에서 형제들과 함께 설공침의 입을 빌려 말하는 설공찬의 저승 이야기를 듣게 된다.2.8. 김석산
무당인데 실질적으로 퇴마사에 가까운 인물이다. 영화 <엑소시스트>의 데미안 카라스 신부와 같은 포지션으로 보면 된다.설공침이 빙의되었을 때, 설충수가 가장 먼저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던 인물이다. 처음 설공찬의 누나 혼령이 설공침의 몸에 들어왔을 때 복숭아나무 가지를 흔들어 내쫓았지만, 누나 혼령이 남동생 설공찬 혼령을 데리고 오면서 설공침이 다시 빙의된다.
이에 설충수가 다시 그를 불러 퇴마하려 하자 " 주사(朱沙) 1냥을 사서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가면 혼령이 무덤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방법을 알려준다. 이 말을 들은 설공찬이 펄쩍펄쩍 뛰는 걸 보면, 아마 설공찬 입장에서도 가장 두려운 인물이었을 듯하다.
3. 줄거리
전라북도 순창군에 설충란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자식으로 설공찬과 그 위 누나인 남매를 두고 있었다. 설충란의 할아버지이자 설공찬의 증조부는 설위라는 인물로 과거에 대사성을 지낸 바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설충란의 동생으로 설충수란 인물이 있었고, 설충수에게는 설공침과 설업동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2] 그런데 설충란의 딸은 시집을 간 뒤 얼마 안 되어 갑자기 병으로 죽어버렸고, 아들 설공찬마저 20살에 장가도 못가고 병에 걸려 죽어버렸다.설충란은 슬피 울며 자식들을 저세상으로 보냈지만 어린 나이에 죽게 된 탓인지 두 자식들의 영혼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맴돌았다. 하루는 설충수의 아들 설공침이 뒷간에 볼일을 보러 갔고 그 때 그 집에서 일하던 아이가 행금나무 가지를 꺾었는데 갑자기 고운 계집이 공중에서 내려와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아이는 깜짝 놀라 제 집에 들어가니 이윽고 설충수의 집에서 “공침이 뒷간에 갔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땅에 엎드려 있다가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렸으나 기운이 미쳐버리고 다른 사람과 다르더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설충수가 잠시 시골에 내려갔다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빙의된 설공침은 시름시름 앓더니 병석에 누워 있었다. 맏아들 설공침이 귀신 들렸다는 걸 알게 된 설충수는 곧바로 무당 김석산을 불렀고, 김석산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흔들어 설공찬의 누나 귀신을 쫓아냈다. 그러나 설공찬의 누나는 설공침의 몸에서 나가면서 "나는 계집이라 약해서 물러나지만 내 오라비 공찬이를 데려오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대로 설공찬의 누나 귀신이 가고 설공찬의 혼령이 설공침에게 씌이고 말았다. 설충수가 백방으로 양재(攘災)하려 하지만 설공찬이 제 사촌아우 설공침의 입을 빌려 "이는 오직 설공침을 다치게 할 뿐이고, 나는 늘 하늘가로 다니기 때문에 다치지 않는다"고 조롱했다. 그러더니 "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거든 왼새끼를 꼬아서 집문 밖에 두르면 된다"고 했다. 설충수가 이 말을 곧이 듣고 그대로 했지만 역시나 거짓부렁이었고, 설공찬 또한 "과연 내 술수에 빠졌다."며 숙부를 희롱하고 조롱했다.
설공찬의 혼령이 빙의할 때마다 설공침은 본 정신을 잃고 설공찬에게 자아가 먹혔고, 집 뒤의 살구나무 정자에서 하루 세끼를 먹었다. 어느날 설충수와 설공침이 모처럼 부자 간의 겸상을 하고 있는데, 설공침이 왼손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3] 그래서 설충수가 설공침에게 "어찌하여 왼손으로 밥을 먹느냐?"고 물었고 그 때 설공침의 눈빛이 변하면서 "저승에서는 모두들 왼손으로 밥을 먹느니라!"고 하는 것이었다.[4] 그 뒤 제정신을 되찾은 설공침은 당한 수모가 서러워 옷이 젖도록 운다.
