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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23:08:00

새미 리

<colbgcolor=#00001b><colcolor=#ffffff> 새뮤얼 리
Samuel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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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0년 8월 1일
캘리포니아 주 프레즈노
사망 2016년 12월 2일 (향년 96세)
캘리포니아 주 뉴포트비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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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57cm, 58kg
종목 다이빙
주종목 3m 스프링보드, 10m 플랫폼
1. 개요2. 어린 시절3. 선수 경력4. 은퇴 이후5. 수상 기록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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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前 다이빙 선수, 이비인후과 의사이며, 미국 최초의 아시아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이 업적으로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도 헌정되었다.[1] 동시에 손기정에 이어 한민족 사상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이민 2세이다. #

2. 어린 시절

새미 리의 부친 이순기는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미국 이민 초기 세대였다.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새미 리는 12세였을 때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생생히 지켜보게 되고, 자기도 반드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이후 다이빙을 시작하게 되는데, 157cm의 단신이라는 핸디캡이 비교적 덜한 종목으로 다이빙을 택한 것이다. 당시 유색인종들은 수영장 이용에 있어서도 많은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훈련에 애로를 겪는다.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입장이 허용되었고, 수영장에 입장을 못하는 날엔 구덩이에 모래를 채워놓고 그 가운데로 뛰어내리는 식으로 연습했다고 한다. 훗날 인종차별 타파를 위해 여러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유년시절의 경험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2]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생회장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다. 교사들은 이 학교에서 백인이 아닌 학생이 회장을 한 적이 없다며, 상처받지 말고 그냥 포기하라고 권했으나 새미 리는 선거를 완주했고 끝내 당선되기까지 했다. 훗날 새미 리가 금메달을 목에 걸자 모교에서는 이 날을 '새미 리의 날'로 정하는데, 이 때 기념식에 참석한 리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꿈을 짓밟는 잘못된 관습에 굴복하지 마라"는 연설을 남겼다.

3. 선수 경력

1942 전미선수권에서 10m와 3m 두 종목에서 모두 우승하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유색인종이 미국 다이빙 챔피언이 된 것은 최초였다. 종전 후 열린 첫번째 올림픽인 1948 런던 올림픽에서 미국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하여 10m에서 금메달, 3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0m 경기를 할 때 1차시기부터 입수를 잘못해 몸으로 입수하며 감점을 많이 받았고 많이 뒤처진 채로 시작했으나 나머지 시기에서 실수없이 기술을 선보여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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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 사진[3] 올림픽 2연패 달성[4]

4년 후에 열린 1952 헬싱키 올림픽에도 출전하였고 48년 런던 올림픽에서와 동일한 10m 종목에서 또다시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뤄낸다. 1953년에는 미국 체육계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인 제임스 설리번 상을 수상했다. 훗날 1990년에 새미 리는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여담으로 이 때 동시에 헌액된 인물 중에는 조지 포먼도 있었다.

4. 은퇴 이후

운동을 하면서도 학업을 병행했던 새미 리는 이미 의대를 졸업하여 의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었다. 이는 인종차별을 생생히 겪은 부친이 아들로 하여금 의사 같은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직업을 가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역에서 은퇴한 후 군의관으로 자원입대하여,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주한미군에서 복무할 수 있었다.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경무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과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그의 부친 이순기와 쌓았던 친분을 회상했다고 한다.

새미 리의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드높았기에 각국 다이빙 대표팀에서 거액을 약속하며 코치로 와달라는 제안이 많았으나 그는 딱 두 나라의 선수들만 지도했는데, 바로 미국과 한국이었다. 특히 1964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던 일본 대표팀에서 리에게 끈질기게 구애했으나 이를 단호히 뿌리치고, 혼자 자비로 일본으로 가서 한국 선수들을 찾아가 지도해 주기도 했다.

같은 소수민족이었던 사모아계인 그렉 루가니스를 지도한 것 역시 새미 리이다. 루가니스가 15살일 때부터 그의 재능을 알아본 리는 직접 한국음식을 해 먹이며 아들처럼 키웠고 루가니스는 리의 지도를 받은 지 1년만에 미국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다. 이후 1984, 1988 두 번의 올림픽에서 연속으로 10m와 3m 두 종목에 걸린 금메달을 싹쓸이하는데, 특히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예선에서 연기를 펼치다 스프링보드에 머리를 부딪혀 피가 흐르는데도 마취제 없이 상처를 즉석에서 꿰맨 후 바로 결선 경기에 임해 금메달을 따는 모습은 아직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5]

1956 멜버른 올림픽, 1972 뮌헨 올림픽,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 특사 자격으로 올림픽에 참관하는데 이 때 국제 스포츠계에 두터운 인맥을 쌓았다. 이 인맥을 활용해 평창군이 동계올림픽 개최에 도전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 지원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그는 1990년까지 이비인후과 의사로 활동했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48 런던 10m 플랫폼
금메달 1952 헬싱키 10m 플랫폼
동메달 1948 런던 3m 스프링보드
팬아메리칸 게임
은메달 1951 부에노스 아이레스 10m 플랫폼
동메달 1951 부에노스 아이레스 3m 스프링보드

6. 기타



[1] 개인자격으로는 미국의 올림픽 참여 역사를 통틀어 96명만이 누린 영예이다. [2] 참고로 부친은 당시 이민자로서는 드물게 영어에 유창했고, 대학에 입학하여 학위까지 받았음에도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직장을 얻지 못하고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이런 부친을 지근거리에서 보면서 느낀 점도 많았을 것이다. [3] 단상 가운데 제일 높은 곳에 올라선 사람이 새미 리이며, 왼쪽은 같은 미국 대표였던 브루스 할란(은메달, 3m 종목에서 리를 제치고 금메달을 땄다.), 오른쪽은 동메달리스트인 멕시코의 호아킨 카피야다. [4] 올림픽 다이빙 역사를 통틀어 최초이며, 당시 32세로 다이빙 선수로서는 전성기가 지난 나이임을 고려하면 이 자체로도 대단한 성적이다. 이 당시 경기 영상도 남아 있다. [5] 하지만 HIV 보균자인 루가니스가 나중에 감염 사실을 공개했을 때 이때의 투혼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단 HIV 바이러스는 수영장 물에 피가 조금 섞이는 정도로는 감염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농도도 크게 낮아질뿐더러, 수영장 물 정도의 염소 농도에서는 거의 곧바로 사멸한다.