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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2:00:36

한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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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후 소하 (酇侯 蕭何) 유후 장량 (留侯 張良) 회음후 한신 (淮陰侯 韓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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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간략 소개4. 말말말5. 한삼걸이 등장하는 미디어믹스
5.1. 영상 매체(사극, 영화)5.2. 만화, 게임

1. 개요

중국 진말한초(秦未漢初) 시대, 전한(西漢)을 건국할 수 있게 고조 유방(劉邦)을 도운 세 명의 명신인 장량, 소하, 한신을 일컫는 말.

서한삼걸(西漢三杰). 전한삼걸(前漢三杰), 한초삼걸(漢初三傑), 건한삼걸(建漢三傑)등으로도 불린다. 심지어 그냥 삼걸(三傑)이라고만 해도 이 세 사람을 의미한다고 봐도 된다. 중국사가 기본소양이었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그냥 삼걸이라고만 해도 한삼걸임을 다들 알아들었다.[1]

현대 국어사전에도 삼걸의 의미로 소하/장량/한신[2]을 묶어 부르는 말임이 명시되어 있다.

2. 상세

파일:MPBs6nJ.jpg
한삼걸과 유방
한삼걸은 한나라 건국에 있어서 최고의 공적을 세운 공신들이자, 기나긴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들이다. 이들을 이끈 유방도 위의 기록처럼 자신을 세운 최고의 공신들로 뽑았다. 이들 셋은 오늘날까지도 개국공신의 대명사로 불린다.

이들이 얼마나 능력이 뛰어났냐면, 각각 "중국사를 대표하는 책략가",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재상",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꼽힐 정도이다. 이들의 포스가 워낙 대단해서, 훗날 여러 왕조의 공신들의 활약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보통 이 세 명이 같이 있었던 전한의 개국 공신들을 최고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 세명은 단순히 능력자 세명이 모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각자 '대책략가', '명재상', '천하명장'같이 역할 분담이 확연하게 나뉘는 부분이 묘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능력뿐만 아니라 이 세 명이 뿜어내는 개성 역시 대단히 다채로운데, 멸망한 조국의 원한을 갚으려는, 귀족 출신이자 미녀 같이 고운 외모의 천재 참모라든가, 일개 고을의 아전으로 마을 잔치의 축의금을 셈하기나 하면서 지내다가 천하의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는 대재상이라거나, 남의 가랑이를 기어가고 밥을 빌어먹고 살던 동네 한량에서 수십만 대군 위에 서게 되는 대원수라든가, 웬만한 소설의 등장인물보다도 강렬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로 그들의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수없이 회자되었다.

이러다 보니 한 명만 있어도 대단한 인물들을 무려 셋이나 휘하에 둔 군주 유방에 대해서 '천하의 행운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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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그러나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그들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만약 유방이 한신을 재상 자리에 올려 내정을 담당하게 하고, 소하를 대장군에 임명해 북벌을 지시했더다면 유방이 항우를 누르고 천하를 통일할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유방 역시 자신이 천하를 쥘 수 있게 된 것은 '그들 세 사람을 쓸 줄 알았기 때문' 이라고 말했으며, 반면에 유방의 적이었던 항우 범증 한 사람조차 제대로 부리지 못했다. 본래 장량은 한(韓)나라의 사람이었고, 심지어 한신은 항우의 사람이었다가 유방에게 왔다. 유방이 처음부터 휘하에 둘 수 있던 이는 우연히도 같은 패현 사람이었던 고향 친구 소하 뿐, 나머지 둘은 자신에게 오도록 만든 것이다.[3]

이런 점 때문에 최고의 능력자는 이들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기용하여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조율한 유방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또 유방도 이들의 능력 못지 않은 통솔력이 있었으니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한신이 유방을 '장수들의 장수'라고 했던[4] 것도 이 점을 반영한다.

3. 간략 소개

3.1. 소하

생몰년도 ? ~ BC 193
이름 소하(蕭何)
작위 찬후(酇侯)
시호 문종후(文終侯)
출생지 패현(沛縣) 풍읍(豊邑)
진나라(秦) 시대에도 관직에 있었으며, 이후 유방(劉邦)의 막료(幕僚)로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이 과정에서 개국 공신 서열 1위에 인정받은 인물. 즉 공식적으로 한나라에서 한제국의 통일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인정했다는 말이다. 이때 찬후(酇侯)로 봉해지고 공신들중 가장 많은 식읍 7,000호를 하사받았다. 상국에 임명되고 구석을 수여받아 한나라 역사에서도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시호인 문종(文終)과 합칭해 찬문종후(酇文終侯)라고도 한다.