이후 설공찬의 혼령이 빙의된 설공침은 계속해서 야위어갔고, 정상으로 이따금씩 돌아올 때마다 설공침이 울면서 "공찬이의 혼령이 자꾸 내게 와서 죽을 것 같다."고 애원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심각함을 알게 된 설충수는 다시 김석산을 불러 설공찬의 혼령을 쫓아내려 했고, 김석산은 " 주사(朱砂) 1냥을 사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내가 가면 영혼이 제 무덤 밖으로 나다니지도 못할 것이오."라고 비법을 알려주었다. 심부름 간 사람이 설충수에게 김석산이 한 말을 전하자 설공찬의 혼령이 크게 화를 내며 "이렇듯이 나를 괴롭히시면 숙부님의 형용을 변화시키겠습니다!!" 라며 설공침을 마구 괴롭히는데, 팔다리를 비틀며 눈을 뒤집고, 혀를 파서 베어내 코 위로 올라가 귀 뒤를 오르락내리락 하게 하는 식이다. 옆에서 병간호하던 늙은 종도 반쯤 죽었다 겨우 다시 깨어날 정도로 시달린 이후에야 "이러다가 아들이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겁을 먹은 설충수가 "김석산을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리고 이후 설공찬은 설공침의 입을 빌려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저승이란 이곳에서 40리 떨어진 바닷가에 있으며, 이름은 단월국(檀越國)이라 하며, 그 왕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이승에서 어진 재상이면 죽어서도 재상으로 다니고, 이승에서는 비록 여편네 몸이었어도 약간이라도 글을 잘 하면 저승에서 아무 소임이나 맡으면 잘 지낸다. 이승에서 비록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께 충성하여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여기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5]
그러다가 명나라 황제 성화제가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의 수명을 1년 정도 연장시켜 달라고 애박이란 사람을 보내 염라대왕에게 요청했는데, 염라대왕이 "1달 이상은 곤란하다"고 해도 계속 보채자 결국 화가 난 염라대왕이 "아무리 천자라 해도 사람 살리고 죽이고 하는 건 내 권한인데 어디서 고유권한 침해냐"며 수명 연장이고 뭐고 없이 당장 그 신하를 잡아오라고 한다. 성화제는 놀라서 본인이 몸소 염라대왕에게 찾아가고, 염라대왕이 앞서 황제가 "수명 좀 늘려 달라고 부탁한 그 신하를 잡아다 손을 삶으라"고 명령하는 부분에서 소설이 끝난다.[6]
4. 당대의 골칫거리
이 소설이 쓰여졌을 무렵, 조선에는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 소재 자체도 당대로서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당대 사회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바로 반역자는 임금이라도 지옥에 간다는 구절. 여기에 "주전충 같은 사람은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는 말을 붙여서 주전충이 절도사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를 멸망시킨 일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지만, 당시 왕이었던 중종이 바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한 인물이었으니 사실상 '중종 너도 반역자니 죽어서 지옥 간다' 라는 소리. 이 때문에 작가인 채수는 사형을 당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은 금서가 되어 불태워졌다.
사실 재미있는 점은, 채수는 원래 중종반정에 참여해[7]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봉해진 반정공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원종, 성희안 같은 반정공신들이 중종을 둘러싸고 국권을 농단하는 모습을 보여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쓴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었다. 채수가 보기에 중종반정은 폭군을 몰아내서 백성들을 이롭게 한 게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벌인 것에 불과했다. 당초에 중종반정의 주역 중 주역인 박원종부터가 연산군 밑에서 누릴거 다 누렸고 반정공신들 대다수가 이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반정공신들은 제2의 반정을 우려하여 연산군의 자식들을 죽이고 중종의 아내인 단경왕후를 쫓아내는 등 온갖 무리수를 두었다.
당연히 중종이 즉위했어도 반정공신들은 박원종을 필두로 사치와 재산 증식에만 몰두했고,[8][9] 중종은 즉위 초반에는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했으며, 이로 인하여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질 기미조차 안 보였던 시절이었다. 단적인 예로 연산군이 유흥비 마련을 위해 내수사를 초법적으로 이용하던 것을, 중종 시기에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백성들 입장에선 연산군이 쥐어짜나 중종이 쥐어짜나 별 다를 게 없었다.
