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默齋日記. 조선 시대에 저술된 일기로 총 세 종류가 현존하고 있다.2. 이문건의 묵재일기
양아록으로 유명한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이 매일의 일상을 기록하여 남긴 일기. 41세 때인 1535년 11월부터, 74세로 사망하기 몇달 전인 1567년 2월까지 약 33년 동안 기록했다. 그러나 이문건 본인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20년이 넘게 귀양살이를 했던 탓에 전부가 온전히 전해지지는 못하고 현재는 17년 8개월 분만 남아 있다. 총 10권. 현재 성주이씨 문중에 소장되어 있다.양주 노원에서 모친의 시묘살이를 하던 1535년 11월 1일부터 1537년 3월 29일까지는 거우일기(居憂日記), 동부승지에 재직하며 관직 일기 또는 사환 일기를 쓰던 1537년 4월 1일부터 1545년 4월 23일까지는 정원일기, 1545년 9월 성주로 유배를 떠난 뒤의 기록들은 유배일기(流配日記)로 나뉘어진다.
2.1. 의의
우리나라 무속 신앙 중 하나인 아이팔기가 나타난 최초의 문헌이다. 아이팔기는 사주점을 보아 단명할 것으로 밝혀진 아이를 부처나 수양부모, 무당, 귀신 등에게 양자로 들여 액막이를 하고 수명을 늘리는 행위로, 귀신을 멀리하고 대를 잇는 관념이 강했던 유교 사상에 입각한 일반적인 조선 선비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펄쩍 뛸 말도 안되는 행위였지만 손자에게 모든 걸 걸었던 이문건이 손자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런 것까지 했던 것. 한국민속신앙사전 : 아이팔기또한 손자가 천연두에 걸린 후 13일 뒤 얼굴의 딱지가 떨어질 즈음에 마마배송굿도 했음을 기록해놓았다. 한국민속신앙사전 : 마마배송굿 이렇게 1500년대 당대에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던 각종 무속신앙 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서경대학교에서는 초서체로 기록된 이문건의 묵재일기를 정자로 바꾸는 탈초 작업을 하던 중 일기 3권의 낱장 속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설공찬전 4천여 자 분량을 발견했다. 그 전까지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 불리던 홍길동전보다 1백여 년 앞선 작품을 찾아 한국 국문학사에 큰 쾌거가 되었다.[1]
노비종모법에 대한 실례와 여성주의 관점에서도 주목받았는데 이는 묵재일기에 등장하는 여종 향복(香福)때문이다. 향복은 어미가 여종으로서 그 역시 태어날 때부터 종이었고 이문건의 유배생활 중 주로 이문건의 시중을 들었는데, 그런 향복이 어떤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이에 이문건은 간통을 당한 향복이 미웠다고 기술하면서 향복이 간통하는 와중에 소리를 질러 저항하지 않았고 간통한 자가 누군지 이름도 밝히지 않음을 탓하면서 향복은 하가로 쫓아버렸다(명종 7년 3월 13일자 기사). 그리고 20여일후 향복을 강간한 이는 이문건의 형의 손자였던 이천택(李天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때 이문건은 이천택에게 여종과 간통하는 것이 학업에 좋지 않음을 충고할뿐 그에 대한 처벌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2] 이후 향복은 관노 온석(穩石)과도 간통(강간)당하였는데 이를 알게 된 이문건은 향복을 구타하기에 이른다,그리고 향복은 아비 모르는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데 이때 향복이 낳은 아이의 아비가 누군인지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으며 향복이 낳은 어린 딸은 그대로 노비가 된다. ( 조선시대 從母法 따라 代 이은 ‘노비의 삶’, 이투데이, 이성임 서울대 법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주인의 성적 침탈, 우리역사넷), 통간한 인물보다 강간을 당한 여종에 대한 처벌이 더 가혹하게 되는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대목[3][4]
참고로 향복의 어미는 삼월(三月)이고 묵재일기에 종종 등장하는 것에 비하여 향복의 아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향복 역시 비슷하게 아비 없는 자식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
흥미로운 점은 이문건 본인도 1552년(명종 7년) 봄 쯤에 향복을 성희롱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이때 이문건은 향복을 "무릎위에 앉히고 놀다가, 희롱이 지나쳐 무람없는 지경까지" 갔는데 이걸 아내에게 걸려버려서 "당신의 이 일을 여종들이 모두 의심합니다.”같은 소리까지 들었다. 이문건은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어찌 정말로 음란한 짓을 하려고 이와 같이 했겠는가?"라고 일기에 적고 있으며 아내의 의심을 " 투기"로 일축하고 있는데(명종 7년 11월 24일자 기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종 사이에서 이문건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던 것같다. 향복의 어미인 삼월은 향복이 이천택으로부터 희롱당했음을 이유로 이문건에 대한 시중을 쉬게 할 것을 청하자 "가소롭다! 내가 요사이 무료하여 평상시 희롱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라면서 (명종 7년 4월 6일자 기사) 자신에 대한 평판을 억울(?)해 하고 있다.