전쟁 중에 자주 얼굴을 내보이는 장량, 한신과는 달리 소하는 전쟁이 벌어지는 내내 후방에 머물러 있어 언급이 적다. 그러나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전쟁의 핵심인 보급에 주력한 소하의 공 역시 어마어마하다. 비록 관중은 과거 진나라의 중심지로서 타지역에 비해 우수한 생산력을 발휘했다곤 하나 전쟁 중 기근이 돈 적도 있었으며, 병사가 부족해 어린 청년들과 노인들도 징발했기 때문에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농사를 지을 상황이 아니었다. 때문에 지도자는 징발할 군량의 양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식량을 정확히 계산해 병사들과 백성들 양측에서 터져나올 수 있는 불만을 최소화해야 하고, 민심이 나빠지면 각종 제도를 통해 백성들을 다독여야 하며, 행여나 흑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이 나타나지 않도록 귀족들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방은 전쟁기간 내내 항우와 정신없이 치고받느라 관중을 내내 비워놓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즉 2인자인 소하에게 모든 책임이 걸려 있었다는 뜻이다.

소하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웅들의 화려한 전설 뒷편에서 그 영웅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묵묵히 마련해주었다. 삼진을 평정한 한신의 공에는 파와 촉에서 물자를 끌어올린 소하의 공훈이 있었다. 유방은 팽성의 싸움에서 유례없는 대패를 당했으나 소하의 보급에 힘입어 궤멸적인 패배를 극복해 내었다. 유방과 항우 광무 대치 당시, 유방의 군량은 그래도 여유가 있었지만 항우의 초군은 빈곤에 시달렸다. 항우는 그 이전까지 유방을 수차례 격파했지만, 소하의 보급이 이어지면서 결코 유방에게 결정적 패배를 주지 못했다.[5]

또한, 전쟁 중 본거지를 맡고 있는 그 막대한 역할 때문에 군주 유방에게 여러 차례 의심받기도 했지만, 뛰어난 처세술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후손들도 매우 대우받았는데, 사기 소상국세가에서는 소하가 죽고 난 후에도 황실이 소하의 후손을 찾아 작위를 잇게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하가 이룩한 공훈은 다른 공신들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고 컸기 때문이었다.

3.2. 장량

생몰년도 ? ∼ BC 186
이름 장량(張良)
자방(子房)
작위 유후(留侯)
시호 문성후(文成侯)
본래 한(韓)의 귀족 출신으로, 유방 참모로 활약하며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이 공으로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다른 한삼걸 중 소하(蕭何)가 행정업무에 주력하고, 한신(韓信)이 전쟁에 주력할 때, 장량은 유방의 정치, 사회 분야 기획자로 활약했다. 즉 초한전쟁 중에 가장 유방과 오랜 시간 같이 있으면서 그의 결정 하나하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장량이라는 것. 때문에 어떤 조직보스의 가장 믿음직한 측근을 "(그 사람의) 장자방"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6]

무엇보다 한삼걸 중 유방에게 가장 신임 받았던 인물이 바로 장량이다. 한신은 그야말로 당해버렸고 소하는 여러 차례 의심도 받았지만 장량은 그런 것도 없었다. 유후 세가나 사기의 여러 언급에서 장량의 제안을 유방이 거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7] 거절은커녕 심지어 장량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는 식의 기록도 거의 없다. 이처럼 장량에 대한 유방의 신뢰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유방은 장량에게 무려 3만 호의 식읍[8]을 주려고 했으나, 장량은 이를 거절했다.[9]

관료, 정치가와 군인이라는 비교적 현실감 있는 모양의 다른 두 명에 비해 장량은 신선을 만났다거나, 벽곡하며 생활했다는 등 탈속한 구석이 많다. 이런 일화에 대해 장량의 처신술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 한신같은 공신들이 숙청되고 소하조차 말년에 옥에 잠시 갇혔다 풀려나는 수난을 당하는 와중에도 장량은 그 의심많은 여후한테마저 신임을 받으면서 별탈없이 천수를 누렸다. 애초에 유방은 장량을 숙청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고, 장량도 물러나거나 속세를 떠나기는커녕 계속 장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조언을 했고 그 후 속세를 떠나 말년을 성인처럼 보냈다.[10]