문정왕후는 내수사를 불교 진흥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였고, 문정왕후의 비호 속에서 내수사는 심지어 소속된 종들마저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으며, 그 이후의 왕들도 나라 재정이 어렵고 관행이라는 핑계로 내수사의 패악질을 더 장려했다. 오죽하면 훗날 송시열이 내수사 혁파를 외칠 정도였겠나.[10] 채수는 이런 현실에 분노했고, 그런 결과로 중종반정의 정통성까지도 부정하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5. 그 외
작가가 작가인 만큼 원래는 한문 소설이지만 한문으로 쓰여진 판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한글로 언해한 판이 있는데 이는 < 홍길동전>보다도 훨씬 이전에 한글로 언해된 소설이라는 데서 의미를 가진다. 발견된 국문본도 후반부가 없어진 채 13쪽까지만 남아 있다.금서임에도 불구하고 금서가 가진 매력에 당시 선비들 중에도 몰래 보는 자들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몇몇 관료들은 이 책의 내용을 다과회의 토론용으로 쓰곤 했다. 채수보다 조금 뒤에 인물로 명종 대에 이문건이 자신의 저서인 < 묵재일기>의 종이 뒷면에다가 몰래 필사한 것이 1997년 우연히 발견되어[11], 그 동안 이름만 전해진 <설공찬전>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KBS2 스펀지 80회(2005년 5월 14일)에서 '이 소설은 영화 엑소시스트와 유사하다'는 명제를 통해서 소개되었으며, 이 프로에선 묘하게도 등장인물 및 설정이 해당 영화와 비교해도 비슷하다고 밝혔다. 이 때 설공침의 역할을 이혁재가 맡았을 때 특히 "저승에서는 모두들 왼손으로 밥을 먹느니라!!" 하는 장면은 백미. 다만 지식의 별은 아쉽게도 4개 반[12]에 그쳤다.
2008년 전설의 고향 시리즈 중 <귀서> 편에서는 설공찬전에 묘사된 죽음들을 모방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설정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부분에는 이런 죽음을 묘사한 부분들이 없어, 지금은 사라진 부분에 묘사되어 있는 것이라고 설정한 듯하다.
2014년에 방송된 지식채널 귀신이야기 편에서도 다뤘다.
[1]
KBS2 <스펀지> 80화에 나왔던 소개. 발견 뒤인 1997년 8월 26일자 KBS1 <TV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소개됐고, 2002년 SBS <깜짝! 스토리랜드> 제5화에서도 소개되었다.
[2]
위에서 언급했듯이 설위, 설충란, 설충수는 모두 순창 설씨 족보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이다. 다시 말해, 채수가 소설의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실제 존재하는 인물과 가문을 차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3]
조선시대에는 오른손을 바른손으로 불렀고 왼손을 그릇된 손으로 여겨
왼손잡이를 억지로
오른손잡이로 교정시켰다. 하지만 오른손은 본래 '옳은 손'이 변화한 말이라 뜻의 차이가 없고(현재는 바른손과 오른손 모두 표준어), 왼손의 '왼'이라는 단어 자체가 '좌우가 바뀌어 쓰기 불편한', '마음이 꼬여 있는'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인식은
1990년대까지도 이어져, 학교에서 왼손잡이인 학생을 보면 교사와 부모들이 억지로 오른손잡이로 교정시키려 했다.
[4]
저승의 법도는 이승과 반대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5]
바로 이 대사 때문에 중종 당시에 금서가 되었다.
[6]
뒷부분이 더 있는 것 같지만, 이문건이 필사하는 과정에서 멸실된 것으로 보인다.
[7]
엄밀히 말하면 억지로 참여'당'한 것이다.
[8]
박원종에 대해서 이런 기록이 있다. 연산군이 끼고 살던 여자들을 자기가 다 차지해서 별장을 지어주고 음식이나 거처가 신하의 예를 넘었다. 즉 이들은 이미 명분을 스스로 없애버린 거다. 그러면서 지들은 왕이 뭣 좀 하려면 "연산군 꼴나고 싶냐?"며 어깃장 놓았다.
[9]
거기다가 반정공신들은 정국 장악력도 별로였는지 중앙정치가 안정화된것도 아니라서 김공저 사건, 이과의 옥사 등 온갖 사건들이 잇달았다.
[10]
다만 그럼에도 내수사 혁파는 왕실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그 내수사는 바로 왕실의 비자금 관리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송시열을 위시한 양반 사족 계급들이라고 깨끗하다고 보기는 애매한게 이들이 지주화되기도 하고 또 이들의 힘의 근거지인 서원의 횡포는 고려조의 절에 비견될만큼 심했다.
[11]
조선시대 종이에는 양면에 글을 쓰면 비쳐 보였으므로 보통 책을 만들때 종이를 반으로 접어 제본했는데, 이 종이 사이를 뜯어 글을 적고 다시 봉해놓았는데 이것이 오래되어 다시 뜯어지며 발견된 것.
[12]
5개가 만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