기타 그 외에도 1500년대 당시 양반들의 교유관계, 관직생활, 유배생활 등에 대해 분석해 볼 수 있으며, 당시 한국인들의 식생활, 농업, 제사 등 각종 생활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예를 들어 이문건은 묵재일기에 옹기를 사용한 내역까지 세세히 모두 기록해 놓았다. 문화원형백과 : 고문헌 속 옹기(묵재일기)
2.2. 외부 링크
3. 이귀의 묵재일기
조선 중기의 정치가였던 묵재(黙齋) 이귀의 일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인조반정의 공신인 이귀가 살아생전 매일의 일상을 직접 기록한 일기로, 후대에 아들들이 안방준에게 가져가 편집을 부탁하였고 이에 안방준이 보기 쉽게 8편으로 정리한 것이다.
대동야승 60권에서 62권까지에 수록되어 있으며, 당대 대표 정치인의 일기인 만큼 17세기 초의 우리나라 정치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사적인 기록이므로 다른 기록과의 교차검증은 필수이며 무비판적인 수용은 금물이다.[5][6]
기타 자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대백과 : 묵재일기 항목을 참조.
4. 김염의 묵재일기
조선 중기의 유학자 묵재(黙齋) 김염(1612~1659)이 1636년부터 1640년까지 약 5년간 기록한 일기. 광산김씨 후조당 종택에서 120년간 대를 이어 내려져온 총 39책의 일기자료 중 하나이다. 총 3책.광산김씨 예안파 문중에서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가 1592년에 향병일기를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 매원(梅園) 김광계가 28년간 매원일기 18책을, 손자 묵재(默齋) 김염이 5년간 묵재일기 3책을, 증손자 과헌(果軒) 김순의가 42년간 과헌일기 6책을 대대로 기록했다. 그 외에도 김해의 종형제인 계암(溪巖) 김령이 39년간 계암일록 8책을, 김염의 동생 김선이 3년간 여온일기 2책을 남겼다.
[1]
이문건은 이외에도 묘비에 한글을 새긴 가장 오래된 자료이자 조선시대 유일한 사례인 '
이윤탁 한글 영비(보물 제1524호)'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다. 한글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윤탁은 이문건의 부친. 그런데 이 집안이 이문건을 제외하면 대대로 단명한 집안이였다. 이윤탁도 마흔을 채우고 죽었고, 이문건은 3남 2녀를 두었으나 아들 온을 제외하면 다들 요절했다. 그나마 딸 하나가 스무살까지 살았으나 간질로 사망. 아들 온도 할아버지처럼 딱 마흔살에 아버지보다 10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지극정성으로 기른 손자 수봉도 할아버지에 비하면 44살이란 이른 나이에 죽었다. 이쯤되면 귀양지에서 주변에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이문건이 대단할 지경이다. 이문건은
양아록을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
[2]
조선만 그랬던건 아니고 19세기 미국도 백인남성이 흑인여성을 강간해도 처벌받지 않았다.
[3]
조선시대에 여자 노비에 대한 처우는 현대적 관점으로 봤을때 열악해보이는점들이 여러기록에서 나타난다.
부북일기만 봐도 신규 지역에 부임된 군관의 현지첩(방직기, 房直妓)이 되라고 여자 노비에게 강요하는 사례가 나온다. 이 여자 노비는 남편을 잃은뒤 수절하여 정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관리들은 이에 아랑곳 없이 여자 노비의 가족을 고문하였고 이에 어쩔수 없이 여자노비는 현지첩인 방직비(房直婢)가 된다.(박취문 일기 인조 23년 7월 22일~23일)
# 그외에도 시침(侍寢)이라고 하여 주인은 손님의 숙소에 여자 노비를 제공하여 성접대를 제공하는 사례가 상당히 자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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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나
마녀사냥이 빈번하던
유럽,
전족이 있었던
중국,
사티가 있던 인도,
가라유키상이라고하여 해외에 자국민 여성을 성노예로 팔아먹은
일본처럼 타국의 사례들을 보면 조선 여노비에 대한 처우가 타국여성들에 비해 더 나빴다고만 볼 수는 없다.
[5]
이전 기록에서는 이귀가 묵재일기에서 이괄에 대해 온건한 진압을 주장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묵재일기에서 이귀는 "문회 등이 이괄의 반란을 고변했는데, 사람들이 발표하기를 꺼렸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중대한 사안을 그냥 묻어두려 하느냐.'고 말하고 당장 조사를 진행하게 했다.", "국청의 추관들이 '증거가 불충분하니, 무고로 의심된다.'면서 고변자들을 처형하려고 하길래, 그러지 못하도록 막았다.", "국청에서 이괄은 두고 아들만 체포하려 하였다. 그래서 '군권을 거머쥔 이괄이 이를 수긍할 리가 없다. 일단 그의 직위를 갈아낸 다음에 아들을 조사하고 무고함이 밝혀지면 복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고 결국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등의 기록을 남겼다.
묵재일기(默齋日記)-치역논변(治逆論辨) 실제로 실록에서도 이귀는 이괄의 반란에 대한 고변이 들어오자, 당장 이괄을 잡아들여 국문해야 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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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실록의 기록을 보면, 김류는 이귀와는 달리 이괄을 두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으로 김류가 어떤 태도를 취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양사가 "당시 김류는 이괄을 두둔했다."는 내용이 포함된 간언을 인조에게 올린 기록이 있어,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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