3.3. 한신

생몰년도 ? ~ BC 196
이름 한신(韓信)
작위 제왕(齊王)→초왕(楚王)→회음후(淮陰侯)
출생지 강소성 회음(淮陰)[11]
과하지욕(胯下之辱), 다다익선(多多益善), 배수진(背水陣) 등 여러 고사를 만들었고,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을 받았으며, 전한 건국 이후 최초에 봉해진 7명의 이성왕(異姓王) 중에 한 명이었다.

중국의 역사는 기나긴 수천 년에 달하며, 그 와중 수많은 나라와 영웅호걸이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신은 그런 중국 역사상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명장이다. 모든 지휘관들은 각자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니 일괄적인 비교는 어렵더라도, 단 한 번도 진적이 없는 무패를 자랑하며, 적어도 가장 뛰어난 명장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거의 모든 전술을 다 사용해 승리하여 쌓은 군공이 중국 명장 중 최고로 손꼽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실제로 한신은 단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시작하여 여섯 나라를[12] 무너뜨렸으며, 두 명의 왕을 사로잡았고, 한 명의 왕을 참살했다. 그 기간은 불과 몇년에 불과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기동전, 배수진, 우회공격, 전면전 등 온갖 방식의 전투 방법을 총동원 했고, 다 이겼다.

그러나 장량과 소하와는 달리, 전쟁터에서의 귀신 같은 면모에 비해 처세술은 빵점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유방과는 여러 차례 대립하는 면모를 보였지만, 결정적일 때마다 머뭇거린다든가 혹은 유방에게 선수를 먼저 빼앗기면서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그 엄청난 공적으로 제왕(齊王)과 초왕(楚王)자리에 올랐는데도 불구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고,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널리 퍼졌으며[13] '토사구팽'이라는 고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되어버렸다.[14] 이때문에 임팩트나 전공과는 달리 공신이나 신하로써의 자세에 대해서는 소하, 장량에 비하면 다소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허나 아무래도 초한지로 전신같은 기운의 한신을 접하는 경우가 많은 오늘날 독자들에겐 그런 처신적 부분보단 불세출의 명장으로 명성이 더 높다.

4. 말말말

무릇 군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여 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자방만 못하다.
夫運籌策帷帳之中, 決勝於千里之外, 吾不如子房.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군량을 준비하여 그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鎮國家, 撫百姓, 給餽馕, 不絕糧道, 吾不如蕭何.

백만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항상 이기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는 데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連百萬之軍, 戰必勝, 攻必取, 吾不如韓信.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인데, 내가 그들을 능히 부릴 수 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천하를 차지한 까닭이다.
此三者皆人傑也, 吾能用之, 此吾所以取天下也.

항우는 그나마 있었던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項羽有一范增而不能用, 此其所以為我擒也.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記) 中

5. 한삼걸이 등장하는 미디어믹스

워낙 역동적인 인물들이었고 일단 초한쟁패기 자체가 매력적인 시대이기에 각종 미디어믹스에서 자주 나왔다. 그러나 보통 항우와 유방이라는 양대주인공의 대립이 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기에, 의외로 한삼걸의 비중이 모두 강하게 묘사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몇몇 작품들 중에서는 거의 진주인공 비중을 가지고 있는 한신은 제외.

5.1. 영상 매체(사극, 영화)

5.2. 만화, 게임

파일:external/i3.17173.itc.cn/san12015.jpg 파일:long good sam12.jpg 파일:attachment/한신/one_god_sam12.jpg
소하 장량 한신

[1] 단, 일본에서 삼걸은 전국 3영걸 혹은 유신 삼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을 의미하기도 한다. [2] 또는 촉한 관우/ 장비/ 제갈량. 다만 이쪽은 보통 촉한삼걸(蜀漢三杰), 계한삼걸(季漢三杰) 등으로 따로 구분한다. 사실 이 셋을 인걸로 묶는 부간(傅幹))의 발언 자체가 한삼걸의 오마주다. [3] 사실 소하도 면밀히 살펴보면 유방의 용인술이 드러나는 인물이다. 소하 정도 되는 인물이 고작 고향 친구라고 유방을 따랐을 리는 없다. [4] 다다익선 항목 참고 [5] 이렇게 된 것은 소하가 유방의 함양 점령시 과거 진이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모아 놓은, 아방궁의 서고에 있던 천하의 정보를 적어 놓은 책들을 죄 쓸어갔기 때문이다. 소하가 한 일 중에서도 가장 큰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다 후방에서는 팽월이 초군의 보급로를 습격하며 초군의 보급망을 교란시키기까지 했다. [6] 대표적으로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나의 장자방'이라 불렀다 [7] 정확히 말하면 유방이 장량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라고 볼 수 있는 기록은 딱 하나 있긴 하다. 사기 유후 세가에서 '漢十二年, 上従撃破布軍帰, 疾益甚, 愈欲易太子. 留侯諫, 不聴, 因疾不視事. 叔孫太傅称説引古今, 以死争太子. 上詳許之, 猶欲易之.' '한 12년에 주상이 경포의 군사를 격파하고 돌아왔는데 부상이 더욱 심해지자 태자를 더 바꾸려고 했다. 유후가 간했으니 듣지 않았다. 유후는 병을 핑계로 일을 돌보지 않았다. 숙손통이 고금의 사례를 들어가며 설득하는 등 죽음으로 태자를 위해 맞섰다. 주상이 짐짓 거짓으로 들어주는 척 했으나 여전히 태자를 바꾸려 했다.' 이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본래부터 장량은 태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상산사호를 초빙하라고 여후에게 말한 것도 여씨 일족이 워낙 적극적으로 부탁을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랬을 뿐이었다. 이 기록은 여택이 간절하게 부탁하자 장량이 어쩔 수 없이 계책을 내준 이후의 기록인데, 본래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던 장량이 태자 문제를 유방에게 이야기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이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은 여씨 일족에게 "부탁한 대로 반대는 했다."는 표시를 보여준 뒤 "나 이제 아프니까 뭘 더 할 수 없다." 제스처를 보여줬다고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태자 문제를 유방에게 이야기 했다고 해도 그렇게 애를 써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량의 본심이 강하게 들어갔다고 보기도 어려울테고. [8] 당시 가장 비옥한 지역인 제나라 땅 3만 호를 장량이 스스로 자유롭게 고르게 해 식읍을 하사하려고 했었다. [9] 장량은 3만 호 식읍은 너무 많다고 거절하고 10배가 적은 유방을 처음 만난 유(留)지역 3천 호를 요청했다. 이에 유방은 장량이 욕심 없다고 대만족하며 3천 호 식읍과 함께 유후(留侯)로 봉한다. 참고로 당시 최고 1등 공신으로 선정된 소하가 7천 호를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10] 다만 장량이 말년을 보낸 곳이 장자제인데, 이곳 날씨가 워낙 덥고 습하기 때문에, 사실상 숙청당한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11] 진말 당시는 동해군(東海郡)에 속했다. [12] 대나라, 위나라, 조나라,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 [13] 이 고사의 유래 자체는 범려(范蠡)의 일이다. 다만 워낙 이쪽이 임팩트가 강하여 한신과 유방의 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14] 다만 한신을 직접 살해한 것은 유방이 아니라 그 아내인 여후가 한 일이라는게 중론이다. 또, 한신이 아무 잘못 없는데도 숙청당한 것도 아니고 분명 한신은 숙청당할 명분을 내내 쌓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역이기를 죽도록 만든 것과 해하 전투에서 미적거리다가 늦게 참전한 것은 기군망상의 죄로 당장 처형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 사실 전후 숙청당한 한나라 공신들 중 그나마 억울할 만한 인물은 팽월 하나 뿐이다. 그러나 팽월도 무지렁이었기 때문에 신하로써 부적절한 행위를 여럿 저질렀다. [15] 삼국지 인터넷에서 처음 나왔다. 단 소하는 삼국지 9콘솔판부터 나왔다. 근데 콘솔판은 별로 한 사람들이 없어서 삼국지 11부터 나왔다고 알려져있다. [16] 다만 정치 100은 진시황, 관중이다. 소하는 최소한 정치가 순욱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